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꼬무 찐리뷰]308명 죽은 원진레이온 참사, 일본이 떠넘긴 '살인기계'가 시작이었다

강선애 2023. 6. 30.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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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연예뉴스 | 강선애 기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29일 방송된 '마을의 숨겨진 살인마-사라진 308명'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배우 한혜진, 배유람, 정영주가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사람이 죽어 나가는 마을

때는 1970년 여름, 경기도 남양주의 한 시골마을. 마을로 버스 한 대가 들어오고, 읍내 장터에 다녀온 양손에 정 씨 할머니가 양손에 짐을 가득 들고 내렸어. 땀을 뻘뻘 흘리며 집으로 걸어가는 할머니를 발견하고 동네 최 씨 아저씨가 짐을 들어주겠다며 다가왔어. 그렇게 두 사람이 길을 걷는데, 갑자기 최 씨가 픽 바닥에 쓰러졌어. 심지어, 할머니도 갑자기 쓰러졌어. 동시에 두 사람이 정신을 잃었어. 이 뿐만이 아니야.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아줌마도, 자전거를 타고 오던 학생도, 밭일을 하던 할아버지도, 나이와 성별을 불문하고 갑자기 마을 사람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픽 픽 쓰러져 나가. 순식간에, 무려 80명이 쓰러졌어.

"그 마을에서 살았으니까 제 눈으로 봤죠. 마을에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이 거의 다 쓰러지니까. 지나가다 쓰러지면 (버스에) 싣고 또 싣고, 버스 2, 3대로 사람들을 실어 날랐어요."

-박석혼, 당시 마을 주민

순식간에 벌어진 의문의 사고. 근데 이상한 일은 이게 끝이 아니야. 마을에는 '도농역'이란 역이 하나 있었는데, 이상하게 이 역으로 전철이 들어오면 갑자기 전철이 그 자리에 멈추고 내부 불이 다 꺼졌어. 잘 다니던 전철이 꼭 이 역에만 오면 문제야.

이상한 일을 또 있어. 이 마을에 사는 동환 씨는 어느날 이웃한테 빨리 와달라는 다급한 전화를 받았어. 동환 씨는 서둘러 이웃 집으로 뛰어갔고, 바닥에 이불이 덮인 채로 누워있는 사람을 발견했어. 어제까지만 해도 동환 씨와 대화를 나누던 이웃주민, 43세의 주부 고 씨야. 고 씨는 화장실에서 스카프로 목을 맨 채 발견됐어.

"어안이 벙벙했죠. '이걸 어떻게 봐야 하나?'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지금 생각해도 끔찍해요. 그런 일이 한 두건이 아니기 때문에."

-황동환, 당시 마을 주민

그런 일이 한 두건이 아니다? 의문의 자살이 고 씨가 처음이 아니었던 거야. 얼마전에 세 아이의 아빠였던 40대 가장도 연탄불을 피운 채 사망한 채 발견됐어. 이런 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이 무려 12명이야. 이게 단순한 우연일까?

나이, 성별, 사망한 시점은 조금씩 다르지만, 이들한테는 공통점이 한가지 있었어. 바로, 이 마을과 관련 있는 사람들이라는 거야. 대체 이 마을의 정체는 뭘까? 사건이 끊임없는 이 마을에는 숨겨진 비밀이 있어.

▲ 꿈의 직장에서 일어난 사고들

1979년 11월, 26살 장수 씨는 회사 면접이 있는 날이라 아침부터 정신이 없어. 이날 장수 씨가 면접을 보는 회사는 이 동네에서 제일 큰 회사야. 직원이 1500명이 넘고, 회사 대지 면적은 무려 15만평. 이 회사에 가고 싶다고 뒷돈까지 주고 들어가려는 사람들이 있어.

이 회사는 속옷이나 잠옷, 양복 안감 등을 만드는 부드러운 질감의 '인견사' 라는 실을 만드는 곳이야. 장수 씨는 그토록 원하던 이 회사에 정규직으로 합격했고, 인견사를 뽑아내는 핵심 부서인 '방사과'에 배정됐어. 장수 씨가 이 회사를 다녀보니 생각보다 더 좋아. 월급은 기본, 보너스는 무려 400%나 줘. 회사 구내식당에는 고기반찬이 넘쳐나. 누구나 꿈꾸는 꿈의 직장이야.

그러던 어느날, 회사에서 사고가 하나 일어나. 회사 지하에 있는 배수구가 막혀서 그걸 뚫기 위해 직원 3명이 현장에 갔어. 직원들은 배수구 끝에 있는 맨홀 뚜껑을 열고 그 아래로 내려갔는데, 세 명 모두 다시 올라오지 못하고 숨을 거뒀어.

"병원에 가다 죽었는지 현장에서 죽었는지 (세 사람 모두) 죽었다고 하더라고요. 아무래도 섬뜩했죠."

-김장수, 당시 직원

장수 씨는 이 사고를 '어쩌다 일어난 사고겠거니' 하고 넘겼어.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어느덧 1989년 10월, 장수 씨가 입사한지 벌써 10년이 됐어. 어느 날 장수 씨는 같은 팀 동료의 집으로 향했어. 동료의 딸 백일잔치가 있었거든.

한 상 가득 차려진 잔치음식을 먹으려고, 장수 씨는 젓가락으로 먼저 인절미를 집어 들었어. 그런데 인절미를 김칫국에 툭 떨어뜨렸어. 이번엔 빈대떡을 집는데, 이번에도 젓가락질이 계속 미끄러져. 얼른 다시 집으려는데, 젓가락질이 잘 안돼. 손가락에 힘이 안 들어가. 장수 씨는 피곤해서 컨디션이 안 좋아 그런가 보다 하고, 그날 일찍 잠자리에 들었어. 그런데 다음날 아침, 잠에서 깬 장수 씨는 자신의 손과 팔이 없어졌다고 느꼈어.

"손이 없는 거예요. 아침에 눈을 딱 떴는데, 내 손이 있어야 하잖아요. 근데 손이 없는 거예요. 팔을 찾다가 찾다가 없으니까 '여보! 여보!' 불러서 '내 팔이 없어졌으니 팔 좀 찾아보라고' 했어요. (놀라 달려온 아내가) '여보.. 팔 거기 있잖아' 하는 거예요. 보니까 팔이 이마 위에 있는데, 손을 만져보니까 내 손이 내 손 같이 않더라고."

-김장수, 당시 직원

팔이 마비되어 감각조차 없었어. 놀란 아내가 장수 씨의 팔을 주무르기 시작했고, 시간이 지나니 다행히 감각이 조금씩 돌아와.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이번엔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가. 안간힘을 써서 일어나려는 순간, 그 자리에 쿵 쓰러졌어. 장수 씨는 곧장 아내의 부축을 받아 병원을 갔어. 의사가 살펴보더니 병명을 모르겠다고, 큰 병원을 가보라 했어. 그런데 큰 병원을 가도 대답은 같아. 원인을 알 수 없대.

▲ 낭만닥터 김록호

그 즈음, 서울 사당동, 여기에는 좀 이상한 병원이 하나 있어. '사당의원'이라는 이름의 작고 허름한 동네 의원인데, 내과, 정형외과, 산부인과까지 여러 부위를 다 보는 종합병원이야. 근데 의사는 딱 한 명이야. 그리고 이 병원은 진료비가 엄청 싸. 다른 병원에서 3,000원이면, 여기는 1,000원을 받아. 어떨 땐 무료로도 진료해줘. 현실판 '낭만닥터'야. 또 환자가 병원 시간에 맞추는 게 아니라, 여기는 환자 시간에 의사가 맞춰. 의사가 24시간 병원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언제든 환자가 오면 진료를 해주는 거야. 이 병원의 원장은 바로 이 사람이야.

가정의학 전문의 32세 의사 김록호. 김 원장은 왜 이런 병원을 낸 걸까? 당시만 해도, 이 곳 사당동은 서울에서 손꼽히는 빈민촌이었어. 김 원장도 어린 시절에는 무허가 판자촌에서 자랐어. 그리고 어릴 때 소아마비를 앓아서 다리를 절뚝거렸는데, 늘 아이들의 놀림을 받았어. 어린 록호는 '내가 살 길은 공부밖에 없다'고 다짐했어. 그 때부터 밤이나 낮이나 공부만 했고, 몇 년 후 록호는 서울대 의대에 한번에 합격했어. 이렇게 의사가 된 록호는 자기처럼 약자를 위한 병원을 차렸어. 아픈 데는 많고 돈은 없는 사람들을 진료하기 위해서.

이런 김록호 원장의 사당의원에 어느날 남양주에서 사람들이 찾아왔어. 장수 씨네 회사 직원들이야. 그런데 김 원장은 이 사람들을 본 순간 이상한 점을 느꼈어.

"중풍 환자들 같은 느낌이었어요. 감정표현이 안 되고, 계속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웃거나, 아니면 눈물이 주르륵 나오면서 울거나. 팔다리는 마비된 상태고, 얼굴도 마비된 경우도 있고. 사람마다 다 달라요. 어떻게 '하나로 설명이 안 되는 구나' '참 이상하다' 싶었죠."

-김록호, 당시 사당의원 원장

김 원장도 처음 보는 증상이야. 웬만하면 안 비우는 사당의원을 나가 김 원장은 어딘가로 향했어. 도착한 곳은 서울대 의대 도서관. 지금이야 인터넷 검색하면 다 나오지만, 그땐 일일이 다 찾아봐야 해. 김 원장은 밤새 도서관 책을 뒤지며 증상의 원인을 찾으려 했어. 그러다 마침내, 남양주에서 온 그 환자들과 비슷한 증상을 찾아냈어. 바로 'CS2중독', 즉 이황화탄소 중독이었어.

이황화탄소는 탄소의 황화물로서 무색의 휘발성 액체로, 원목을 녹이는 데 쓰이는 화학물질이야. 장수 씨네 회사가 인견사 제조 회사잖아? 영어로는 '레이온'이라 해. 인견사를 만들려면, 천연펄프에 이황화탄소로 녹인 뒤 화학작용을 거쳐 실의 형태로 만들어. 그만큼 이황화탄소는 독성이 강한 물질이야.

"이황화탄소는 급성 중독과 만성 중독을 일으킬 수 있으며, 단기간에 고농도에 폭로되어 발생하는 급성 중독의 경우 즉시 혼수상태로 빠져 사망하기도 한다. 대개 심한 흥분성, 분노, 자살 경향 등의 정신과적 증상과 중추신경계장애, 말초신경계장애 등의 만성중독증도 보고되고 있다."

-이황화탄소 중독에 관한 설명 中

1970년대 한국에서는 생소했던 이황화탄소 중독. '즉시 혼수상태에 빠져 사망할 수 있다'는 건, 앞서 맨홀에 빠져 사망한 직원 세 사람의 사망 원인을 설명해. 맨홀 안에는 이황화탄소를 비롯한 독성 가스가 가득했어. 그걸 맡고 즉시 사망한 거야. 그리고 두번째 '자살 경향'이란 증상을 보면, 주부 고 씨와 12명의 사망자의 죽음이 설명되지. 그리고 세번째 '말초신경계장애'는 장수 씨가 팔다리 신경이 마비된 걸 설명해주지. 드디어 원인이 밝혀졌어. 이 사람들의 공통점은, 모두 같은 회사라는 거야. 모든 것의 시작점은, 대한민국 유일의 인견사 제조회사인 '원진레이온'이야.

"제가 본 환자들은 빙산의 일각이어서, 그 밑에 숨겨진 많은 분이 있다는 게 소름이 쫙 끼치더라고요."

-김록호, 당시 사당의원 원장

▲ 이황화탄소 중독

문제가 시작된 건, 회사 밖이 먼저였어. 남양주에 원진레이온 공장이 세워진 건 1966년. 이때부터 마을엔 이상한 일이 생겨. 공장에서 밖으로 설치된 파이프가 부식되며 독성 가스가 뿜어져 나왔어. 마을 사람들 80명이 갑자기 쓰러졌던 이유가 바로 이거 때문이었어.

"공장이 세워진 이후, 130년 된 느티나무가 말라죽은 것을 비롯 수십년 된 미루나무와 각종 과일나무가 말라 죽었다는 것. 가스가 바람을 타고 마을 뒷산까지 날아가는 바람에 이 일대 소나무들이 시름시름 시들어가고 있다. 가정에서는 1개월도 안된 혁대 버클, 서류집게 따위가 녹스는가 하면, TV안테나가 6개월도 안 돼 삭아버리곤 한다는 것. 도농역에서는 선로 등 각종 철도 시설물이 쉽게 부식돼 열차의 안전운행에 지장을 줄 우려까지 있다."

-당시 신문 기사 중

회사 밖이 이 정도인데, 회사 내부는 어떨까?

뿌연 연기로 가득한 공장 내부는 이황화탄소로 만들어진 비스코스액에 화학가스를 방사하는 작업이 이어졌어. 이때 공기중에 발생하는 이황화탄소들. 노동자들은 근무 내내 이황화탄소에 노출됐어. 끔찍한 작업 환경이야.

"어떤 때는 어찌나 눈이 아픈지. 눈을 감고 가다가 전봇대를 들이받은 적도 있어요."

-김장수, 당시 직원

"(눈 아픈 데는) 모유가 좋다고 그래서 (아내가) 두 홉 정도씩 줘서 눈을 닦았어요. 집에만 오면 눈이 아파 뜨질 못하니까. 아파보지 않은 사람은 몰라요."

-박석혼, 당시 직원

사실 레이온 산업은 외국에서는 이미 유명했어. 나무가 많아 일찌감치 실을 만든 핀란드, 의류업이 발단한 이탈리아, 직물 기술이 발전한 일본. 해외에서는 1930-40년도에 활발했던 산업이야. 해외에서는 이미 이황화탄소 중독이 발현됐어. 그런데 원진레이온은 이황화탄소의 위험성에 대해 어떤 교육도 하지 않았어. 오히려 몸이 안 좋다는 직원들한테 "술 마시고 담배 많이 피니까 체력이 그 모양이지", "가족들 생각해서 건강관리 좀 하세요"라고 말하곤 했대. 안타까운 건, 대부분의 직원들이 그 말을 믿었다는 거야.

"내가 먹고살기 위해서 원진을 천직으로 알고 근무했으니까요. 직장을 믿었기 때문에. 그 직장을 가진 게 그렇게 나한테는 좋았어요."

-김장수, 당시 직원

장수 씨처럼 원진레이온을 천직으로 알고 다닌 건, 봉환 씨도 마찬가지였어. 바로 이 분이야.

이름은 김봉환, 나이는 39세. 남들보다 좀 늦은 나이에 입사했지만, 봉환 씨는 열정이 넘쳐. 두 살 된 늦둥이 외동딸을 둔 '딸바보' 봉환 씨는 남부러울 게 없어. 번듯한 직장에, 사랑하는 아내와 딸이 있으니. 그런데 봉환 씨가 입사하고 6년 후, 그에게도 이상한 증상이 시작됐어. 소화는 안 되고 손발은 저리고 두통이 계속돼. 한 두 알씩 먹기 시작한 두통약을, 언젠가부터 하루에 10알 이상 먹어야 해. 결국 봉황 씨는, 입사 6년만에 회사를 그만뒀어.

사실 봉환 씨처럼 증세가 심해져서 퇴사한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었어. 퇴사 후에도 점점 심해지는 증상. 병을 얻은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어. 그런데 그 때까지만 해도, 자기가 왜 아픈지, 원인을 몰랐어. 그 때 나타난 사람이 바로, 사당의원의 김록호 원장이었어. 김 원장은 "여러분의 병명은 이황화탄소 중독입니다. 이걸 직업병이라고 합니다"라고 알렸어.

▲ 원진레이온의 숨겨진 진실

이제 병의 원인을 알게 된 사람들은 휠체어를 타고, 목발을 집고, 회사를 찾아갔어. 경비원들과 실랑이를 한참 벌인 끝에 우르르 사장실로 올라 갔어. 텅 빈 사장실에서 이들은 뜻밖의 문서를 발견했어. 바로 이거야.

"무재해 인증서"

매일 재해가 발생하는 이 회사에, 노동부가 직접 무재해 기업 인증을 해준 거야. 근데 이게 전부가 아니야. 사장실에서 또 다른 문서를 발견했어. 그 문서에는 "34명의 직업병 피해 노동자들을 산재처리 하지 않고 공상처리 했다"고 적혀 있었어.

회사 관리자가 피해 노동자를 찾아가서 "회사에 어떤 문제도 제기하지 않겠다고 각서를 쓰면, 돈을 주겠다"면서 합의를 제안해. 피해 노동자는 가족과 생계를 위해, 그 합의를 받아들이기도 하지. 이렇게 한 번의 보상을 주고 합의하는 걸 '공상처리'라고 해. 회사 입장에서는 이 방식이 훨씬 유리해. 그리고 공식적으로는 산재 없는 '무재해' 기업이 되는 거야. 그렇게 회사는 은밀하게 34명이나 처리한 거야.

사실 원진레이온의 설립 배경에는 엄청난 게 숨겨져 있어. 원진레이온이 설립되기 전인 1962년. 당시 우리나라의 목표, 박정희 대통령의 소원은 '경제성장'이었어. 그러려면 경제자금이 필요했지.

그래서 박정희 대통령은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을 조용히 일본으로 보냈어. 식민 지배 배상 협상을 위해서. 한국의 중앙정보부장과 일본의 외무장관이 만나 협상을 진행했고, 그 때 얘기된 보상금은 '무상 보상액 3억 달러'에, '경제차관 2억 달러'였어. 이 돈을 줄 테니 더 이상 식민지배에 문제 삼지 말라는 거야. 그렇게 사과 한마디 없이 '한일협정'이 체결됐어.

근데 그 협상 이후, 일본에서 '배상금에 이 기곗값도 포함되어 있다'며 뜬금없이 자기들이 가진 중고 레이온 제조 기계를 한국에 넘겼어. 그럼 기곗값은 얼마였냐? 당시 36억엔, 지금으로 따지면, 900억 원 정도야. 그때 한국 정부는 이 기계로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 제안을 받아 들였어. 당시 정부의 결정을 보챈 유명한 사업가가 있어. 바로 이 사람이야.

우리나라 대표 친일파 1호. 한국 최초의 백화점을 세운, 화신 그룹 총수 박흥식. 이 사람은 친일파 중에 친일파야. 일제에 엄청난 돈을 기부하고, 태평양전쟁 때 일본을 돕기 위해 비행기 공장도 지었어. 이런 사람이, 이 기계의 위험성을 몰랐을까? 이미 일본에선 1930년대부터 이 기계로 인한 직업병 환자가 대거 발생하며, 큰 사회문제였어. 일본 입장에선 이 기계가 골칫덩어리지. 이걸 한국으로 쉽게 처리했으니 얼마나 편해. 박흥식은 그 유해한 기계를 들여오고, 곧바로 회사를 팔아 버렸어. 그 이후로 20년 넘게, 죄없는 우리 노동자들만 피해를 보게 된 거야.

피해자들은 1988년이 되어서야 힘을 합쳐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어. 그런데 회사와 노동부는 계속 시간만 끌어. 누구도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아. 그러는 사이, 노동자들의 건강은 하루가 다르게 심각해져.

"(환자들이) 산소호흡기에 의존해서 숨을 쉬고 있었어요. 완전히 뇌졸중 환자 쓰러진 것처럼 병실에 누워 있었고요."

-박상봉, 당시 직원

시간이 지날수록 사망자는 늘어나. 피해 노동자들은 빨리 방법을 찾아야 해. 그때, 누군가 아이디어를 냈어. '88올림픽'을 이용하자는 거야.

88올림픽은 그 해 정부의 가장 큰 이벤트야. 근데, 올림픽 성화가 원진레이온 근처를 지난다는 정보를 입수했어. 노동자들은 성화봉송로를 막는 시위를 해서, 이 사건을 전세계에 알리고자 했어. 이 소식은 대통령의 귀에까지 들어갔어. 올림픽을 한 달 앞둔 상황, 드디어 반응이 왔어. 올림픽 개막식을 3일 남기고, 회사와 협상 자리가 마련됐어.

하지만 이제 시작이야. 협상 자리가 마련된 것 뿐이야. 노동자들의 요구사항은, 이 병이 직업병인 걸 인정하고 산재처리를 해달라는 것. 그리고, 직업병 판정단에 반드시 노동자 측 의사도 참여시켜 달라는 것이었어. 노동자 측 의사로는 김록호 원장을 추천했어.

"빼도 박도 못하는 의학적 증거를 제시하는 게 제 역할이라고 생각했어요. (원진) 환자들에 대해서 잘 알고, 가장 많이 공부한 사람으로서 역할을 해야겠다는 비장함이 있었던 거죠."

-김록호, 당시 사당의원 원장

이제부터는 의사들의 싸움이야. 직업병 판정을 위한, 진짜 투쟁이 시작된 거야.

▲ 직업병 판정단

1988년 겨울. 6명의 의사가 한자리에 모였어. 회사측을 대표하는 의사는 국내 유명 대학의 의대 교수 3명. 노동자들을 대표하는 3명은, 동네 가정의학과 의사들이였어. 현장 분위기는 어땠을까?

"'당신은 개인의원 원장, 나 같은 교수가 아니고' 이게 그냥, 딱, 단정 짓는 거죠. 그 틀에서…"

-김록호, 당시 사당의원 원장

의사들 한가운데 놓인 진단서를 보며 김 원장은 "이 환자는 원진 환자들이 공통적으로 보이는 고혈압, 신경계 장애 증상을 보입니다. 역학적으로 봤을 때 직업병으로 인정해야 합니다"라고 주장했어. 그러자 회사측 의사는 "이거 술, 담배 많이 하는 40대 남자들 흔한 증상이잖아요"라고 받아쳤어. 김 원장이 의학적인 근거, 문헌, 해외 사례까지 가져와 증명해도, 회사측 의사들은 '개인질환'이라 고 주장했어. 이 팽팽한 줄다리기는 몇 달 동안이나 계속 됐어. 그러던 어느날, 회사쪽 의사가 지나가듯 "환자들이 단백뇨가 많긴 하네"라고 말했어. 소변에 정상수치 이상의 단백질이 섞여 나온다는 거야. 김원장은 그 말을 놓치지 않았어.

"돌파구가 열렸던 게, 여러가지 만성 질환들이 복합적으로 나타났다고 보기에는 신장에 단백뇨가 나오고. 이렇다는 게 '개인 질환이라고 판단하기에는' 전체적인 상황과 안 맞았던 것 같아요."

-김록호, 당시 사당의원 원장

회사측 의사는 단백뇨만으로 판단할 수 없다며, 신장 조직 검사를 하자고 제안했어. 그런데 김원장은 오히려 망설였어. 노동자들의 건강을 해치거나, 판정에 불리한 결과가 나올 수도 있기 때문이야.

"그 자리에서 바로 대답을 못 했어요. 왜냐하면, 조직검사는 잘못 건드려서 신장동맥이 파열하면, 급히 응급실로 옮겨 수술하지 않으면 사망하게 돼요. 그렇지 않아도 의식이 좋지 않고 마비가 돼 있는 사람들이 견딜 수 있을지도 걱정이고… 만약에 '정상'으로 나와버리면, 모든 질병이 분명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장 조직 검사에서 정상이 나왔다는 것 하나만으로 다 문제없다는 걸로 판정될 수 있겠죠."

-김록호, 당시 사당의원 원장

김 원장은 고심 끝에 조직검사를 진행했어. 결과는 어떻게 나왔을까?

'신장 사구체 혈관의 기저막 비후가 발견됨'. '기저막 비후'는 근육, 신경 조직이 맞닿는 곳에 있는 경계막이 부어서 두꺼워지는 증상을 말해. 드디어 회사측 의사가 설명할 수 없는, 이황화탄소 중독의 특이한 증상이 검증된 거야. 6명의 의사들은 각자의 이해관계를 떠나서, 눈 앞의 결과를 받아들였어. 그리고 마침내, 장수 씨를 포함해서 40명 넘는 환자가 '직업병' 인정을 받았어. 드디어 치료비와 생계비를 지원받게 된 거야.

"판정 받고 그래도, 내가 지금 애들하고 살수 있는 것만 해도 참 고맙다. 그렇지 않았으면, 우리 같은 사람들이 살겠습니까."

-김장수, 당시 직원

▲ 안타까운 죽음, 모두가 직업병 인정 받기 위한 투쟁

아직 한 사람의 이야기가 더 남아있어. 딸바보 봉환 씨. 안타깝게도 이 모든 상황은, 봉환 씨가 회사를 그만두고 몇 년 후에 일어난 거야. 봉환 씨는 회사를 그만둔 뒤 경비원 일을 했어. 그러다 또 몸이 아파 앓아 누워. 원진레이온 퇴사 후에도 증상은 점점 심해졌어. 그때 봉환 씨를 병문안 온 동료가, 얼마전에 사람들이 직업병 판정 받고 보상을 받았다며 사당의원에 가보라고 했어. 봉환 씨는 곧장 사당의원으로 가서 김록호 원장을 만나 진료를 받고 약도 타왔어. 소견서도 받았어. 봉환 씨는 그때 희망을 느꼈대. 그렇게 오랫동안 아팠는데, 병명이 적힌 소견서가 그때가 처음이었거든.

봉환 씨는 그 소견서를 들고 곧바로 원진레이온으로 달려가 요양 신청을 냈어. 근데 회사가 거절했어. '비유해 부서'에 근무했기 때문에 신청 대상이 아니래. 회사가 이황화탄소 노출이 많은 일부 부서만 유해부서로 지정하고, 나머지 2/3는 비유해 부서로 정한 거야. 회사 밖 마을 사람들도 피해를 보는 상황인데, 회사 내부에 '비유해' 부서가 있긴 한 걸까? 보상 인원을 줄이려는 회사의 꼼수였어.

봉환 씨는 몇 번을 회사와 노동부를 찾아가 애원했어. 3개월 만에 노동부에서 "예외적인 경우지만, 해드릴 테니 요양 신청하러 서류 들고 오라"는 연락을 받았어. 근데 연락을 받은 그날, 봉환 씨는 요양 신청을 끝내 못했어. 사랑하는 외동딸의 입학금을 내고 오는 길에, 정신을 잃고 쓰러진 거야. 그리고는 다시 눈을 뜨지 못했어.

봉환 씨의 소식은 다른 노동자들에게 전해졌어. 회사와 노동부가 좀 더 책임감을 가졌더라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는 안타까움, 이대로라면 누구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란 공감대가 형성됐어.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노동자들이 한자리에 모였어. 봉환 씨의 유해를 회사 정문에 두고 장례투쟁을 시작했어.

"제가 그때 정말 독이 올라서, 병원을 다른 의사분에게 맡겨두고 장례투쟁에 상주했어요. 특히 그 분이 살아계실 때 진단했던 의사가 직접 신뢰할 수 있는 증인으로서 설명할 수 있기 위해서 거기에 상주했어요."

-김록호, 당시 사당의원 원장

"내가 짓밟히고 피멍이 들어도 끝까지 싸워서 승리해야겠다는 마음 밖에 없었어요. 다른 생각은 가질 수 없었어요."

-박상봉, 당시 직원

투쟁이 시작된 지 어느덧 4개월. 처음엔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았지만, 조금씩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어. 결국 국회가 뒤늦게 현장 조사에 나섰어. 그리고 이런 결과를 발표했어.

'원진의 비유해 부서 직원들도 이황화탄소에 중독될 개연성이 충분해 보인다'

그 후 137일 만에 치러진 봉환 씨의 장례식. 수많은 사람이 희생된 뒤에야 전-현직 원진레이온 노동자 모두 직업병 판정을 받을 수 있게 됐어.

1993년 원진레이온은 폐업했어. 그런데 폐업 후, 그 레이온 제조 기계는 어떻게 됐을까? 중국으로 수출됐어. 원진 노동자들은 중국 대사관에 쫓아가서 실상을 알렸어. 그런데도 중국 정부는 그 기계를 가져갔어. 위험성을 알지만 먹고사는 문제가 더 중요하다면서. 이런 참사는 또 다시 반복될 수 있어. 원진레이온 사태가 '최악의 직업병 참사'라고 불리는 이유야.

▲ 잊지 말아야 할 그들의 외침

피해 노동자 950여명, 그 중 308명이 세상을 떠났어. 원진의 살인 기계는 수많은 동료와 가족을 잃게 했어. 사망한 피해자들은 생전에 극심한 고통을 호소했어.

"밥을 시원하게 한 숟갈 먹을 수나 있나. 아주 보통 심각한 게 아니라고 지금… 돌아버린 사람 같아. 꼭 돌아버린 거 같다니까."

-故고정자, 화장실에서 자살.

"팔다리만 괜찮으면 속이 아주 시원하겠는데. 이렇게 말도 잘 안 되니까 죽겠다고요."

-故박영덕, 직업병으로 사망

"몸도 마음대로 안 움직이고 전신이 다 마비 증세야. 아무런 삶의 의욕이 없어요."

-직업병 피해자, 당시 47세

"가정이 편안하면 그 이상 바랄 게 없어요… 내 가정도 중요하면 남의 가정도 중요하지 않습니까.. 너무 하고 싶은 말이 많아요. (나뿐만 아니라) 죽어가는 사람들도 그렇고 몸져누워 있는 사람들도 그래요…"

-故최상철, 직업병으로 사망

원진레이온이 있던 자리에는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어. 부지를 판 금액의 일부는 노동자들에게 보상금으로 돌아왔어. 그 보상금으로 노동자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병원을 설립하는 거였어. 산업재해는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잖아. 이들 편에 서 줄 병원이 하나쯤은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병원을 만들었대.

병원의 이름은, 원진 '녹색병원'. 초대 병원장은 김록호 원장이야. 벌써 30년이 지났지만, 김록호 원장님과 원진 노동자들은 그날의 일이 아직도 생생하대. 서로를 위했던 마음도 기억하고 있고.

"김록호 원장 선생님이라고 하면 우리의 '주치의'라고 생각해요. 우리의 건강을 지켜주는 선생님이다 느꼈죠."

-박상봉, 당시 직원

"제 기억에는 헌신적으로 진료를 봐주시면서 지금까지도 꾸준히 (직업병에 대한 관심을) 표명해 주시는 걸로 알고 있어요."

-황동환, 원진산업재해자협회 이사장

"항상 좋은 이야기, 이로운 이야기만 해주시지. 우리에게 대해준 그 마음은 무엇을 해도 갚지 못해요."

-박석혼, 당시 직원

"저한테는 가족만큼 끈끈한 애정과 연대감을 느끼는 그런 인연입니다. 제가 약간의 역할을 했다고 하지만, 실제로 앞장서서 투쟁하고 그 심한 직업병 증상을 앓아가면서 본인의 권리 뿐만 아니라 다른 노동자들의 권리까지도.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렇게 했을까 놀라울 만큼, 괴력을 보여주지 않았나 싶거든요."

-김록호, 당시 사당의원 원장

김록호 원장님은, 지금은 병원장이 아니야.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W.H.O. 세계보건기구에서 근무하고 계셔. 이제는 전세계인의 보건과 안전을 위해서 일하는 거야. 김록호 원장님이 생각하는 의사의 역할은 좀 달랐던 거 같아. 질병을 낫게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질병을 갖게 한 환경까지 고쳐서 나아지게 하는 것. 의사의 몫이 거기까지라고 생각했던 게 아닐까.

'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강선애 기자 sakang@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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