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질러버린 사람들’이 가진 믿음과 용기, 그리고 이야기[김소연의 논픽션 권하기]
세상 어딘가에 하나쯤
유희경 지음
달 | 272쪽 | 1만5000원
얼마전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다가, 서점주인이 오랜 꿈 중 하나라고 고백한 적이 있다. 조금 더 용기를 내어 저질러버려도 좋으련만 나는 그런 용기를 낼까봐 오히려 조심하고 경계하며 살아간다. 왜냐하면, 서점주인이라는 꿈보다 더 우위에 있는 위시리스트가 모국어로부터 멀리 떠나가서 오래 살아가는 방랑자식 여행이기 때문이다. 화분처럼 어딘가에 붙박혀 한 공간을 내내 지키는 직업과 병행이 가능해보이지 않아서다. 그래서 나는 이 두 꿈을 교묘히 섞은 묘안으로 새로운 꿈을 하나 만들어냈다. 서점주인에게 휴가가 필요할 때에 그 서점을 대신 돌보는 단기 서점주인 역할. 누군가에게 조금의 도움이 되면서 나의 꿈도 슬며시 이룰 수 있는 묘책이라며 이것이야말로 나다운 꿈이라 자부해보고는 한다.
나의 오랜 친구들 중에는 서점주인의 꿈을 용감하게 덜컥 감행해버린 이가 몇몇 있다. 맨처음 북촌에 둥지를 틀었던 ‘책방 무사’의 주인 요조. 그 당시 그녀는, 서점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과 서점 공간을 찾아 임대계약서를 쓰는 일을 일사천리로 해치우며, 어마어마한 용감함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것도 조용하고 은은하고 태연하게. 2015년의 일이다. ‘진미용실’이라는 예전 업소의 낡은 간판을 그대로 두고 입간판을 새로 단, 아주 자그마한 공간이었다. 그곳엔 특유의 큐레이션이 있고, 특유의 음악이 있고, 손님은 많지 않았다. 동네서점이 지금처럼 많지 않던 시절이라서, 그곳은 내게 서울 한가운데에서 가장 나지막하지만 가장 빛이 나는, 모래 속 사금 한 조각 같은 이미지로 남아 있다. 나는 그곳에 작은 기부를 했다. 동네 어르신들이 와 앉아 있을 수 있는 야외벤치를 설치할 비용을 보탰다. 그 벤치의 이름을 ‘시인의 의자’라고 붙여달라고 청하면서. 샌프란시스코에 여행을 갔을 때에 시티라이트라는 이름의 서점에 들른 적이 있었는데, 2층에 낡은 나무 의자 하나가 운치 있게 놓여 있었고 ‘시인의 의자’라고 각인된 걸 인상 깊게 보았던 까닭이다.
오늘도, 무사
요조 지음
북노마드 | 304쪽 | 1만6000원
<오늘도, 무사>는 서점주인의 몇 년간의 경험담들이 담겨 있다. 동네 서점 하나가 어떻게 탄생되었는지부터 어떻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지. 그곳에서 벌어지는 소소하고 녹록지 않은 일들이. 서점주인은 그곳에서 벌어진 경험들을 차곡차곡 받아들이며 어떻게 성숙해져가는지. 책방이 자그마한 공동체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샛길을 만들 듯이 또 다른 꿈들이 어떻게 잔가지를 뻗는지. 이 책을 산 날, 집으로 돌아오던 한 시간 남짓한 귀갓길에서 지하철에 앉아 책에 코를 박고 읽었던 기억이 있다. 서점주인에 대한 내 꿈이 피부에 돋아나고 있다는 간지러움을 느끼며 현관문을 열었던 기억이 있다.
<세상 어딘가에 하나쯤>은 시인 유희경이 시집 전문 서점 ‘위트 앤 시니컬’을 운영하면서 쓴, 일지와도 같은 산문을 엮은 책이다. ‘위트 앤 시니컬’은 2016년에 신촌에서 시작했다. 지금은 혜화동 로터리 동아서점의 2층에서 동아서점과 함께 혜화동의 터줏대감으로 자라나고 있다. 유희경 시인이 시집 서점을 꿈꾸기 시작할 때에 여러 사람에게 조언을 구했던 것으로 안다. 대개 반대를 했다고 전해들었다. 밥벌이가 되지 못할 것을 걱정한 충언들 속에서, 나는 저질러보라고 적극적으로 재촉한 사람에 속했다. 세상 어딘가에 하나쯤 한국어로 된 시집들이 총망라된 서점 하나 정도는 있었으면 하는, 나의 오랜 바람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이런 바람을 품은 이가 분명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꾸고도 남았을 꿈이다. 마음속에서는 흔하디 흔한 꿈이지만 감히 현실로 옮겨갈 수 없는 안타까운 꿈. 2016년의 여름날들에, 나는 참새가 방앗간을 드나들 듯 그곳을 드나들며 꿈이 현현되는 과정을 목격했다.
<세상 어딘가에 하나쯤>은 서점에서 벌어지는 거의 모든 일이 기록돼 있다. 한 장소를 지키는 사람에게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이 애정을 보태는지 적어둔 사랑의 기록이기도 하다. 그 장소에 애정을 지닌 사람들에 대한 시인의 애정과 자랑이 뒷모습처럼 포개어져 있다. 어쩌면 이 산문집은 서점주인의 자부심에 대한 이야기라고 볼 수도 있다. 책의 말미 ‘서점을 완성하는 요소들에 대하여’에는 다음과 같은 대답이 나온다. “친구들을 믿으세요.” 무조건 맞는 말이다. 틀린 말일지라도 틀린 말일 가능성을 헤아리는 것보다 헤아리지 않는 쪽으로 마음을 보태며 간직해두어야 할 말이니까. 꾸준히 시인들의 낭독회가 열리고, 새로 나온 시집을 기다려온 독자들의 구체적인 발걸음이 들리고, 이 시대에 어떤 시가 필요한지에 대한 사람들의 욕구가 돌탑처럼 차곡차곡 쌓여가는 곳.
‘무사’의 주인 요조와 ‘위트 앤 시니컬’의 유희경, 두 서점주인에겐 공통점이 있다. 덜컥 용기를 내어 장소를 만들고, 그곳을 왜 지키고 있는지에 대한 이유들이 그 장소에 점차 깃들기를 바라며 살아간다는 점. 동네 서점을 운영하는 모든 서점 주인들도 같은 마음일 것이다. 이유가 장소를 탄생시키는 게 아니라 장소에 이유들이 모여든다는 것.
김소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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