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경은의 시선] 라면값을 내린다 한들
"형님네 회사는 괜찮아요?"
며칠 전 한 식사 자리에서 만난 식품업계 사람들은 서로의 안부 대신 회사 안부를 물었다. 최근 정부가 물가를 잡겠다고 나서면서 라면, 빵, 과자 할 것 없이 사실상 가격 인하 압박에 시달린 탓이다. 제 살을 깎아서라도 일단은 가격을 내리는 방법밖엔 없지 않겠느냐는 체념 섞인 말이 오갔다. 한쪽에선 한숨을 푹 쉬었다.
발단은 지난 18일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의 발언이었다. 추 부총리는 한 TV 프로그램에 출연해 "지난해 9~10월 (라면 업체들이) 가격을 많이 올렸는데 1년 전 대비 지금 밀 가격이 약 50% 내렸고 작년 말 대비도 20% 정도 내렸다. 다시 적정하게 가격을 좀 내리든지 해서 대응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고 말했다. 사실상 업계에 라면 가격 인하를 공개적으로 요구한 셈이다.
주말 날벼락으로 라면은 물론 빵, 과자 등 밀을 주원료로 제품을 만드는 회사들까지 비상에 걸렸다. 밀가루는 전체 원재료 중 일부일 뿐이고, 국제 밀 가격이 떨어진 것이지 제분사에서 공급받는 밀가루 가격은 여전히 높아 당장 제품 가격을 내리긴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하소연이 쏟아졌다. 원재료비 외에도 인건비·공공요금·물류비 등 제반 비용이 계속 상승세인 점도 걸림돌이라고 했다.
하지만 지난 26일 농림축산식품부가 제분업체들을 소집해 밀가루 가격 인하를 요청하면서 식품업계 가격 인하 압박은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결국 농심을 시작으로 라면, 빵, 과자 업체들이 울며 겨자 먹기로 줄줄이 가격 인하 계획을 내놨다. 한 식품업계 관계자는 "정부가 운을 뗀 이상 최소한의 성의라도 보여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식품회사들의 영업이익률은 대부분 5% 안팎이다. 여차하면 적자로 돌아서기 쉬운 구조다. 이번 가격 인하 행렬에 동참한 회사들 중에는 적자임에도 가격을 내리겠다고 한 곳도 있었다. 회사 내부에선 사업을 접고 싶다는 얘기도 나왔단다. 올해 1분기 역대 최대 실적을 올린 농심조차도 가격 인상 직전인 지난해 2분기 국내에선 적자를 기록했고, 영업이익률은 지난해 3.6%(국내 2.6%)까지 떨어졌다. 업체들이 일부 품목을 제한적으로 인하한 이유다.
물론 라면은 저렴하게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는 대표적인 서민 음식이다. 최근 라면회사들이 높은 실적을 거둔 것도 사실이다. 과거에도 불경기 때마다 라면 소비는 늘었다. 그만큼 사람들은 라면 가격에 민감하다. 그래서 정부도 라면을 우선 대상으로 삼았을 것이다. 하지만 라면 가격을 잡는다고 지금의 팍팍한 삶이 나아질까. 라면 가격으로 온 나라가 시끌벅적해진 사이 더 중요한 것들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기준금리는 2021년 7월 0.5%에서 올해 1월 3.5%까지 상승했다. 고금리와 대출 규제에도 올해 1분기 기준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가계 부채 비율은 102.2%로 주요 34개국 중 가장 높았다. 지난 수년간 치솟은 부동산 가격 역시 서민들에겐 '넘사벽'이다. 오죽하면 지난해 합계출산율이 0.78명까지 떨어졌다는 충격적 사실에도 고개를 끄덕일까. 이제는 화제성을 앞세운 과도한 시장 개입보다 민생을 위한 근본적이고 실질적인 대책이 필요한 때다.
[송경은 컨슈머마켓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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