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의 악마를 품은 살인자, 과거 딛고 일어설까

유주현 2023. 7. 1.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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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욘드 스테이지] 서울시극단 신작 ‘겟팅아웃’
고선웅 연출의 첫 리얼리즘 도전작 ‘겟팅아웃’. [사진 세종문화회관]
단정한 긴 생머리의 20대 여자가 있다. 한 성깔 할 것 같은 강렬한 눈빛을 가졌지만 행동은 차분하다. 부스스 헝클어진 머리채의 좀 어린 여자도 있다. 뭐가 그리 화나는지 씩씩거리며 무대를 쿵쾅거린다. 차분한 여자가 날뛰는 소녀를 붙잡아 가만히 옷장 속에 가둬버린다. 이 둘, 한 사람이다.

미국 작가 마샤 노먼의 희곡 원작

고선웅 연출의 첫 리얼리즘 도전작 ‘겟팅아웃’. [사진 세종문화회관]
자신을 겁탈하려는 택시기사에게 총을 쏴 8년간 복역하다 모범수로 가석방된 여자 ‘알리’(유유진)다. 아니 ‘알리’라는 이름의 분노조절장애 문제아를 가두고 다시 태어나기로 한 ‘알린’(이경미)이 출소하자마자 마주한 24시간에 ‘알리’가 온몸으로 싸우고 버텼던 8년의 시간이 중첩된다. 알린이 겪는 현재 순간들의 이유를 과거의 알리가 몸으로 보여준다. 그런데 ‘알리’와 ‘알린’, 정말 같은 사람일까.

서울시극단 신작 ‘겟팅아웃’(9일까지,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이 던지는 질문이다. 지난해 부임한 고선웅 단장의 첫 작품이라 눈길이 쏠렸다. 고선웅이 누군가. ‘푸르른 날에’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등 연극은 물론, ‘변강쇠 점찍고 옹녀’로 창극 부활의 시동을 걸고, 스테디셀러 뮤지컬 ‘베르테르’ ‘광화문 연가’까지, 굵직한 대작들로 객석을 감동시켜 온 ‘우리 시대 이야기꾼’이다. 서울시극단에서 처음 내놓는 연출작에서 그는 어떤 이야기를 건넬까.

올들어 공연계 활황에 다양한 화제작이 쏟아지고 있다. 연극판의 이슈라면 상업극, 비상업극을 막론하고 매체 스타들의 활약이다. 태평양전쟁 실화를 다룬 ‘나무위의 군대’ 객석을 여성 관객으로 빈틈없이 채워버린 손석구, 명불허전 카리스마로 5년 만에 무대를 달군 ‘파우스트’의 박해수 등이다. 그게 아니라면 금테 두른 고전명작이나 노익장 과시다. 예술의전당이 제작한 ‘오셀로’, 이순재의 최고령 ‘리어왕’, 신구가 ‘마지막’을 이야기하는 ‘라스트 세션’ 등이다. 배우건 원작이건, 믿을 구석이 확실하다는 얘기다.

고선웅 연출의 첫 리얼리즘 도전작 ‘겟팅아웃’. [사진 세종문화회관]
그런데 ‘겟팅아웃’은 이런 흐름과 정반대다. 생소한 제목에 순수 연극배우만으로 정면승부에 나섰다. 화제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 고선웅은 “이야기의 본질을 찾고 싶었다”고 했다. “인지도보다 작품에 어울리는 캐스팅이 중요하죠. 나름 두 사람을 찾기까지 오래 걸렸어요. 같은 사람처럼 보이는 싱크로율도 높아야 하고, 내가 원하는 날것같은 표현이 가능해야 하거든요.” 스타나 명작보다, 연기와 스토리텔링에 집중했다는 말이다.

전과자 알리는 ‘알린’으로 새롭게 태어나길 원한다. 번듯한 직업을 얻고 돈을 벌어 감옥에서 낳은 아이를 데려와 함께 살기를 꿈꾼다. 알린은 나름의 방식으로 알리를 누르고 있지만, 주변인들은 믿어주지 않는다. 집정리를 해주러 온 엄마도, 아이아빠인 남자친구도 알린이 지금도 아무에게나 몸을 팔던 문제아 알리로서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냥 계속 어둠 속에서 살라고 하니, 둥지를 튼 빈민촌이 교도소보다 나을 게 없다.

누군가의 하루란 임의의 24시간이 평등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가 살아온 역사와 만나온 사람이 앞으로의 24시간을 만드는 것이라는 깨달음이 단 110분 만에 피부로 와닿는 건, 아마 연극무대여서일 터다. 현재진행중인 24시간 동안의 알린과 8년이라는 과거 기억의 파편인 알리가 한 공간에서 빙빙 돌며 관객의 머릿속에서 서사를 빌드업해가는 ‘연극성’의 재미는 사실 점점 잊혀지고 있다. 모든 것을 보여주고, 화려함을 극대화시킨 스펙터클이 무대미학의 대명사가 되고 있지만, 영상디자인이나 무대세트가 고도화될수록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관객의 머릿속에서 완성해 가는 연극 특유의 매력은 반감되기 마련이다.

키워드는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

고선웅 서울시극단장. [사진 황필주]
고 연출이 ‘겟팅아웃’을 통해 주장한 것도 ‘연극성의 회복’이다. “요즘 같은 시대에 연극성이 무슨 소용이냐고 하지만, 연극은 연극다워야 한다고 생각해요. 연극에는 미스터리가 좀 있어야 관객들이 파헤쳐가는 재미가 있거든요. 한 공간에서 나의 현재와 과거가 만나서 싸우다가, 결국 마주보고 포옹하는 데서 오는, 그런 감동은 영화에선 불가능하지 않나요.”

창작에 능한 고선웅이 오래된 미국 희곡을 택한 건 뜻밖이다. ‘잘자요 엄마’로 1983년 퓰리처상을 수상한 페미니즘 작가 마샤 노먼의 1977년작이다. 전과자 여성을 성적 도구로 착취하려는 남자들, 딸을 부속품처럼 대하는 엄마와의 악에 바친 싸움에 고선웅 특유의 유머와 경쾌한 호흡은 보이지 않는다. 이 70년대 미국 희곡의 무엇이 ‘우리 시대 이야기꾼’을 사로잡았을까.

“이미 고전이 된 희곡이지만, 오히려 동시대적인 행간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이라는 표현을 할 정도로 자기 과거에 관대하지 않은 세상이잖아요. 나에게나 남에게나 자비가 있었으면 싶은데, 이 작품이 그런 이야길 하는 것 같아요. 저는 사실주의 연극을 해본 적 없었는데, 요즘 연극들이 너무 새로운 형식만 추구하면서 연극 본연의 감동을 외면하고 있잖아요. 한 인물이 고난을 겪다가 해결로 나아가는, 그런 서사를 한번 복원해 보고 싶었습니다.”

언제나 고선웅의 무대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다.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느냐, 다들 조금씩 부끄러운 짓도 하고 사는 것 아니냐고. 알린도 결점 투성이다. 비극적 환경에서 자라 살인자가 됐고, 다시 태어나려 발버둥치지만 내면에 살고 있는 악마도 분명히 있다. 그런데 그 악마를 끌어내느냐 잘 가둬놓느냐는 사회에도 얼마간 책임이 있다. 내 편이 되어주는 한두 사람이 있다면, 내 안의 악마에게 자장가를 불러줄 수 있을지 모른다. 알린이 자신을 겁탈하려던 교도관 데니가 사온 화분과, 이웃 루비의 ‘떠나보낸 사람도 네가 원하면 여전히 사랑할 수 있어’라는 다독임에 알리를 안아줄 수 있었던 것처럼.

“대단히 희망적인 결말을 보여주려는 건 아니에요. 남의 한마디에 용기와 희망을 얻을 수 있을 정도로 세상은 간단치 않으니까요. 다만 쇠창살이 쳐진 창가라도 꽃 한송이 놓으면 훨씬 나아지는 것 아닐까요. 알린은 부대끼겠지만, 여하튼 살아갈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네가 원하면, 여전히 사랑할 수 있다는 거죠.” 고 연출의 말이다.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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