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문화] 거칠 것 없는 초원의 바람처럼
그 삶이 핏줄 통해 유전되었다
세계와 소통이 요즘 나의 고민
부모 넘어서는 자식 되려 노력
언젠가 공선옥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라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공 선배, “이, 이번에는 또 먼 일인가?” 다짜고짜 물었다. 사실 용무가 있었으나 단도직입적인 선배의 질문에 머쓱해서 얼버무렸다. “일 없으면 전화도 못 하나요 뭐.” “이, 자네는 일 없으먼 전화 안 해. 영 쌀쌀맞잖애.”
내가 아버지 닮아 독립적이고 단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최초로 느낀 것은 다섯 살 때였다. 그때 부모님은 집에서 5백여m 떨어진 잠실에서 먹성 좋은 누에를 거둬 먹이느라 밤이면 늘 집을 비웠다. 하필 요의를 느껴 잠이 깼고, 깨어 보니 나 혼자였다. 겁 없이 밖으로 나왔더니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장대비가 퍼붓고 있었다. 마당으로 내려서서 두어 걸음 옮긴 순간 나는 방향을 잃었다. 마을로 내려가는 길 외에는 삼 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집이었다. 오밤중 빗속에서 길을 잃으면 위험하다는 본능이 나를 긴장시켰다. 어둠 속에서 나는 손을 내밀었다. 손바닥이 따갑도록 퍼붓는 비와 함께 농밀한 어둠이 느껴졌다. 몇 걸음 내디뎠으나 팔을 내뻗은 것만으로는 방향이 감지되지 않았다. 발바닥의 감촉조차 믿을 수 없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내 발바닥은 길의 경사를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 나는 땅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그리고 온몸의 느낌으로 내리막길을 찾았다. 잠실의 희미한 불빛을 발견하기까지 얼마나 걸렸을까? 그건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네 발에 온몸의 감각을 집중하여 어둠을 뚫고 전진하던 그 생생한 느낌만 아직도 생생하다. 고작 다섯 살이었지만, 그때 나는 나 홀로 세계와 대면하고 있었다. 그 순간을 돌이키면 아직도 짜릿하다.
몇 해 전 몽골에서 나는 오래전 그 장대비 퍼붓던 밤의 설렘을 또다시 경험했다. 막막한 초원에 섰을 때 바람처럼 거칠 것 없이 초원을 휩쓸며 살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슴이 설렜고, 동시에 1000만 이상의 인간이 어깨를 부딪고 살아가는 저 자본의 세계에서 이름 없는 부품으로 살아가야 할 숱한 나날들이 체증처럼 가슴에 얹혔다. 그러한 세계가 요구하는, 그 세계에서 질식하지 않고 버텨 낼 자잘한 위안 같은 것을 나는 잘 알지 못한다. 이렇다 할 잡기도 없다. 정면돌파가 나의 특기고 취미다. 그러나 이 거대한 괴물 같은 세계를 어떻게 정면돌파할 것인가. 어떻게 이 세계와 소통할 것인가. 이게 요즈음의 내 고민이다. 단호함으로 망설임을, 거시로 미시를,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기는 할까? 불안할 따름이다.
아버지는 죽는 날까지 거시의 세계를 살다 갔다. 단호하게 살다 단호하게 갔다. 내 손 한 번 따스히 잡아본 적 없는, 사랑하는 여자와 알콩달콩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가슴 설레 본 적 없는 아버지의 삶이, 아버지의 몸피처럼 강퍅한 아버지의 삶이 애처롭다가, 가만 보니 그것은 아버지의 것만이 아닌 내 것이기도 하여, 심장이 서늘해진다. 부모를 넘어서는 자식, 그것이 모든 부모의 로망일 터, 노력은 해 보겠다고, 아버지 묻힌 백운산 한재 잣나무 앞에서 매번 마음을 다잡기는, 그러기는, 그러고 있다.
정지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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