[사설] 대학의 융·복합 혁신에 국가 미래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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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년 만에 학과 칸막이 사라져, 무전공도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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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기초과학 융합” 난양공대 아시아 톱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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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전공한 스티브 잡스도 융·복합으로 혁신
71년간 학과·학부의 칸막이로 나뉘어 있던 대학의 틀이 깨질 전망이다. 지난달 28일 교육부가 발표한 고등교육법 시행령 개정안에 따르면 학과 없이 대학에 입학해 2~3학년 때 전공을 선택하거나, 1학년부터 전공을 바꿀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온라인 학위 과정도 교육부 승인 없이 설립이 가능하고, 기업이나 연구기관에서 듣는 ‘학교 밖 수업’도 정식 학점으로 인정된다. 의대는 예과 2년과 본과 4년 구분 없이 6년으로 통합한다.
이 중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대학에 학과·학부를 둔다’는 조항을 폐지키로 한 것이다. 이 조항은 1952년 제정돼 지금까지 유지되며 전공 칸막이의 근거로 작용했다. 그로 인해 학과 간 장벽은 높아지고 전공 이기주의는 깊어졌다. 스탠퍼드대가 컴퓨터공학과 정원을 141명에서 745명으로 늘리는 동안 서울대가 55명에서 80명 증원에 그친 것도 정원이 고착된 학과주의에 발목 잡힌 탓이 크다.
산업화 단계가 낮고 사회 발전이 더딜 때는 독자적인 전공 체계로도 산업 생태계가 유지됐다. 그러나 정보·디지털 문명이 고도화하고 사회가 다원화하면서 융·복합 필요성이 커졌다. 예를 들어 반도체 하나를 만들기 위해선 전자·물리·화학·재료학 등 다제간 지식이 결합해야 한다. 배터리도 소재와 화학 전공자가 함께 만든다. 최근에는 유기체 배터리 연구로 생물학과의 협업도 필요해졌다.
그러나 한국의 대학은 학과 간 장벽이 높아 융·복합을 실천하기가 어렵다. 전공도 백화점처럼 너무 세분돼 있어 문제다. 미국 스탠퍼드대와 하버드대는 학부 전공이 40여개 수준이지만, 서울대는 60개가 넘는다. 한번 만들어진 학과는 없애거나 변경하기 힘들어 시대 변화를 따라가기 어렵다. 한국의 대학 진학률이 세계 최고인데도, 기업들은 쓸 만한 인재가 없다며 자체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이유다.
지금 국내 대학에 가장 필요한 것은 융·복합이다. 1991년 개교한 싱가포르 난양공대는 학과 간 장벽을 뛰어넘는 공동연구로 짧은 시간에 아시아 대학 톱5에 올랐다. “인문학과 기초과학 등 분야를 넘나드는 융·복합이 난양공대의 힘”이라는 수브라 수레시 전 총장의 말처럼 협업을 통한 창의성 배양이 세계 수준의 대학을 만들었다. 플립러닝과 액션러닝을 기반으로 한 수업은 실천적 문제해결력을 갖춘 인재를 키웠다. 신흥 명문인 미네르바대학은 1학년 때는 기본소양 수업을 듣고 2학년 때 예술·인문학, 컴퓨터과학, 자연과학, 사회과학, 경영학 중 전공과 부전공을 자유롭게 선택한다. 전공이 한국처럼 잘게 나뉘지 않아 다양한 학문적 관점과 지식을 습득할 수 있다.
‘애플 신화’를 일으킨 최고의 엔지니어 스티브 잡스도 대학 중퇴하기 전까지 철학을 전공했다. 다양한 서체로 데스크톱 혁명을 이끌었던 매킨토시는 그가 청강했던 캘리그라피 수업에서 영감을 받았다. 10여 년 전 그가 처음 세상에 내놓은 스마트폰과 태블릿PC는 기술과 인문학을 접목한 혁신으로 세계인을 사로잡았다. 이처럼 통섭과 융·복합은 더 이상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정신이다.
다만 학생들의 선호가 낮은 비인기 학문은 위기가 커질 수 있다. 소외되는 학과의 저항도 거셀 것이다. 그러나 대학이 4차 혁명시대를 이끌어갈 혁신 생태계의 허브가 되려면 기존의 틀을 깨는 창조적 파괴와 혁신이 불가피하다. 시대변화에 따라 수요자가 원하는 전공을 다양하게 개설하고, 학생들은 필요한 수업을 두루 들으며 융·복합 인재로 성장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대학 개혁을 미룰수록 미래는 더욱 어두워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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