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장 불발 기업들 '5조 상환 청구서' 받았다 [시그널]

이충희 기자 2023. 6. 30.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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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번가' 9월 IPO 사실상 불가능
SK스퀘어, 5000억 상환 골머리
CGV도 유치한 투자금 토해낼판
원금에 이자까지 붙어 부담 가중
일각 '풋옵션' 유명무실 지적도
[서울경제]

외부에 회사의 지분을 팔며 자본을 유치하고 상장(IPO)을 약속했던 기업들 중 IPO 실패 사례가 쏟아지면서 투자자들이 최소 5조 원 이상의 자금 상환을 요구하고 있다. 투자 유치 당시 적정 기간 내 IPO에 실패하면 투자 원금에 이자를 더해 돌려주기로 한 계약 조건이 발목을 잡으면서다.

30일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주요 대기업과 유니콘(기업가치 1조 원 이상 스타트업)들이 상장 전 투자 유치를 통해 받은 투자금 중 만기가 된 투자 원금은 4조 7280억 원에 달한다. 이들은 대부분 위험 방어 수단으로 최소 보장 수익률 등을 내걸었기 때문에 이를 얹어 실제로는 5조 원 이상의 투자금을 돌려줘야 한다.

11번가의 최대주주 SK스퀘어(402340)와 국내 사모펀드 H&Q코리아는 최근 11번가 상장 가능성을 낮게 보고 투자금 상환을 위한 협의를 시작했다. 2017년 H&Q코리아는 국민연금·새마을금고와 11번가에 총 5000억 원을 투자했는데 이때 이 회사에 적격 상장 조건을 걸고 상장 시기를 2023년 9월까지로 명시했다. SK(034730)스퀘어는 일정 가치 이상으로 11번가를 상장하지 못하면 투자금에 연이자 3.5%를 붙여 상환해야 한다. SK스퀘어는 새로운 재무적 투자자를 찾고 있지만 높은 기업가치를 고수하며 난항을 겪고 있다.

CJ CGV(079160)도 각각 터키와 홍콩 자회사 상장을 내걸고 외부 투자를 유치했으나 기한 내 상장에 실패했다. 2016년 터키 법인을 통해 IMM프라이빗에쿼티로부터 1000억 원, 2017년 홍콩 법인을 통해 미래에셋PE·MBK파트너스로부터 3300억 원을 투자받았으나 상장은 무산됐다. 재무 상태가 악화된 CGV는 최근 또다시 1조 원 규모의 유상증자를 추진했지만 은행 대출 등 차입금부터 갚아야 하는 처지다.

IB 업계 관계자는 “투자자들은 드래그얼롱(Drag Along·대주주 지분을 묶어 회사 경영권을 매각할 권리) 옵션을 통해 회사 경영권을 통째 확보할 수 있지만 CGV의 상황을 고려하면 이를 당장 발동하기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글로벌 사모펀드 TPG와 칼라일을 포함해 지금까지 외부에서 총 9200억 원의 투자금을 유치한 카카오(035720)모빌리티도 2021년이 만기였던 적격 상장 조건을 이행하지 못했다. 이밖에 컬리, 케이뱅크, LG CNS 등 프리IPO 투자를 받았던 회사들이 최근 기업가치 하락으로 회사 내 사모펀드 투자금이 대거 물렸다.

현재까지 누적 투자 유치 금액이 1조 원을 넘어선 컬리는 최근 경영 위기감도 감돌고 있다. 2021년 말 기업가치 4조 원에 2500억 원을 투자하며 주요 주주로 올라선 앵커에쿼티파트너스는 컬리의 자금난을 해결하기 위해 기업가치를 대폭 깎아가며 최근 1000억 원의 추가 투자를 단행했다.

이런 사례가 누적되자 투자 유치로 기업이 덩치만 불렸을 뿐 실제로는 제대로 흑자를 내지 못한다는 자조가 나온다. 수면 위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투자금을 회수하지 못해 이미 손실 처리한 펀드들도 상당수라는 게 업계의 전언이다. 투자 유치 조건인 풋옵션(Put Option·대주주에 지분을 되팔 권리)이나 드래그얼롱이 유명무실한 게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실제 교보생명과 어피너티에쿼티파트너스는 프리IPO 투자 당시 맺었던 풋옵션 계약 분쟁으로 5년째 소송 중이다. 6년 전 베트남 제약사 나노젠에 투자했던 국내 벤처캐피털들은 지난해 나노젠의 코스닥행이 불발되자 최근 풋옵션을 행사했지만 투자금을 돌려받지 못하면서 싱가포르국제중재센터에 회사를 제소했다.

IB 업계 관계자는 “높은 수익률로 투자금을 ‘엑시트(Exit)’ 했던 호황기 때의 투자 사이클이 무너지고 있다”면서 “향후 양측에 힘겨운 협상의 시간이 펼쳐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충희 기자 midsun@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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