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데이 칼럼] ‘첫 변론’ 개봉, 득보다 실이 크다

이정민 2023. 7. 1. 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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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민 칼럼니스트
영화 ‘그녀가 말했다(원제 She Said)’는 할리우드 영화 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의 성범죄 사건을 파헤친 실화를 영화화한 것이다. 영화계의 절대 권력 와인스타인이 30여년간 여배우와 어린 여직원들을 상대로 성폭력을 저지르고 돈과 권력으로 입막음해 온 추악한 범죄의 실체가 드러나며 세계적인 미투(Me Too) 운동의 기폭제가 됐다. 이를 파헤친 건 뉴욕타임스의 두 탐사전문 여기자, 메건과 조디다.

영화는 두려움에 떨며 진술을 꺼리는 피해 여성을 찾아내 설득하는 끈질긴 노력과 기사화를 막으려는 와인스타인 측의 집요한 협박·방해 과정을 생생하게 담았다. “나는 돈을 벌고 경력도 쌓고 싶은 28세 여성이었고 하비는 세계적 유명 인사다. 힘의 균형을 따지자면 나는 0, 하비는 10이다.” 피해 여성의 이 말은 직장 내 성추문 사건의 본질이 권력관계에서 비롯된 폭력임을 고발한다.

「 여성단체 반대 속 개봉강행 예고
“권력관계서 발생, 직장 내 성희롱”
인권위·법원 판단 무시한 오만
결백 주장한다고 명예회복 될까

선데이 칼럼
이 영화를 다시 떠올리게 된 건, 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죽음을 다룬 다큐멘터리 ‘첫 변론’의 개봉(8월 예정)을 둘러싼 잡음 때문이었다.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라며 개봉 철회를 요구한 여성·인권단체에 대해 “우리 사회에 페미·미투 계엄령이 발동됐다”고 반격하면서 마찰음이 커지고 있다.

다큐는, 오마이뉴스 기자가 박 전 시장의 주변 인물 50여명을 인터뷰해 쓴 책 『비극의 탄생』이 원작이다. 제작진은 ▶피해자의 호소 내용만 있을 뿐 ▶성추행을 입증할 증거가 없다며 박 전 시장의 결백을 주장한다. 이런 대목들이 있다. “(피해자가) 시장에게 넥타이를 매어주는데 그 모습이 아내가 남편 넥타이 매주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시장 몸에 마이크를 장착할 때가 많은데, 다른 일을 하다가도 그걸 보면 달려와서 본인이 시장 몸에 마이크를 채워주곤 했다.” 내밀한 사적 관계, 피해자가 원해서 한 일이란 뉘앙스를 짙게 풍기는 인용 문구는 영화 속 와인스타인 측 대응을 연상케한다. “그 여자들이 피해자인 게 확실한가?” “뜨고 싶은 욕심에 제작자를 꼬신 것 아닌가?” 피해자의 행실이 문제라는 식의 부정적 평판을 퍼뜨리고 피해자 깎아내리기로 논점을 흐린뒤 교묘히 그물망을 빠져나가려는 전형적 수법 말이다. ‘박 전 시장은 결백하다’는 궤변적 변론은 성범죄 가해자의 고전적 대응 방식의 차용에서 나아가 ‘대안적 사실’이라는, 확증편향 시대에 편리한 기제를 장착하고 있다. 증거인멸 시도를 ‘증거 보전’이라고 하고, 비리와 범죄가 드러나면 음모론으로 받아치며 허구와 거짓을 ‘실제’인 것처럼 선전하는 기술 말이다. 지난 정권 때 우리는 조국 사태로 나라가 두 동강 나는 분열과 아픔을 경험했다. ‘첫 변론’ 상영이 강행된다면 진영과 광기의 정치가 몰고 올 광풍에 온 나라가 또 한번 휘청거릴지도 모른다. 불행한 일이다.

제작진은 박 전 시장의 죽음으로 충분한 반론권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다큐 개봉의 당위성을 강조하지만, 이는 국가인권위원회의 조사 결과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이다. 인권위는 문재인 정권 시절이던 2020년 이 사건에 대한 직권조사를 벌여 이듬해 1월 ‘권력관계에서 발생한 직장 내 성희롱’이라고 결정했다. 인권위는 ▶성희롱 행위가 있었다고 믿을 만한 상당한 근거가 있고 내용이 중대하다고 인정해 직권조사를 결정했고 ▶박 전 시장의 사망으로 인해 방어권을 행사할 수 없는 특성을 감안, 사실 인정 여부를 좀 더 엄격하게 판단했다는 점도 분명히 밝혔다. 박 전 시장의 부인 강난희씨가 인권위 결정을 취소해달라며 제기한 행정소송도 패소했다. 법원도 인권위 결정을 존중했기 때문일 것이다. 국가기관과 사법부가 같은 판단을 내렸는데도 이를 부정하면서까지 박 전 시장의 결백을 주장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렇게 하면 박 전 시장의 명예가 회복되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오만이고 착각이다. ‘첫 변론’의 개봉은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많을 게 분명하다.

제작진에 인권위 결정문 정독을 권한다. 거기에 ‘해답’이 나와 있어서다. 일부를 인용한다. “박 시장은 9년간 서울시장으로 재임하면서 차기 대권 후보로 거론되는 유력한 정치인이었던 반면…서울시장과 비서라는 권력관계 및 사회적 지위 격차로 인해 피해자가 싫은 기색이나 반응을 보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특히 심기와 컨디션을 보살펴야 하는 비서 업무의 특성상 상사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면서 그 상황을 모면하는 것이 여성 비서로서는 최선의 선택일 수 있다.…이러한 성 역할 고정관념의 조직 문화 속에서 성희롱은 언제든 발생할 개연성이 있으며 이 사건도 예외가 아니었다.”

다시 ‘그녀가 말했다’로 돌아가보자. 기자 취재에 불응했던 피해 여성들이 입을 열게 된 건 “내 딸들마저 그런 폭력에 순응하며 살게 할 순 없다”는 자각 때문이었다. “입 열기가 겁났지만 참는 건 더 큰 고통”이었다.

영화는 이제 막 사회에 나와 희망에 부풀어있던 여성들이 입은 치명적인 좌절에 주목했다. “이 일로 내 삶의 방향이 바뀐 느낌이었다. 커다란 판단 착오가 모든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 딴 여성들은 나와 달리 거절했을 거라고 생각하니 그 짓을 허락한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날 그는 내 자존감을 뺏어갔다. 막 자존감을 확립해가기 시작할 나이에…” 피해 여성의 독백이 오랜 여운을 드리운다.

이정민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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