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티 없어져 얼굴 고와집니다” 박승직 상점 ‘박가분’ 열풍

2023. 7. 1.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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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문화의 기록장 ‘종로 모던’] 신식 화장과 신여성
서울 도심 한복판, 즉 대한민국의 중심에 ‘광화문’ 현판이 걸려있다. 유교적 가치와 덕목으로 백성을 교화해 태평성세를 이루고자 했던 조선의 이념적 지향이 응축돼 있다. 약 150년전의 개항을 깃점으로 새 문물이 밀려들어 ‘광화문’ 현판 앞을 거니는 사람들의 겉모습이 바뀌고 생각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광화의 시대가 저물고 개화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새로운 사조는 그 때까지 조선을 떠받치던 전통과 때로 갈등하고 때로는 조화를 이뤄내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지금 우리의 모습, 우리의 생각, 우리의 삶을 규정하는 다양한 요소 가운데 상당 부분이 ‘개화기’ 혹은 ‘모던의 시기’에 바깥에서 유입되고 안에서 생성된 것들이다. 개화기를 되짚어 보는 작업이 지금의 우리를 성찰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이유다. 종로를 중심으로 한 서울 도심은 그 거대한 변화의 실험장이자 근대 문화의 기록장이었다. 중앙SUNDAY는 ‘종로 모던(Jongro Modern)’ 프로젝트를 추진중인 종로구청·종로문화재단과 함께 개화기 서울 도심과 한국인의 모습을 되짚어 보는 시리즈를 연재한다. 편집자 주

조선의 여인에게 있어 색조화장은 정숙하지 못한 여성의 ‘금지된 욕망’이었다. 성리학과 유교를 기반으로 한 여필종부(女必從夫), 삼종지도(三從之道)의 숙명에 충실해야 했던 조선의 여성들에게 색조화장은 감추고 덮어야 할 허물이었기 때문이다.

서구문물의 유입으로 전통의 화장 문화에 급격한 변화가 찾아왔다. 1894년 갑오개혁을 계기로 조선은 당시 수공업 단계에 머물러 있던 화장품 산업을 정부 차원에서 관장하고 규제하기 시작했다. ‘위생국’을 설립해 해외 화장품 수입, 국산 화장품 제조에 간여했던 것이다.

신경림 ‘목계장터’ 시에도 박가분 등장

1920년대 평양 권번에 속했던 기생 김영월. 소리에 능하고 연기에도 소질이 있어서 ‘낙양의 길’이라는 영화에도 출연했다.[사진 국립민속박물관]
개항 이후 조선에는 서양의 화장품과 화장법이 물밀 듯 밀려왔다. 조선 최초로 미국 유학을 다녀온 이화학당 교사 하란사(1875∼1919)는 검정 통치마의 양장차림에 모자, 퐁파두르 스타일의 머리 모양 등을 학생들에게 유행시키며, 신여성들의 화장법과 옷차림에 변화를 주도했다. 이러한 신식 옷차림과 화장법은 서양식 교육을 받은 신여성들은 물론 기녀들 사이에서도 상당히 유행했다. 여성이 외출할 때 몸의 윤곽과 얼굴을 최대한 감추고 다녔던 남존여비(男尊女卑)의 조선시대가 막을 내린 것이다. 여성들이 세상 밖으로 나와 양장(洋裝)을 하고 자유롭게 얼굴을 내놓고 다니면서 ‘얼굴과 피부를 가꾸는 일’이 중요해졌다.

1900년대에는 백분, 크림, 향수, 비누 등 서양의 화장품을 모방한 일본의 화장품이나 밀수입 서양 화장품이 크게 유행을 탔다. 특히 러시아에서 들여온 서양 화장품은 매우 귀한 것으로 여겨졌다. 이 무렵부터 여성들은 전통의 연지 대신 베니(적색 안료)를 사용하였고, 입술에는 다양한 색상의 구찌 베니 (입술연지)를 발랐다. 서양의 화장 문화가 색조화장을 천시하는 전통을 밀어내며, 근대적 여성 주체는 자신을 입증할 문화적 표상으로 화장품을 선택하고 구성하며 전통의 가치에 반하는 자아의 이미지를 표출하였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에는 일본 화장품이 주종을 이루며 시장을 주도하였다. 이에 대항하는 국내자본으로 종로 박승직 상점의 ‘박가분(朴家粉)’이 1916년 우리 최초의 브랜드 화장품으로 등장한다. 박승직 상점은 1896년 한성부 종로 4가에 창립하였으며, 박가분을 제작한 사람은 박승직의 아내 정정숙이었다. 그녀는 입정동에 갔다가 한 노파가 백분을 직접 만들어 포장하여 파는 모습을 보고 영감을 얻어, 남편 박승직과 상의한 끝에 공장형 가내수공업으로 10여 명의 아낙을 모아 백분을 만들어 공산품으로 팔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박승직이 운영하는 포목점 단골에게 사은품으로 주기 시작했지만, 박가분은 곧 여성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얻는다.

“박가분을 바르시면 주근깨와 여드름이 없어지고 얼굴에 잡티가 없어져서 매우 고와집니다.”(『동아일보』 1922.11.24. 2면, 박가분 광고)

1920년대 초반 선풍적 인기를 끈 화장품 ‘박가분’. 기존 백분보다 두께가 두껍고 은은한 향도 풍겼다. [사진 부산근현대역사관]
위 신문광고의 문구와 같이 박가분이 미백 효과에 뛰어나다는 소문과 함께 전국 각지에서 방물장수들이 종로 박승직의 집으로 모여든다. 박승직은 1918년 ‘박가분제조본포(朴家粉製造本鋪)’라는 제조업체를 차리고 재래식 화장분을 현대식 상품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당시 박가분은 50전의 싼 가격과 향이 첨가되면서 가히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박가분이 인기를 모았던 또 다른 이유는 포장 방식에도 있었다. 일반적인 백분들과는 달리 박가분은 두께가 매우 두꺼웠고, 작은 갑 형태로 판매했다. 종래의 백분은 두께가 약 3㎜정도 되는 것을 백지로 싸서 팔았으나, 박가분의 경우는 두께가 8㎜였다. 또한 ‘박가분’ 인쇄 라벨을 붙여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방식을 채택했다.

잘 나갈 때는 하루에 1만 갑이 넘게 팔릴 정도로 박가분은 당시 최고의 히트 상품이었다. 박가분은 종로에서 만들어져 방물장수를 통해 전국 각지로 팔려나갔는데, 이는 충주 노은 출신의 신경림 시인이 노래한
「목계장터」

라는 시를 통해 알 수 있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 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구하기 쉽고 사용이 편한 박가분은 신분 계층을 막론하고 더 많은 여성들이 화장을 즐길 수 있도록 했다. 기미와 잡티를 감쪽같이 감춰주고 은은한 향기까지 나니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박가분이 날개 돋친 듯 팔리자 1930년대 들어 서가분(徐家粉), 장가분(張家粉), 서울분, 설화분 같은 유사품이 등장했다. 또한 박가분의 성공에 자극을 받은 조선인들은 1930년대에 대거 화장품 제조업에 뛰어들었다. 그 중 피카몬드, 에레나 화장품, 동보 구리무 등이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화장품 브랜드였다.

그러나 1920년대 말부터 일제의 고급화장품이 유입하기 시작하면서 박가분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게다가 박가분은 피부와 백분의 부착력을 높이기 위하여 납 성분을 넣었는데, 화장을 자주 하던 기생들에게서 그 부작용이 발생하자 인기는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결국 1937년을 기점으로 박가분은 생산을 중단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 후 화장품 광고에는 ‘무연(無鉛)백분’이나 ‘절대로 납이 안 들었음’이라는 문구가 필수적으로 들어갔다.

1920년대 서구화에 대한 저항의 풍조가 일었다면, 1930년대에는 거꾸로 서구를 동경하는 분위기가 급속히 번졌다. ‘추파를 파러(팔아) 사는 여자는 얼골을 횟박가티 분을 처발러야되고(『조선일보』 1933.10.27.
「만추풍경」

)’라는 신문기사와 같이 서양인의 흰 피부를 닮으려는 욕망이 ‘근대의 몸’에 바르는 화장품을 통해 표출되고 있다. 1930년대에 유행한 화장법은 ‘얼골에 분을 허엿케 발르고’, ‘처승달처럼 실낫 같은 눈썹을 곱다라케 그리고’, ‘입에 구찌베니를 칠하는’( 『신여성』 7권 6호, 1933년 6월,
「숙녀 비망첩」

) 것이었다. 조선의 모던걸, 모던보이들에게 아름다움은 곧 서구의 백색 미인이었다.

1930년대 ‘서양미인 따라잡기’ 바람

양장에 신식 화장을 한 김영월을 찍은 사진엽서. [사진 국립민속박물관]
흰 얼굴과 함께 서구적 미인의 전형이 보편화하는 경향은 미국 할리우드 영화의 유행과 백분을 비롯한 화장품 광고의 영향이었다. 1930년대 풍조메루크림, 우데나분백분, 헤치마코롱, 구라부백분, 당고도랑 등 화장품 광고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대개는 금발머리 백인여성이었다.

1930년대 서양미인 따라잡기 열풍은 여성잡지를 통해 들여다볼 수 있다. 1933년 7월 『신가정』지에는 서양인의 눈을 ‘신에게서 받은 아름다운 눈’, 동양인의 눈을 ‘신의 실수’에 비유하며 서양인의 눈처럼 강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방법을 다룬 기사가 실린다. 이 시기에 코를 높여준다는 융비기(隆鼻器) 광고도 등장하며, 1939년에는 쌍꺼풀을 만들어 준다는 ‘아이호-ㄴ은 미안기’ 제품 광고도 『여성』지에 실린다.

남성 지식인들 역시 잡지를 통해 여성미와 화장에 관한 자신들의 의견을 피력하였는데, 이들 중 상당수는 여성의 외모가 ‘조선의 근대화 정도를 반영하는 척도’라고 여겼다. 즉, 가부장적인 조선사회가 갖고 있던 여성미에 대한 기준을 폐기하고 새로운 시대에 맞는 아름다움을 추구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들은 나아가 문명과 야만을 구분 짓는 신체의 외양을 여성의 아름다움과 결부시켜 조선의 여성과 서구 여성의 외모를 비교하였으며, 서양여성들처럼 코가 높고, 입술이 얇은 것이 아름다운 것이라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개항과 더불어 서구문물이 들어오면서, 화장은 ‘신여성’이라는 사회적인 정체성의 도구로서 자리를 잡아갔다. 기생들이나 배우들이나 하던 화장이 일반 여성 대중에게도 일상적인 행위로 여겨지면서 일상적 모더니티가 구현되었다. 여성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근대적 행위이자 담론이 된다. 결국 화장을 통해 여성들은 스스로 ‘소비의 주체’ 로 자리매김했으며, 화장한 얼굴·단발머리·최신 유행 스타일의 의상 등을 통해 근대사회에서 ‘새로운’ 혹은 ‘서구화된’ 여성상을 투영하였다. 화장은 평등과 자유를 상징하는 서구‘화(化)’로서 여성차별에 대한 저항을 ‘몸’으로 드러낸 근대의 도구인 것이다.

종로구청·종로문화재단·중앙SUNDAY 공동기획

문혜진 부경대학교 HK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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