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합이 투명 운영 약속하자 ‘스타 건축가’ 참여… 감시 기능 강화에 재건축 ‘고급화’ 바람
’차별화된 고급화’ 제시에 압도적 표차로 선정
”조합원 감시기능 강해져… 개인적 이익 바라다 사업 지연되면 손해”
조합, 잇속 챙기는 대신 고급화·신속추진 전략 택해
설계사가 재건축·재개발 단지에 고급 설계안을 제시하는 경향이 최근 강해지고 있다. 조합원들의 조합에 대한 감시 기능이 강화되면서, 재건축 단지들의 고급화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29일 정비업계에 따르면 여의도 38-1(광장아파트 1·2동) 재건축추진위원회는 지난 8일 설계자 입찰 공고에서 유현준건축사사무소를 설계자로 최종 선정했다고 밝혔다. 이곳은 기존에 빌딩 등 건축물 위주로만 설계했다. 아파트 재건축 설계에 참여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유현준 건축사사무소는 고급화를 의미하는 ‘하이엔드’를 넘어선, 초고급화 ‘하이퍼엔드’ 설계안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스타 건축가’ 유현준 홍익대 교수가 직접 PT를 진행하며 단지의 ‘차별화된 고급화’를 강조했다.
당시 입찰에 참여한 다른 업체들은 고층의 2개 동으로 재건축을 진행하겠다는 계획을 내세웠다. 이와 다르게 유 교수는 3개 동으로 지어 이를 스카이브릿지(일반적으로 건물과 건물 사이를 잇는 다리)로 연결하겠다는 청사진을 제시했다. 특히 건물의 각도를 틀어 전 세대가 남향에 샛강 조망권을 확보한다거나, 저층부 테라스 설계를 세대에 따라 달리 계획하는 등 구체화된 계획이 주효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여의도 38-1 재건축추진위 관계자는 “여의도 재건축 단지들이 상업지에 놓여있다는 점도 고려해 유동인구 확대 방안을 내놓는 등 신선한 계획을 선보였다”며 “주민 중 설계사 등 전문가들이 우려되는 사안을 질문하자 보완 방안까지 구체적으로 설명해줬다”고 말했다.
이를 바탕으로 유현준건축사사무소는 전체 135표 중 101표를 득표하며 나우동인, 토문, 공간건축 등 쟁쟁한 경쟁자들을 제치고 수주에 성공했다. 초반에 유 교수는 추진위나 조합 내에서 발생하는 잡음에 대해 우려했다. 그러나 조합 측이 투명한 운영을 약속하자 입찰 참여를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광장아파트뿐만 아니라 최근 서울 내 다른 재건축·재개발 조합들도 고급화에 힘쓰는 모습이다. 지난 24일 진행됐던 압구정아파트 특별계획구역2 재건축정비사업조합의 총회에는 삼우종합건축사사무소 컨소시엄의 ‘마이어 파트너스’와 에이앤유디자인그룹건축사사무소 컨소시엄의 SMDP 등 해외 건축사사무소들이 참여하기도 했다.
서울 송파구 방이동에 위치한 대림가락아파트는 스카이브릿지 등 고급 설계안을 제시한 토문건축사사무소가 수주에 성공하기도 했다.
과거에는 재건축 추진위나 조합들이 설계자 공모에 큰 공을 들이지 않았었다. 설계자가 설계안을 제시해도, 추후 선정된 시공사가 대안설계를 제시하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다. 또한 공개입찰이 아닌 지명경쟁입찰이나 수의계약 등으로 설계사를 선정하는 일이 잦았기 때문에 조합장 등의 입김이 강했다.
이에 조합장 등이 수주를 대가로 설계사무소에 금품을 수수하거나 ‘로열층’ 입주를 약속받는 행위가 비일비재했다. 실제로 서울 성동구의 한 재개발 조합장이 건축설계사 대표로부터 금품을 수수해 서울북부지검으로부터 구속기소된 사례도 있다.
최근에는 재건축 추진위나 조합들이 잇속을 챙기는 대신 고급화·신속추진 전략을 택해 단지 자체의 가치를 끌어올리는 것이 대세로 자리 잡았다. 우선 조합원들의 감시 기능이 강화됐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조합원들이 조합에서 고용하는 OS(OutSourcing)들이 제공하는 제한적인 정보밖에 얻지 못했다. 그러나 현재는 소셜미디어(SNS)나 오픈채팅방 등 다양한 소통 창구를 이용해 다양한 정보를 수집할 수 있다.
이에 조합은 수의계약이나 지명경쟁입찰 방식이 아닌 공모를 통해 설계사를 선정하는 추세다. 설계사무소들도 설계에 집중할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디자인 고급화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상황이다.
여의도38-1재건축 추진위 관계자는 “다른 지역의 재건축 조합 관련 채팅방에 입장해 정보를 얻는 주민들도 있다”며 “의심 정황이 발견되면 즉시 문의를 하는 등 정보가 빠르게 공유되기 때문에 조합이나 추진위가 다른 마음을 먹을 수 없다”고 말했다.
최근 재건축을 추진하며 경쟁하는 단지들이 늘어나면서 차별화된 디자인과 신속한 사업 추진이 중요해진 것도 조합의 비위를 줄이는 요소다. 유착으로 인해 잡음이 발생하면 사업이 지연될 수밖에 없고, 그 기간만큼 운영비를 부담해야 하는 등 더 큰 손해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이익을 추구하기보다는 아파트 전반적 가치를 높이는 것이 조합이나 조합원, 설계사, 시공사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는 인식이 퍼진 것이다. 실제 여의도38-1 재건축추진위원장은 잡음이 일어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보수를 받지 않고 업무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 관계자들은 향후 재건축·재개발 시장에서 공개입찰이 활성화되며 고급화·신속화 전략을 택하는 사업장이 늘어날 것으로 보고 있다.
한 설계사무소 관계자는 “과거와는 달리 최근에는 ‘클린 공모’를 약속할 테니 고급화 설계를 부탁한다는 요청이 자주 들어오고 있다”며 “사업 추진 과정에서 설계사의 입지도 과거보다 탄탄해졌고, 시공사도 선별수주를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조합의 무리한 요구가 더욱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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