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서 핀란드로…"글로벌에서 먹힌다"는 이 사업 [긱스]
지방과 수도권의 창업 생태계 격차는 오래된 화두입니다. 채용도, 투자 유치도 지역에선 쉽지 않습니다. 매주 KTX를 타는 것이 일상인 창업가가 많습니다. 핀란드에서 시작된 세계 최대 스타트업 축제 ‘슬러시’가 스핀오프 행사 ‘슬러시드’를 꺼내 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목표는 지역 스타트업의 독자적 커뮤니티 구축 지원입니다. 반기마다 5~6개 국가 도시에서 열리는 슬러시드가 지난 29일 부산에 전격 상륙했습니다. 국내 최초로 열린 슬러시드 행사를 한경 긱스(Geeks)가 직접 찾았습니다.
부산역 건물 끝자락에 위치한 1층 공간, 부산유라시아플랫폼에서 열린 스타트업 축제 ‘슬러시드’ 행사장 중앙 부스. 스타트업 헐와이퍼코리아 윤병수 대표가 선 자리에 사람이 몰렸다. 두바이에서 일하던 그는 2019년 창업을 결심하며 부산에 정착했다. 조선소 고객사를 잡기 위해서였다. 헐와이퍼코리아는 선박 벽면에 붙은 따개비를 떼는 청소 로봇을 만드는 업체다. 윤 대표는 “따개비가 붙은 선박은 5~25%나 선속이 느려진다”며 “2년 만에 HMM 팬오션 등의 선박 75척을 대상으로 로봇을 공급한 상태”라고 말했다.
맞은편 부스엔 스타트업 매월매주의 제품 상자가 동이 났다. 이 회사는 80ml 크기의 시음용 전통주를 구독형으로 배송하는 서비스를 운영한다. 손종찬 매월매주 대표는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서 15년을 살다가 2021년 창업했다. 휴식차 방문했던 부산에 매료돼 양조장 15곳과 협업을 시작했다. 손 대표는 “전통주는 보통 병 단위로 구매하게 되는데, 입맛에 안 맞으면 그대로 버려지는 것이 현실”이라며 “술 산업이 역동적으로 성장하는 부산을 중심으로, 경상도 양조장과의 협업을 늘려가고 있다”고 말했다.
이날 현장에 모인 28개 스타트업은 부산·울산·경남(부·울·경) 지역에 둥지를 틀거나 사업을 펼치는 곳들이 주도적으로 자리를 메웠다. 세계 4대 스타트업 행사 ‘슬러시’의 로컬 스타트업 진흥 행사 슬러시드의 개최 취지를 반영한 결과다. 사업 아이템은 수도권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독특함을 내세웠다. 수도권 스타트업 행사보단 소규모로 개최됐지만, 1000여 명의 관람객이 부스 사이를 바쁘게 오갔던 이유다.
"빛 못 보는 지역 스타트업 선점한다"
슬러시드는 2008년 핀란드 헬싱키에서 시작된 슬러시의 스핀오프 행사다. 반기마다 5~6개 도시에서 열리는데, 정부나 대기업을 제외한 각국 기관의 신청을 받아 위탁 형태로 진행된다. 한국에선 스타트업 민간단체 코리아스타트업포럼이 주관을 맡았다. 나탈리 링우드 슬러시드 총괄은 “지역 스타트업 생태계의 ‘스파크’를 만들어 내는 것이 행사의 목적”이라며 “창업가들의 감정 연대를 뜻하는 ‘슬러시 매직’이 부산에서도 일어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부·울·경 창업가들은 지역에 강한 애착을 보였다. 스타트업 마린이노베이션은 해조류로 만든 그릇과 종이컵을 들고 부스에 섰다. 2019년 창업된 이 회사는 해조류 부산물로 친환경 일회용품을 만든다. 땅에 매립만 하면 생분해(미생물 분해)가 자연적으로 일어나, 소각장을 거치지 않아도 된다는 제품 특징이 있다. 차완영 마린이노베이션 대표는 “울산에 터를 잡았는데, 맞은편에 석유화학 단지가 있다”며 “울산에도 친환경 기업이 존재할 수 있단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밖에 부산대 약대 출신 약사들을 주축으로 설립된 영양제 스타트업 영롱, 부산 거주 부모님의 거동이 불편해지며 독거노인 관리 서비스를 떠올린 스타트업 고미랑 등도 관심을 받았다.
행사장 입구 근처에선 ‘부산 스타트업 투자쇼’ 공간이 성황이었다. 11시부터 17시까지 30분 단위 예약제로 진행된 투자쇼는 벤처캐피털(VC)과 40개 지역 스타트업의 만남의 장 역할을 했다. 투자사는 GS건설의 기업형 벤처캐피털(CVC) 엑스플로인베스트먼트, 롯데벤처스, 스타트업 액셀러레이터(AC) 블루포인트파트너스, 미국 벤처캐피털(VC) 스트롱벤처스 등 19개가 참여했다. 현장에서 만난 조지윤 스트롱벤처스 이사는 “모든 투자자가 주요 도시에만 몰리다 보니, 최근 미국에서도 ‘스카웃 펀드(외부인 운용 펀드)’ 등을 통해 실리콘밸리 외 투자를 조금씩 집행해가는 분위기”라며 “사내서도 국내 지방 출장이 두 달에 한 번꼴로 늘었다”고 전했다. 투자금이 부족해 사업 확장은 더디지만, 잠재력이 있는 지역 스타트업을 선점하려는 취지다.
지역 창업 생태계, 선결 조건은 '성공 사례'
중앙 공간에선 주요 연사들의 키노트 스피치가 이어졌다. 발표에 나선 부산의 창업가들은 공통적으로 지역 창업 생태계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코리아스타트업포럼의 동남권협의회장인 김민지 브이드림 대표는 무대에 올라 “저는 부산이 고향이고 회사 본사도 부산에 둔 사람”이라고 운을 뗐다. 그러면서 “하지만 판로 개척, 인재 채용, 후속 투자 모든 것이 지역에선 쉽지 않았고 결국 주 2~3회는 서울을 방문해야 했다”고 말했다.
브이드림은 장애인 인재를 발굴하고 전용 재택근무 플랫폼을 만들어 기업과 이어주는 사업을 한다. BNK금융그룹 등 부산에서도 다수 고객사를 확보하고 있지만,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AC 프로그램은 판교에서 이수했고, 사무실을 부산역 바로 앞에 옮겼어야 할 정도”라는 것이다. 지역 생태계 불균형은 타 국가도 다르지 않다는 지적이다. 오르후스(덴마크)·웰링턴(뉴질랜드)·카라치(파키스탄) 등 글로벌 슬러시드 개최지 관계자들 역시 “특히 후속 투자 유치에 지역 스타트업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호소하기도 했다.
부산 영도에서 용접을 배우다가 창업을 결정했다는 김철우 RTBP 대표는 해결책으로 “대표적인 성공 사례가 나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RTBP는 ‘Return To Busan Port(돌아와요 부산항에)’의 약자로, 도시재생 사업을 진행한다. 그는 “결국 창업가를 지역으로 유인하려면 다양한 창업 시도와 실패를 인정하는 분위기가 필요하다”며 “부산 지역 스타트업 성공이 시작되면 창업 수요가 몰리고 사람들이 그 시도를 인정하는 선순환이 벌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단독 연사로 나선 유일한 해외 창업가 로렌스 캠벨 쿡 페이브젠 대표는 “지역 도시문제 해결에 스타트업이 앞장설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페이브젠은 영국 런던에 본사를 둔 전력 생산 타일 제조 업체다. 사람이 타일 위를 걸으면, 그 에너지를 기반으로 전력을 만드는 친환경 서비스를 내세운다. 쿡 대표는 “서울, 뉴욕, 런던 같은 대도시뿐만 아니라 부산과 개발도상국 도시마저도 해수면 상승과 평균 기온 상승으로 오염된 환경에 노출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조상들이 석유를 핵심 에너지로 생각하고 부작용을 막지 못했다며 자신의 창업 배경을 설명했다. “향후 각국 지방 정부 및 지방자치단체와 함께 친환경 타일을 확충해, 지역 도시에서도 푸른 환경을 누릴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 업체 목표다.
토종 부산 스타트업, 핀란드 '슬러시' 간다
오후에 진행된 IR 데모데이에선 10개 스타트업이 경쟁 프레젠테이션(PT)에 나섰다. 5분 간격으로 진행된 PT의 최종 우승자는 각 500만원의 상금과 함께 핀란드에서 열릴 슬러시 본 행사에 정식으로 참가할 수 있는 특전이 주어졌다. 최종 우승은 폐플라스틱 재활용 솔루션 업체 테라블록과 화물 선박(바지선)을 활용해 해상정원을 만드는 키친파이브에 돌아갔다. 두 회사는 모두 부산에 본사를 두고 있다.
현장에선 특히 권기백 테라블록 대표의 ‘해중합 기술(화학적 분해로 원료를 취득하는 기술)’ 설명이 심사위원단의 관심을 모았다. 권 대표는 “주변에 흔히 찾아볼 수 있는 폴리에틸렌 테레프탈레이트(PET)로부터 핵심 화학 원료인 테레프탈산(TPA)을 99.7% 순도로 뽑아낼 수 있다”며 “기존 대기업도 쉽사리 확보하지 못한 기술력”이라고 말했다.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조원희 법무법인 디라이트 대표변호사는 “특히 해외에서도 통할 만한 아이템을 갖고 있단 점에서 심사위원이 만장일치로 지지를 보냈다”며 “기술적 우위와 양산 능력만 담보된다면 빠른 성장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키친파이브는 아이템 독창성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부산 영도에 버려진 창고와 바지선 등을 활용해 도시재생 프로젝트를 운영하는 곳인데, 이미 봉래동 물류창고와 봉산마을 폐가를 편집숍, 공원 등으로 바꿔내 부산에서 이목이 쏠렸던 업체다. 발표에선 바지선 위에 스마트팜 사업을 펼치겠다는 구상도 내놨다.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김도훈 작가는 “로컬의 특성을 충분히 살리면서도 문제 해결력까지 갖춘 기업”으로 평가했다.
최성진 코리아스타트업포럼 대표는 “대부분 공공 주도 행사가 많은 국내 스타트업 업계에서, 철저히 민간 영역으로만 행사 준비가 이뤄졌단 점이 의미가 있다”며 “수도권 업체들이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찾아 성장하고, 글로벌로 나아갈 수 있도록 지속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부산=이시은 기자 s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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