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뉴부대’ 253전 전승, 전쟁 재발땐 자손도 데리고 와 싸울 것
에티오피아 6·25 참전용사 2인
이들은 국제구호단체 ‘따뜻한 하루’와 ‘대한민국무공수훈자회’의 초청으로 방한했다. 이그조는 “6·25 전쟁이 끝난 지 70년이 지났는데도 이렇게 잊지 않고 노병을 초청해 주니 참전 용사로서의 자긍심이 다시 충만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비라투는 “6·25 전쟁이 끝난 이후 꼭 다시 한국을 방문하고 싶었는데, 이렇게 발전된 모습을 보니 더할 나위 없이 기쁘다”고 말했다. 아프리카 유일 참전국인 에티오피아는 6·25 전쟁 당시 총 6037명을 파병했다. 이 중 123명이 전사했고, 536명이 부상했다. 7월 1일 귀국길에 오르는 두 노병을 만나 6·25 전쟁 당시 상황과 현재 생존해 있는 에티오피아 참전 용사 76명의 근황에 관해 들어봤다.
에티오피아 6037명 파병, 123명 전사
Q : 6·25 전쟁에 참전하게 된 계기는.
비라투 “당시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의 직속 부대가 한국에 파병됐다. 황제는 한국을 돕겠다는 유엔의 결정에 동참하기 위해 황실 근위대를 한국에 보냈는데, 이 부대는 에티오피아의 최정예 부대였다. 나는 1951년 5월 에티오피아의 2차 파병 때 한국에 왔다. 당시 17세로 신병이었다. 황실 근위대에 입대하기 위한 훈련을 마치자마자 한국 파병이 결정됐다. 한국에 도착해 보니 주변에서 ‘너무 어리다.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내가 ‘무슨 소리냐. 나는 목숨을 걸고 싸우려고 왔는데 돌아갈 수 없다’고 버텼다. 결국 전투에 투입돼 1년 6개월간 한국을 위해 싸웠고 이후 귀국했다.”
이그조 “나는 전쟁 발발 당시 황실 근위대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20세 때인 1952년 5월에 황제의 명령에 따라 참전했다. 셀라시에 황제는 ‘이길 때까지 싸워라. 그렇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싸워라’고 지침을 내렸다. 에티오피아도 1935년 이탈리아에 의해 침략을 당한 적이 있는데 다른 나라로부터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해 큰 어려움을 겪었다. 황제가 참전 결정을 내린 것은 국제사회의 집단안보가 얼마나 필요한지를 경험으로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Q : 참전 중 가장 기억에 남은 장면은.
A : 이그조 “1952년 가을 한국군과 함께 인민군에 맞서 전투를 벌일 때였다. 어디였는지 기억하진 못하지만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일진일퇴의 공방을 벌이면서 치열하게 싸웠다. 어느덧 한국군과 뒤섞여 공격하던 중 옆에 있던 한국군이 적의 총탄을 맞아 쓰러졌고, 동료 에티오피아군이 그 한국군을 업고 후방으로 빼내던 중 역시 총탄에 맞았다. 결국 두 병사는 피범벅이 된 채 뒤엉켜 운명을 함께했다. 너무 안타까운 장면이어서 지금도 눈앞에 생생하다. 나는 후손들에게 이 얘기를 들려주면서 ‘에티오피아와 한국은 피가 섞인 형제애로 뭉쳐져 있다’고 말하곤 한다.”
Q : 당시 에티오피아군의 활약상은.
A : 비라투 “우리 부대는 황실 근위대였던 만큼 전문적인 군사훈련을 받아 전투력이 우수했다. ‘강뉴(Kagnew)’라는 부대 명칭도 에티오피아 말로 ‘초전박살’ ‘혼돈에서 질서를 확립하다’라는 의미다. 6·25 전쟁 동안 우리 강뉴부대는 253번의 전투를 치러 모두 승리하는 기록을 남겼다. 개전 초기 강뉴부대를 눈여겨보지 않았던 유엔사령부도 나중에는 우리의 전투력을 인정해 중요한 전장에 투입했다. 부산항을 통해 한국에 들어온 강뉴부대는 가평, 춘천 등 곳곳에서 전투를 벌였다.”
Q : 에티오피아가 1974년 쿠데타로 인해 공산화되면서 참전 용사들이 어려움을 겪었다는데.
A : 이그조 “쿠데타가 일어나 황제가 암살되고 에티오피아는 공산국가로 변했다. 이후 1991년 공산정권이 붕괴하기까지 큰 고난을 겪었다. 황실 근위대 고위층은 고문을 당하고 감옥에 가거나 처형됐다. 재산은 몰수됐다. 그 자녀들도 교육받을 기회를 박탈당했다. 우리 같은 사병들도 황실 근위대 출신이라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거의 숨어 살다시피 했다. 제대로 된 직장을 얻기도 쉽지 않았다. 20년 가까운 공산 치하에서 생활기반은 완전히 무너졌다. 이로 인해 황실 근위대로 참전했던 군인들의 가정은 지금도 상당수가 가난에 시달리고 있다.”
유엔사도 전투력 인정, 북한 곳곳 누벼
Q : 생존해 있는 76명의 참전 용사들은 현재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가.
A : 이그조 “우선, 생활이 어려운 참전 용사들에게 한국의 민간단체들이 상당한 도움을 주고 있어 매우 감사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가능하다면 조금 더 보살펴 줬으면 한다. 고령으로 거동이 불편해 집안에서만 생활하는 전우들이 많다. 이들의 대부분이 매우 비위생적인 주거 환경에서 살고 있다. 집수리 등이 절실한 상황이다. 그리고 참전군인 후손들에 대한 교육 지원도 늘렸으면 한다. 양국이 자손 대대로 형제 관계를 유지하려면 후손들이 잘돼야 한다. 이런 분야에서의 배려가 있었으면 좋겠다.”
(‘따뜻한 하루’ 등 민간단체들은 현재 에티오피아 참전 용사들을 위한 다양한 지원 활동을 벌이고 있다. 따뜻한 하루는 2016년부터 현지를 정기적으로 방문해 참전 용사들의 주거 개선 및 의료 서비스, 교육지원 사업 등을 벌이고 있다.)
Q : 6.25 전쟁 이후 한국을 다시 방문해 여러 곳을 둘러본 소감은.
A : 비라투 “하늘과 땅을 비교할 수 있겠나. 6·25 전쟁 당시가 땅이라고 하면 지금 한국의 모습은 하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차이가 크다는 얘기다. 당시에는 제대로 된 건물 하나 보기 어려웠다. 거의 모든 산은 나무가 없는 민둥산이었다. 발전한 한국을 보니 우리 동료들이 흘린 피가 절대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어 한국인들에게 오히려 감사하다.”
■ 63년 한-에티오피아 국교 수립, 공산화로 소원해졌다 2000년대 관계 복원
이런 무공을 기리기 위해 2007년에는 춘천에 에티오피아 한국전 참전 기념관이 문을 열기도 했다. 이 기념관이 자리 잡은 거리의 이름도 ‘에티오피아길’로 명명됐다. 양국은 1963년 국교를 수립했고, 68년에는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가 직접 방한해 박정희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했으며 이를 기념하는 우표가 발행되기도 했다.
이런 양국 관계는 1974년 틀어졌다. 군사쿠데타로 에티오피아가 공산화됐기 때문이다. 황제는 폐위되고 공산정권이 들어섰다. 이후 한국과의 관계는 소원해졌다. 6·25 전쟁 기념식에 불참하고, 1988년 서울올림픽에도 선수단을 보내지 않았다. 대신 1975년에 북한과 공식 수교하고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이런 상황은 1991년 공산정권이 붕괴하기 전까지 지속됐다.
양국 관계는 200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복원된다. 에티오피아 참전 용사들이 초청을 받아 한국을 방문하고, 양국의 정부 기관들과 대학들이 교류와 협력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2011년에는 이명박 대통령이 에티오피아를 방문해 참전 용사들을 만나 지원을 약속하기도 했다. 이후 행정안전부, 방위사업청, 한국수출입은행, LG전자, 종근당 등 정부 기관과 기업들이 에티오피아 지원 사업을 벌였다. 2020년 코로나 사태 발생 때는 마스크와 진단키트 등 인도적 물자가 에티오피아에 전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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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재 기자 ijcho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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