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가 잡으려 업계 팔 비트는 정부

2023. 6. 30.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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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도한 시장 개입 우려…무늬만 ‘민간·시장 중심 경제’ 표방
지난 6월 27일 한 대형마트에 농심 신라면이 진열돼 있다. / 연합뉴스



라면, 과자, 빵 등 식품업계가 정부 압박에 못 이겨 판매가격을 일제히 인하했다. 인하폭이 크지 않아 ‘생색내기’라는 비판이 나온다. 다른 한편에선 정부의 과도한 시장 개입이라며 우려를 나타낸다. 민간·시장 중심 경제를 강조해온 현 정부 기조와도 배치된다. 기업의 팔을 비트는 방법이 전부여서는 안 된다. 전문가들은 통화정책이 물가 대응의 핵심이 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권고성 압박’에 일제히 가격 인하

라면 업계의 가격 인하 발표는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의 ‘권고’ 이후 9일 만에 나왔다. 추 부총리는 지난 6월 18일 KBS <일요진단 라이브>에서 “지난해 9~10월에 (라면 판매 기업들이 가격을) 많이 인상했는데 현재 국제 밀 가격이 그때보다 50% 안팎 내렸다. 기업들이 밀 가격 내린 부분에 맞춰 적정하게 내렸으면 좋겠다”고 했다. 라면의 주원료인 밀 가격이 지금은 크게 내려갔으니, 거기에 맞춰 가격도 낮추라는 압박이다. 추 부총리는 정부의 시장 개입 비판을 의식한 발언도 이어갔다. 그는 “정부가 하나하나 원가를 조사하고 가격을 통제할 수는 없다. 이 문제는 소비자단체가 압력을 행사하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국내 라면 업계 1위 농심이 지난 6월 27일 가장 먼저 인하 대열에 나섰다. 자사 대표상품인 신라면과 새우깡의 판매가격을 각각 4.5%, 6.9% 낮췄다. 소매점 기준 1000원짜리 신라면 한 봉지는 50원, 1500원인 새우깡은 100원 정도 내렸다. 삼양식품은 삼양라면 등 12개 제품 가격을 평균 4.7%, 오뚜기는 면류 15개 제품의 가격을 5%, 팔도도 11개 제품의 가격을 5.1% 각각 인하했다. 롯데웰푸드, 해태제과, SPC 등 제과·제빵업계도 주요 품목들의 판매가격을 5~10%까지 낮췄다.

라면은 지금의 고물가 흐름을 주도하는 주요 품목 중 하나다. 지난 5월 전체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3.3%로, 둔화하는 추세다. 반면 가공식품(7.3%)과 외식(6.9%)은 전체 물가상승률의 두 배 이상이다. 그중에서도 라면은 1년 전보다 무려 13.1% 올랐다.

반면 국제 밀 가격은 지난해 정점을 찍은 후 꾸준히 하락세다. 농림축산식품부 등에 따르면 지난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전 세계 주요 생산국들의 작황 부진, 수급 불안 등 영향으로 5월 1t당 선물가격이 419달러까지 올랐으나 이후 지속적으로 하락해 올해 6월엔 1t당 243달러까지 내려갔다. 지난해 5월의 58% 수준이다. 다만 코로나19 확산 이전인 2015년에서 2019년의 1t당 160~180달러 수준에 비하면 여전히 높다. 또 다른 라면 원재료인 팜유(식용유)나 옥수수 역시 1년 전에 비해 20% 안팎 낮아진 상태다.

소비자단체는 식품업계의 인하 결정을 환영하면서도 물가부담 완화 효과는 크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한국소비자단체협의회는 6월 28일 성명에서 “정부의 압박과 사회적 여론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하는 생색내기식 가격 인하가 아닌 소비자가 체감할 수 있는 실질적 가격 인하를 결정해달라”고 했다. 농심을 예로 들면 지난해 9월엔 신라면 10.9%, 너구리 9.9% 등 라면 26개 품목을 인상했으면서 이번엔 너구리, 짜파게티 등은 제외하고 신라면만 4.5% 인하하는 데 그쳤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난 6월 28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비상경제장관회의 겸 수출투자대책회의에 참석해 생각에 잠겨 있다. / 연합뉴스



정부 압박은 전방위적이다. 한덕수 국무총리는 6월 21일 “공정거래위원회가 담합 가능성을 더 열심히 들여다봐야 한다”고 했다. 공정위도 라면 등 주요 식품 가격 추이를 들여다보고 있다. 농식품부는 6월 26일 7개 제분 업체와 간담회에서 가격 인하를 요청했다.

라면 이전엔 소주·맥주였다. 이때도 추 부총리가 나섰다. 추 부총리는 지난 2월 ‘소주 1병 6000원 시대가 열릴 것’이란 우려 섞인 전망이 나오자 “소주 등 국민이 정말 가까이 즐기는 그런 품목(의 가격 인상)에 대해서는 업계의 적극적인 협조를 부탁드린다”고 했다. 기재부는 인상 요인을 집중 점검했고, 주무 관청인 국세청은 주류업체들과 비공개 간담회를 열어 압박 강도를 높였다. 하이트진로, 롯데칠성음료, 오비맥주 등 주류업계는 가격 인상 계획을 전면 보류했다.

실효성 없이 부작용 논란 우려도

정부는 라면값을 찍어 누르고 있지만 라면이 전체 소비자물가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크지 않다. 통계청의 소비자물가지수 가중치(2020년 기준·461개 품목)를 보면 1000을 기준으로 했을 때 라면은 2.7에 그친다. 전세(48.9), 휘발유(20.8), 전기요금(15.5) 등에 비해 미미한 수준이다. 라면을 포함해 과자와 빵의 원재료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은 밀가루의 소비자물가 가중치는 0.1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정부가 라면을 타깃으로 삼은 가장 큰 이유는 대표 서민 식품이기 때문이다. 식품물가는 한 번 오르면 좀처럼 가격을 내리는 경우가 거의 없다. 라면 업계가 이번에 가격을 내린 것도 2010년 이후 13년 만이며, 새우깡은 이번이 처음이다. 한 식품업계 관계자는 “라면값, 과잣값에서 50원, 100원 낮춘다고 해서 소비자들이 물가하락을 체감하거나 가계지출 부담이 줄어들지는 않을 것”이라며 “정부 당국은 (이번 조치가) 서민물가 안정화에 힘쓰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기엔 충분하다는 판단을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6월 19일 물가안정목표 운영상황 점검 보고서 설명회에서 추 부총리의 가격 인하 발언에 대해 “어느 나라나 물가가 빠르게 오를 땐 생필품, 저소득층 관련 물가를 관리한다. 세계적으로 이번 물가 상승기에 기업 마진이 늘었는데, 기업들도 이제 원자잿값 떨어졌으니 그에 맞춰 고통을 분담해 달라는 정치적 말씀으로 해석한다”고 했다.

불가피한 시장 개입이라는 측면에도 불구하고, 특정 품목 가격을 인위적으로 통제하는 물가 대응은 실효성 없이 부작용 논란만 키울 수 있다. 당장은 가격을 억눌러 안정된 느낌을 받을 수 있지만, 제때 인상분을 반영하지 못하고 미루면 기업은 기업대로 힘들어지고 훗날 한꺼번에 가격 인상에 나섰을 땐 소비자가 더 큰 부담을 감당해야 할 수도 있다.

지금의 정부 대응은 과거 이명박(MB) 정부 때와 여러모로 닮아 있다. MB 정부는 출범 첫해인 2008년 물가상승률이 4.7%에 이르자 물가 안정을 국가적 과제로 설정하고 대대적인 압박에 나섰다. MB 물가지수가 대표적이다. 예컨대 ‘품목별 책임관’제를 도입해 농림수산식품부 기획조정실장은 쌀, 식품산업정책실장은 배추·고추·돼지고기·쇠고기 등을 맡는 식으로 각 부처 1급 간부가 서민생활과 밀접한 52개 품목을 집중 관리했다. 공정위도 동원됐다. 조사대상 기업, 동원된 조사반원 숫자 등에서 공정위 창설 이후 최대 규모라는 평가를 받았다. 밀가루, 두유, 치즈, 김치 등 반찬류와 주요 생필품이 이들의 조사대상에 대거 포함됐다.

결과는 기대 이하였다. MB 물가 5년간 상승률이 일반 소비자물가 상승률의 1.6배에 달했다. 당시 물가관리 실패는 유동성을 증가시킨 저금리 기조와 수입물가 상승을 부추긴 고환율 정책 등이 원인이었는데, 엉뚱한 생필품 관리만 나섰다는 지적을 받았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즈음해 물가가 상승세를 탄 지난해 2월엔 기재부와 농식품부가 외식 물가를 잡겠다며 12개 외식 품목의 일부 프랜차이즈 업체 가격과 등락률을 매주 공개하는 외식가격 공표제를 도입했다가, 3개월 만에 폐지한 일도 있었다.

지난 2011년 4월 7일 이명박 당시 대통령이 서울 양재동 농협 하나로클럽에서 제82차 국민경제대책회의를 마친 후 하나로클럽 매장을 방문해 물가를 점검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시장 개입보다는 통화정책으로

식품업계 가격 인하 압박은 민간과 시장 중심 경제를 강조해온 윤석열 정부의 경제정책 기조와도 배치된다. 추 부총리는 취임 직후인 지난해 5월 말 3조1000억원 상당의 민생안정대책을 발표하면서 “정부가 물가를 직접 통제하던 시대는 지났다. 물가를 강제로 끌어내릴 방법이 없고 만약에 그렇게 하면 경제에 부작용이 더 클 것”이라고 했다. 당시 민생안정의 주요 대책 내용도 7개 식품원료에 대한 관세를 0%로 적용하는 등 시장 개입이나 가격 통제보다는 원가 부담을 줄여줘 기업이 자율적으로 소비자 가격을 낮추도록 유도하는 방안이었다.

어윤종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경쟁 제한적 상황에서 업계 담합으로 라면 가격이 오른 것인지, 아니면 원재료 가격 상승 등 불가피한 요인으로 가격이 오른 것인지는 구별해야 한다. 전자의 경우라면 정부가 당연히 행정적 조치로 개입하는 것이 맞고 후자라면 정부의 개입은 바람직하지 않다. 시장의 자원배분 기능을 왜곡시키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물가는 당연히 적극 관리해야 하는 게 맞지만, 정부가 라면과 같은 상당히 시장에 노출돼 있는 개별 품목의 가격 결정에 직접 개입하면 기업과 소비자 모두에게 도움이 안 된다. 기업은 가격 인하에 따른 부담을 소비자에게 전가하려 할 텐데, 이렇게 되면 제품의 양, 질 등에서 변화가 불가피해진다. 물가 안정이 지향점이라 한다면 근본적으로는 (금리 인상과 같은) 통화정책으로 대응하는 것이 맞다”고 말했다.

안광호 기자 ahn7874@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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