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하루가 천지개벽, 부활절이다
[[휴심정] 이선경의 나를 찾아가는 주역]동짓날에 담긴 천지의 마음
동짓날을 성대하게 기리는 이유는
절기는 하지(夏至)이지만 겨울의 극점(極點) 이야기를 해야겠다. 바로 동지(冬至) 이야기이다. 동짓날이라 하면 무엇이 떠오를까? 뭐니 뭐니 해도 새알심이 박혀있는 동지팥죽이 아닐까 한다. 붉은 팥죽은 액막이를 위한 것이라 널리 알려져 있고, 하얀 찹쌀 경단을 새알심이라 부르는 이유는 하얀 새알이 탄생과 빛을 상징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따라다닌다.
작은 설이라 불렸던 동짓날이면 임금은 곤복(袞服)에 면류관(冕旒冠)을 차려입고, 백관(百官)들과 하례를 행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영조임금 시절에 동짓날 종로 거리의 걸인들을 불러 모아 팥죽을 먹여주었다는 기록도 있다. 이제는 거의 보기 어려운 풍경이지만, 예전 필자의 은사님 댁에서는 동지에 차례를 지내곤 했다.
여러 절기의 세시풍속이 하나 둘 사라졌지만, 동지(冬至)는 오늘날까지 그 풍속이 이어지고 있는 중요한 절기임을 새삼 느끼게 된다. 동지가 이렇게 중요하게 여겨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동짓날 아침은 한 해 가운데 가장 긴 밤을 지내고 다시 첫 태양이 떠오른 시점이기 때문이다. 즉 탄생과 부활,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겠다. 그것은 비유컨대 마치 새로운 천지가 개벽하는 것과 같다. 24시와 0시가 하루를 단위로 하는 개벽의 순간이라면, 동지는 한 해를 단위로 하는 0시이다. 여전히 짙은 어둠 속에 있어 그 변화가 드러나려면 기나긴 새벽어둠을 지나야 하지만, 그래도 그것은 시간문제일 뿐 필연적으로 아침이 오고야 만다. 생명이 잉태되는 순간에 아무 조짐이 드러나 보이지 않을지라도, 그것은 이미 한 세상이 열린 장엄한 시간이다.
<주역>의 복괘(復卦)에서는 “동짓날에는 성문을 닫아 걸어 장사와 여행을 금하고, 임금도 이 날은 사방을 시찰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갓 태동한 여린 생명의 기운을 숨죽여 고요히 기르는 엄숙한 때이다.
복괘(復卦)는 동지(冬至)를 주제로 한 괘이다. 괘의 모양을 보면 땅 속에 우레가 꽂혀 땅 속을 흔들어 놓았다. 아직은 땅 속 깊숙이 있어 그 기운이 미미하지만 계속 자라나리라는 것을 예측할 수 있다. 복(復)은 ‘돌아온다’ ‘회복한다’는 말이다. ‘빛이 돌아온다’ 생명을 뜻하는 ‘양의 기운이 회복된다’는 의미로 풀이할 수 있다. 그런데 새로운 시작을 뜻하는데 왜 ‘돌아온다’ ‘회복한다’는 표현을 쓰는 것일까? 당연한 듯 무심하게 지나갈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이 ‘돌아온다’는 말이 지니고 있는 문화적 사상적 배경의 깊이를 생각하게 된다.
‘돌아온다’는 말
‘돌아온다’는 말은 경험해 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본래 있던 곳으로의 귀향을 뜻한다. 복괘에서의 ‘돌아옴’은 바른 데로 돌아오는 것이며, 이상적인 표준으로 돌아오는 움직임이다. 복괘의 초효에서는 “머지않아 되돌아와 후회에 이르지 않으니 크게 길하다”라 하였고, 이효에서는 “어진 이에게 자신을 낮추니, 아름답게 돌아와 길하다”라 하였다. 잘못된 길로 들어섰다가도 그것을 자각하고 재빨리 돌아오기에 후회가 없을 뿐 아니라 크게 길한 일이라 한 것이다. 역대의 주석가들은 공자의 수제자로 일컬어지는 복성공(復聖公) 안회(顔回)가 이와 같은 사람이라 한다.
성선설을 기반으로 하는 유교의 전통에서 복(復)은 본성으로 돌아감, 본성을 회복함을 뜻하기도 한다. 맹자는 ‘성인(聖人)은 타고난 본성대로 행하며(性之), 현인은 수양을 통해 타고난 본성으로 돌이킨다(反之)’라 하였다. 당나라 말기의 이고(李翶)는 <복성서(復性書)>라는 책을 썼는데, 이는 본성을 회복하는 일에 대해 쓴 책이라는 말이다.
맹자 성선설의 기반은 <주역>에서 발견할 수 있다. <주역>에서는 “음과 양이 번갈아 상호 작용하는 것이 자연의 길(道)이며, 그것을 이어받는 일이 선(善)이고, 그것이 개체 속에 이루어져 있는 것이 본성이다”라 한다. 자연이 뭇 사물을 낳고 기르는 음양의 생명작용을 본받아 계승하는 것이 선(善)이며, 우리의 본성은 그러한 선이 내재화된 것이라 말하고 있다. 이러한 본성을 맹자는 인(仁)이라 하였으며, 인(仁)은 사람이 거처하는 ‘편안한 집’이라 하였다. 본성을 회복한다는 것은 내 존재의 고향으로 돌아가 안식하는 일이다.
퇴계 이황은 옛 선현들이 남긴 좌우명과 마음 다스리는 글을 모아 엮고 <고경중마방(古鏡重磨方)>이라 제목을 붙여, 자신을 성찰하는 지침으로 삼았다. <고경중마방>은 ‘오래된 거울을 거듭 갈고 닦는 방법’이란 뜻이다. 이황은 책의 첫머리에 주희의 시를 실었는데, 이 시에서는 수양을 통해 본성을 회복하는 일을 고향 찾아가는 일에 비유하고 있다.
낡은 거울을 거듭하여 갈고 닦는데 옛 가르침 절실하여라
거울 빛 밝아지면 해와 더불어 밝기를 다투네
내 고향집 가는 길 환히 비춰 밝히니
부디 이미 길든 내 모습을 고향이라 여기지 마오
복(復)의 의미는 <주역> 건괘의 원・형・이・정(元亨利貞)에 견주어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원・형・이・정은 생명의 순환적 주기(週期)인 봄・여름・가을・겨울의 특징을 상징하기도 한다. 만물이 소생하여 약동하는 것은 봄의 일이지만, 봄의 소식은 겨울에 이미 그 바탕이 마련되어 있다. 고요한 겨울의 대지 아래에 고이 간직된 참된 생명력이 그것이다. 자연이 한 해의 운행을 마치고 고요함으로 돌아가 쉬며 참된 생명력을 회복하는 것이 복(復)이며, 그러한 온축에 힘입어 다시 만물을 낳고 기르는 생명의 활동을 시작하는 것 또한 복(復)이다. 자연의 운행을 관찰하고 묵상하여 사람의 길을 찾는 <주역>의 사유에서 ‘돌아옴’은 자연과 인간이 공유하는 생명의 길이다.
자연에도 마음이 있다는데
<주역>에서는 자연에도 마음이 있다고 한다. 복괘에는 ‘천지지심(天地之心)’, 즉 ‘하늘과 땅의 마음’이라는 말이 있고, 그 외 몇몇 괘에 ‘하늘과 땅의 정(天地之情)’이란 표현이 있다. 하늘과 땅의 마음이란 어떤 것인가? 복괘에서는 “되돌아옴(復)에서 천지의 마음을 본다”고 한다. ‘천지지심’이란 천지가 만물을 낳고 기르는 전체 생명의 아버지와 어머니로서의 마음인 인(仁)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인(仁)의 마음을 양(陽)이 돌아옴을 통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괘의 모양으로 보면 꼭대기에 양(陽)이 간당간당 매달려 있는 박괘(剝卦)에서 전체가 어둠에 싸인 곤괘(坤卦)의 극점을 통과하면서 다시 양(陽)이 돋아나는 실마리인 복괘가 된다. 복괘의 모양을 보면 위로 다섯 효는 부드러운 과육으로, 맨 아래 단단한 초효는 과일의 씨앗으로 볼 수 있다. 씨앗이 인(仁)이라는 것은 이제 익숙하지 않을까? 생명의 단서인 단단한 씨앗이 아직은 미미하지만, 조용히 자라나 광대하게 생육하고 번성할 것은 정해진 이치이다.
북송시대 소옹(邵雍)이라는 학자는 양(陽)이 돌아오는 풍경을 아래와 같은 철학시로 읊었다.
동짓날 자정, 하늘의 마음은 변함없는데
하나의 양이 막 일어나고, 만물이 아직 생기기 전
현주(玄酒) 맛은 담담하고, 위대한 음(音)은 소리가 참으로 희미하네
이 말이 미덥지 않거든, 다시 복희씨에게 물어보시게 <冬至吟>
얼른 보기에 선(禪)문답과 같아 보이는 이 시의 의미는 이러하다. 하루 시간에서 자시(子時)는 23시~1시를 말한다. ‘자시’의 반(半)은 자정이다. 24시이자 0시라는 말이다. 바로 여기가 하나의 양(陽)이 처음으로 움직이는 자리이다. 그러니 이때는 아직 만물이 나오지 않았을 때이지만 이미 새로운 세상이 열린 때이다. 이 시점을 맛과 소리로 비유하자면 맑은 물의 맛이 담박한 것과 같고, 생명이 태동하는 소리가 희미하지만 그것은 참으로 위대한 소리라는 뜻이다. 그리고 이러한 하늘의 마음은 매일매일 그러하고 해마다 그러하여 변함이 없다.
맹자는 대낮의 번다함이 마음을 해치니, 고요한 밤의 기운을 잘 보존해 성품을 길러야 한다는 존야기(存夜氣)를 말했는데, 그것을 <주역>의 언어로 말한다면 복괘의 “되돌아옴에서 천지의 마음을 본다”가 될 것이다.
새로이 돌아온 하루, 오늘
<주역>이 지닌 유비적 사유로 보면 하루도 한 해도 모두가 천지개벽이다. 동지는 우리 전통문화에서 추구해온 중생절(重生節: 거듭남의 날), 쉽게 말해 부활절이 될 것이다. 동짓날이 가장 큰 부활의 상징이고, 실은 매일 매일이 부활이다. <대학>에서는 자신의 밝은 덕을 밝히려거든 “진실로 날로 새롭고, 나날이 새롭고 또 날로 새로워라”라고 하였다. <주역>에서 “낳고 낳는 것(生生)을 역(易)이라 한다”라 하였으니, 변화의 순간순간이 모두 새롭게 거듭남이다.
20세기의 종교 사상가 유영모 선생은 하루 단위로 삶을 헤아렸다고 한다. 오늘은 20,075일 째 살고 있다는 식이다. 그는 ‘오늘’을 ‘오! 늘~~’로 읽은 것으로 유명하다. ‘오늘’이라는 순간 속에 절대와 영원을 담은 것이다. 늘 명쾌하게 이해되지 않던 <논어>의 구절,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말은 오늘 하루의 참된 삶이 바로 영원한 가치를 지닌다는 뜻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글 이선경(조선대 초빙객원교수・한국주역학회 회장)
* 이 시리즈는 대우재단 대우꿈동산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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