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역자 3인… 생존 위해 배신 정당화한 ‘기만의 삶’[북리뷰]

2023. 6. 30.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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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역자:전쟁, 기만, 생존
이안 부루마 지음│박경환·윤영수 옮김│글항아리
나치 지도자에 기생한 마사지사
중국·일본 이중첩자로 산 남장 공주
나치에게 민족 팔아넘긴 유대인
2차 세계대전 때 적국에 협력한
인물들의 복잡한 생애추적 통해
흑백윤리 아닌 도덕적 질량 측정
나치 친위대 수장 하인리히 힘러의 개인 마사지사 펠릭스 케르스텐(왼쪽 사진)과 남장을 즐겼던 청나라 공주 아이신줴뤄 셴위(가운데 위·아래 오른쪽), 돈을 받고 동족을 나치에게 팔아넘긴 유대인 프리드리히 바인레프(오른쪽). 글항아리 제공

외세 점령기 또는 독재 정권 시절의 삶을 이야기할 때 무엇을, 어떻게 말할 것인가는 매우 중요하다. 드골은 영리했다. ‘영원한 프랑스’가 자국 시민과 자국 군대의 힘으로, 프랑스 ‘전 국민’의 도움으로 독일을 무찔렀다고 주장했다. 연합국의 도움도 있었다고 티 나지 않게 슬쩍 덧붙였다. 신화이고, 거짓이고, 기만이다. 그러나 국가 상실이란 모욕적 경험을 이기고, 그에 따른 분열과 내전을 막으려는 최선이기도 했다.

저항과 부역의 문제는 흑백의 윤리, 선악의 수사, 숭배와 청산의 담론으로 쉽게 기술할 문제가 아니다. 저항도, 침묵도, 부역도 각자 이유가 다르고, 미덕과 정의, 실수와 잘못이 수시로 교차한다. 악당이 우연히 선한 일을 해낼 수도 있고, 선한 의도로 끔찍한 만행을 저지를 수도 있다. 이를 이해하는 건 인간 을 이해하는 길이기도 하다. 따라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칭송과 단죄의 선명한 서사가 아니라 한 인간의 공과를 살피고 따지는 섬세한 서사일 테다.

‘부역자: 전쟁, 기만, 생존’에서 이안 부르마 미국 뉴욕대 교수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적국에 협력한 이들을 대상 삼아 부역의 서사를 새롭게 쓴다. 이 책은 부역자였던 독일 마사지사 펠릭스 케르스텐, 청나라 황녀 아이신줴뤄 셴위, 네덜란드 유대인 프리드리히 바인레프의 삶을 깊게 파고든다.

케르스텐은 나치 친위대 수장이자 유대인 학살 지휘자인 하인리히 힘러의 개인 마사지사로 일하며 영화를 누렸다. 가와시마 요시코로 잘 알려진 셴위는 일본 경찰을 위해 첩자 노릇을 했다. 바인레프는 동료 유대인을 구출하는 척하면서 그들의 돈을 빼앗고, 일부는 독일에 팔아넘기기도 했다. 저자는 이들을 호흐슈타플러(Hochstapler)라고 부른다. 사기꾼, 허풍쟁이, 협잡꾼을 뜻하는 이 말은 본래 곤란한 상황에 빠졌을 때 자신을 고귀한 신분으로 위장하는 거지를 가리킨다. 세 사람은 정치적 신념보다는 개인의 이익과 안락을 위해 부역했다. 그러나 이들은 올바른 일을 한다고, 늘 틀린 건 아니라고 스스로 믿었고, 자신마저 속이려고 기꺼이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한마디로 이들은 자신을 극히 고귀한 존재로 포장하려 했다.

전쟁과 박해와 대량 학살의 시대, 즉 무엇이 도덕인지 확신하기 어려운 시대에 이들은 자기 자아를 고쳐 썼다. 가짜 기억으로 과거를 물들이고, 작은 선행을 부풀려서 삶을 윤색했다. 케르스텐은 뛰어난 생존자였다. 체제의 훌륭한 적응자로서 그는 양손으로 나치 지도자의 피로한 정신과 고단한 육체를 풀어주었다. 그 대가로 그는 행복을 폭식했다.

그러나 패전이 가까워지자 케르스텐은 태도를 바꿨다. 그는 마사지 솜씨로 힘러를 설득함으로써 네덜란드인의 강제 이주를 막고 유대인 수천 명을 도피시켰다고 우겼다. 사실과 신화, 진실과 거짓을 뒤섞은 진술이었다. 덕분에 그는 재판을 피하고 안락을 누렸으나 그의 삶은 진실 없는 거짓으로 변했다.

셴위는 남성 영웅의 삶을 산다고 여겼다. 화려한 환경에서 태어난 그녀는 네 살 때 청나라가 망하면서 만주로 쫓겨난다. 일본과 협력해서 나라를 되찾으려 한 아버지 뜻에 따라 일본 극우주의자 가와시마 나니와의 양녀로 보내졌다. 소녀의 삶은 성적 착취, 정략결혼 등 불행의 연속이었다.

이혼 후 그녀는 ‘상하이 마타하리’로 살았다. 육군 장군 다나카의 정부로 이름을 날리는 한편, 첩자로 활동하며 남녀 모두와 연애했다. 남장을 즐긴 그녀는 청나라를 되찾는 영웅이고자 했다. 실제로 만주국 건설을 돕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이 패망하면서 꿈은 흩어지고, 그녀는 전범 재판 끝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바인레프는 사기꾼이었다. 그는 안전을 빌미 삼아 동료 유대인으로부터 돈을 뜯어낸 후 그들을 방치하거나 나치에 팔아넘겼다. 전후에 그는 어쩌다 행한 작은 선행을 이유로 ‘네덜란드의 쉰들러’로 자신을 포장했다. 유죄를 면하고 스위스로 도망친 그는 다시 깨달음을 얻은 성자로 변신해 죽을 때까지 튀르키예 등에서 영적 지도자로 활약했다.

이들이 특별한 사람들은 아니다. 우리 역시 이들과 마찬가지로 끝없이 자신을 정당화하면서 자아를 고쳐 쓴다. 그러나 살아남으려고 분명한 사실조차 외면하면 곤란하다. 그럴 때 삶은 기만이 되고, 자아는 허구로 변해서 공중에 떠버린다. 생존이 전부는 아니다. 험악한 세상에서도 거짓의 유혹을 견디고 삶의 의미와 가치를 다지는 일은 중요하다. 464쪽, 2만5000원.

장은수 출판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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