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와 사색] 나의 가족(家族)
나의 가족(家族)
김수영
고색이 창연한 우리 집에도
어느덧 물결과 바람이
신선한 기운을 가지고 쏟아져들어왔다
이렇게 많은 식구들이
아침이면 눈을 부비고 나가서
저녁에 들어올 때마다
먼지처럼 인색하게 묻혀가지고 들어온 것
얼마나 장구한 세월이 흘러갔던가
파도처럼 옆으로
혹은 세대를 가리키는 지층의 단면처럼 억세고도 아름다운 색깔—
누구 한사람의 입김이 아니라
모든 가족의 입김이 합치어진 것
그것은 저 넓은 문창호의 수많은
틈 사이로 흘러들어오는 겨울바람보다도 나의 눈을 밝게 한다
조용하고 늠름한 불빛 아래
가족들이 저마다 떠드는 소리도
귀에 거슬리지 않는 것은
내가 그들에게 전영(全靈)을 맡긴 탓인가
내가 지금 순한 고개를 숙이고
온 마음을 다하여 즐기고 있는 서책은
위대한 고대조각의 사진
그렇지만
구차한 나의 머리에
성스러운 향수와 우주의 위대함을
담아주는 삽시간의 자극을
나의 가족들의 기미 많은 얼굴에
비하여 보아서는 아니될 것이다
제각각 자기 생각에 빠져 있으면서
그래도 조금이나 부자연한 곳이 없는
이 가족의 조화와 통일을
나는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냐
차라리 위대한 것을 바라지 말았으면
유순한 가족들이 모여서
죄 없는 말을 주고받는
좁아도 좋고 넓어도 좋은 방 안에서
나의 위대의 소재(所在)를 생각하고 더듬어보고 짚어보지 않았으면
거칠기 짝이 없는 우리 집안의
한없이 순하고 아득한 바람과 물결—
이것이 사랑이냐
낡아도 좋은 것은 사랑뿐이냐
〈1954〉
『사랑의 변주곡』 (창비 1990)
작품에는 낡은 집이 한 채 등장합니다. 바닥 한구석이 삐걱대고 창틀은 헐어 문을 꼭 닫아도 적지 않은 바람이 오갑니다. 그래도 정갈한 곳입니다. 부자연스러울 것 하나 없이 정다운 곳입니다. 긴 세월 가족의 입김과 순한 말들을 받아준 친구 같은 곳입니다. 오늘도 식구들은 아침부터 눈을 비비며 집을 나섰다가 저녁 무렵 돌아옵니다. 이 집에 모여 저마다 다른 생각에 빠집니다. 조화라 해도 되고 통일이라 해도 무방합니다. “낡아도 좋은 것은 사랑뿐”이라고 말하는 시인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아니 다시 고개를 내젓습니다. 세상에 낡지 않는 것이 사랑뿐이겠지요.
박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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