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안 역사문화 리포트] 12. 여진족 동해를 공포에 떨게 하다
■동여진족 동해안 약탈, 11세기 내내 이어져
-1011년부터 1097년까지 침략 기록 20여 차례
대마도가 여진족들에게 철저하게 유린당하던 때, 우리 동해안 지역 또한 안전할 수는 없었다. 대마도까지 종단 항해를 하고, 울릉도를 중간 거점으로 삼은 여진족 해적들이 가까운 강원도와 경상도 동해안을 그냥 둘리는 만무했기 때문이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동국전란사를 비롯 동해안 시·군의 향토 사료에 따르면 여진족들의 동해안 침략과 약탈은 11세기 내내 계속된다.
지난 1996년에 강릉문화원이 발행한 ‘강릉시사(江陵市史)’에서 집필에 참여한 관동대 박도식 교수는 “현종 2년(1011년) 8월에 100여척의 배를 타고 경주에 쳐들어온 기록을 시작으로 숙종 2년(1097)년에 이르기까지 90여년 동안 여진족들의 동해안 침략 기록이 20여 차례에 달한다”고 밝혔다. 피해 지역 또한 덕원 안변 통천 고성 양양 강릉 삼척 평해 흥해 청하 영일 경주에 이르기까지 동해 연안 전역이 거의 빠짐없이 들어있다.
대마도를 쑥대밭으로 만들기 10여년 전에 벌써 여진족들이 100척의 배를 이끌고 동해 남단의 경주를 노략질했다고 하니 대마도 침략 또한 여진족들에게는 생각만큼 어려운 여정은 아니었겠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사서(史書) 기록을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고려사에는 현종 19년(1028년) 5월에 평해군(현재 울진 평해)에 침입한 여진족을 추격해 적선(賊船) 4척을 나포한 뒤 모두 죽였다는 기록이 보이고, 1년 뒤인 현종 20년에는 동여진족 해적선 10척이 명주(현재 강릉)에 침략했는데, 병마판관(兵馬判官) 김후(金厚)가 격퇴했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또 덕종 2년(1033년)에는 삼척현에 해적이 침입했는데, 이 또한 동 여진족이었음은 달리 설명이 필요치 않다. 정종 1년(1035년)에는 동여진의 해적선이 삼척현 동진수(桐津戍)에 침입해 민가를 약탈하므로 장수가 군사들을 수풀에 매복시켰다가 도적들이 돌아가는 때에 추격해 40여명을 사로잡고 베어 죽였다는 기록도 나온다.
또 이보다 훨씬 뒤인 문종 6년(1052년)에는 동여진의 고지문(高之問) 등이 바다를 건너와 삼척현의 임원수(현재의 임원)를 치자 장수 하주려(河周呂·둥국전란사에는 何周呂)가 군사들을 이끌고 돌격전을 펼쳐 10여명을 사로 잡고 죽이니 적들이 흩어져 달아났다는 내용이 보인다. 이때 장수 하주려가 군사들을 모아 놓고 “적의 수효는 많고 우리 군사는 적지만,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우면 반드시 이길 것”이라고 군사들의 분발을 당부한 것으로 보아 당시 동해안 각지에 출몰했던 여진족들은 그 수가 아마도 해당 지역을 지키는 군사들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 규모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동해안에서 약탈을 일삼은 여진족의 규모는 문종 18년(1064년) 100여명이 배를 타고 와서 평해군 남포 해안을 침략, 민가를 불태우고 남녀 9명을 포로로 끌고 갔는데, 그곳을 지키던 관리들이 추격해 사로잡지 못했으므로 죄를 주었다는 사서 기록으로 살펴볼 때도 규모가 작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다.
■‘해적의 바다’, 공포 상황 전주곡.
-동여진족 이어 고려 중기 이후 왜구까지, 약탈 도미노
-고려 조정, 당근과 채찍 정책으로 여진족 대응
11세기 여진족들의 침략은 동해를 공포 상황으로 몰고 간 전주곡이라고 할만했다. 뒤를 이어 고려말부터는 대마도와 일본 규슈 하카타(博多) 등을 근거지로 한 왜구(倭寇)들이 줄지어 출몰, 동해 연안지역 백성들의 생활을 불안과 피폐로 몰고 가게 되니 ‘해적의 바다’ 공포 상황이 도미노처럼 이어지는 셈이다.
여진족들은 1019년 대마도 침입 당시 노약자들을 도륙하고 건강한 남녀들을 포로로 끌고 가는 만행을 저지른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일본 규슈까지 들이쳐 살인과 방화, 약탈을 일삼은 이들 동여진족들이 강원도와 경상도 연안에서도 비슷한 만행을 저질렀다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니 해적들이 떼 지어 출몰하던 11세기 동해 연안에서 생활한 백성들의 궁핍과 고통을 능히 알고도 남음이 있다.
그런데 동시대 사서 기록에는 이들 동여진족이 해안지역을 잇따라 노략질하는 한편, 추장과 장군 등이 고려 조정에 내조(來朝)해 특산물을 바치고 귀부를 청했다는 내용도 수시로 등장한다. 정종(靖宗) 9년(1043년) 고려사 기록에는 ‘동여진의 장군 등이 여진인 80명을 이끌고 내조해 아뢰기를 “화외인(化外人)이 함부로 포악한 마음을 먹고 일찍이 변경을 소란스럽게 하였지만, 큰 가르침을 받은 뒤로 지난날의 잘못을 급히 고쳤습니다. 지금 바다와 육지의 수장들을 이끌고 궁궐에 이르러 성의를 표하니 변방의 백성이 되게하여 주옵소서. 지금부터 늘 인근 적들의 동정을 살펴 보고하겠습니다”라고 하니 왕이 가상히 여겨 특별히 금과 비단을 하사하고 등급을 올려주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여기서 화외인은 아직 왕화(王化)를 입지 않은 변방의 오랑캐를 뜻한다. 국가 체제가 불완전한 상태에서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섬겨온 여진족들이 유목과 농·어업에 종사하는 각각의 종족 나름대로 노략질과 내조를 반복하면서 생존 전략을 구사했고, 고려는 ‘고삐를 느슨하게 잡되 끈은 끊지 않는다’는 뜻의 간접적 통제책인 ‘기미정책’으로 당근과 채찍 전략을 병행한 것으로 풀이된다. 최동열 강릉본부장
*참고= 기사에 인용(참고)된 논문과 책의 저자는 논문 발표와 책 발간 당시의 근무처와 직책을 준용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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