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권·군권의 상징’ 관리 관청… 세종때 ‘병부 스캔들’로 피바람 불기도[지식카페]
병사 동원때 쓰던 ‘병부’… 군권 쥐고 있던 태종대신 세종에 병부 바치자 분노, 세종 장인 심온까지 제거
왕위계승·對中 외교문서에만 쓰던 옥새 ‘大寶’… 670개 정도 운용됐던 마패, 훔치거나 거래땐 최고 사형에 처해
상서원(尙瑞院)은 왕의 도장인 옥새(玉璽)를 비롯한 각종 인장들과 병력을 운용할 때 사용되는 명패인 병부(兵符), 병권 지휘자를 상징하는 절월(節鉞), 순패(巡牌), 마패(馬牌) 등의 표식물을 관리하는 관청이다.
조선의 상서원은 고려시대의 상서사로부터 비롯되었는데, 상서사는 고려 무신정권 이후에는 정방, 지인방, 차자방 등으로 불리다가 조선 개국 때인 1392년에 다시 상서사가 되었다. 그리고 세조 대인 1466년에 상서원으로 개칭되어 1894년 갑오개혁 때까지 유지되었다.
조선은 상서사 시절엔 관직으로는 판사, 부윤, 소윤, 주부, 직장, 녹사 등을 뒀는데, 세조 대에 상서원으로 개칭된 이후 관원을 점차 축소하여 도승지의 지휘 아래 판관 1명, 직장 1명, 부직장 2명만 두었다. 말하자면 도승지 직속 관할 기관으로 변경시키고 관원을 대폭 줄인 것이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상서원에서 관리하는 표식의 종류를 새보·절월·부패(符牌)라고 규정하고 있다.
새보는 국왕의 도장으로 흔히 옥새라고 하는데, 외교문서·교명(敎命)·교서·교지·유서(諭書)·시권(試券) 및 홍패·백패 등에 찍는 것이고, 절월은 생살권(生殺權)을 부여하는 뜻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관찰사 및 병사(兵使)·수사(水使) 등 도백이나 지방의 군 지휘관에게 내려주었다. 그리고 부패는 병부와 패를 의미하는 것인데, 병부는 병력을 부를 때 사용하는 것이고, 패는 순라군이 쓰는 순패와 역마 사용에 쓰는 마패를 통칭한 것이다.
옥새의 종류
임금의 도장인 옥새는 그야말로 왕을 상징하는 도장인데, 지금도 인감도장이라 불리는 도장이 가장 중요한 법적 효력을 갖고 있듯이 조선에서도 옥새가 국가에서는 가장 중요한 도장이었다. 옥새는 넓게는 왕이 업무용으로 쓰는 모든 종류의 도장을 일컫는 말인데, 우리는 흔히 왕위를 계승할 때 물려주는 도장만 옥새라 알고 있다. 하지만 옥새에도 종류가 많다.
옥새 중에서 가장 으뜸인 것은 대보(大寶)라 부른다. 이 대보는 중국에 보내는 외교문서에만 한정해서 썼거나, 왕위를 계승할 때 나라를 물려준다는 징표로만 사용되었다.
그 밖에 임금의 명령을 내리는 교서나 교지에는 시명지보라는 옥새를 썼고, 신하들에게 서책을 줄 때는 동문지보, 물품을 줄 때에는 선사지보, 과거 합격증서인 홍패나 백패에는 과거지보를 썼다. 이 모든 인장을 통틀어 옥새라고 부르기 때문에 모든 옥새가 왕위를 물려줄 때 사용된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옥새는 원래 옥으로 제작된 왕의 도장을 일컫는 것이지만 반드시 옥으로 만든 것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었다. 금으로 만든 것은 금보(金寶) 또는 금인(金印)이라 했지만, 대개는 금보도 옥새라고 통칭되었기 때문이다.
군대를 움직이는 데 꼭 필요한 병부
상서원에서 관리하는 것 중에 옥새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병부였다. 병부는 병사를 동원할 때 쓰던 표식인데, 두 쪽으로 쪼개어서 한쪽은 군사를 지휘하는 장수가 갖고, 다른 한쪽은 그 장수의 상관이 가지고 있다가 군사 동원명령을 내릴 때 서로 짝을 맞추어 봄으로써 증거로 삼게 했다.
병부는 군대를 발동시킬 때 이용하는 것이라고 해서 발병부라고도 하는데, 대개 나무나 금, 옥 등으로 만들었으며, 꽃이나 동물 모양이 대부분이었다. 크기와 모양은 지름 7㎝, 두께 1㎝ 정도 되는 둥글납작하고 곱게 다듬은 나무쪽인데, 한 면에 발병이라는 글자를 쓰고, 다른 한 면에는 도명과 관찰사 또는 절도사라는 칭호를 썼다. 그리고 각 지역의 병진(兵陣)에서는 진호를 썼다. 그 한가운데를 쪼개어 오른편 반쪽은 관찰사·절도사·진의 책임자가 보관했으며, 왼편 반쪽은 궐 안에 보관했다가 군대를 동원할 때 임금의 교서와 함께 내려보냈는데 오른편 반쪽과 맞추어보고 확실하면 군대를 동원했다. 군대를 발동할 때는 반드시 병부가 있어야 했지만, 진법연습을 할 때나 사신을 영송할 때는 예외적으로 발병부 없이도 군대를 동원했다.
병부가 부른 참화?
이렇듯 병부는 군대를 동원할 때 쓰는 징표이기 때문에 매우 예민한 군사 기물이었다. 그런데 이 병부 때문에 세종 즉위년인 1418년에 조선 조정엔 한바탕 피바람이 불었다. 당시 태종은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났지만 군권은 그대로 쥐고 있었는데, 병조참판 강상인이 군대를 움직이는 병부를 세종에게 바친 것이다. 이 때문에 태종이 노발대발하여 강상인의 관직을 빼앗고 관노로 삼는 한편, 병조의 관리들을 대거 교체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그런데 이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태종은 세종의 장인이자 영의정이며 소헌왕후의 아버지인 심온을 제거하기 위해 이 사건을 다시 들춰냈다. 당시 심온의 동생 심정이 병조 관료로 있었는데, 그를 강상인과 연루시키고, 다시 심정을 심온과 연루시켜 그들 모두를 반역도당으로 몰았다. 물론 반역의 수괴로 지목된 인물은 심온이었는데, 당시 중국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온 심온은 영문도 모르고 졸지에 반역도당의 주모자가 되어 목숨을 잃어야 했다.
사가들은 이 사건에 대해 태종이 세종의 왕위를 안정시키기 위해 외척 척결 차원에서 벌인 일이라고 호도하지만, 실상은 의심이 많았던 태종이 자신의 의심증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벌인 무자비한 살생극이었다. 말하자면 병부가 부른 참화가 아니라 의심증이 부른 참화였던 셈이다.
전국에 마패가 몇 개?
마패도 말을 발동할 수 있는 징표라고 해서 발마패(發馬牌)라고도 불렀다. 주로 공무로 출장 가는 관원이 역마를 이용할 때 사용하는 패였다. 이때 관원은 상서원에서 마패를 발급받았다.
마패는 고려시대부터 사용하던 것인데, 고려 원종 때 포마법을 실시하면서 제도화되었다. 그리고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태종 10년(1410년)에 포마기발법(鋪馬起發法)을 실시함으로써 본격화되었다.
마패의 재료로는 나무, 철, 구리 등이 사용되었는데, 모양은 모두 원형을 띠고 있었다. 초기에는 나무로 만들었는데, 파손이 심해 세종 대부터는 철로 만들다가 성종 이후에는 구리로 만들었다.
마패의 한 면에는 대소 관원의 등급에 따라 마필의 수효를 새기고 다른 한 면에는 자호(字號), 즉 중국의 연호와 연월 및 상서원인(尙瑞院印)이라는 글자를 새겼다. 조선 초에는 병조에서 마패를 만들어 승정원에서 발급하다가 ‘경국대전’이 반포된 성종 대 이후부터 상서원에서 발급했다.
그런데 지방에서는 마패를 감사나 병사, 수사 등이 내줬다. 지방에서 역마를 이용할 때마다 상서원으로 올라올 수 없었기 때문에 병사, 수사, 감사 등이 일정 수의 마패를 발급받아 뒀다가 필요시에 이용하도록 했던 것이다.
이렇듯 마패는 중앙과 지방에 모두 배치되었기에 당시 사용하던 마패의 숫자도 만만치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당시 사용하던 마패의 숫자는 몇 개나 되었을까?
영조 대인 1730년의 실록 기록에 따르면 마패는 중앙에 500여 개, 지방에 160여 개가 있었다고 한다. 이렇듯 조선에서는 약 670개 정도의 마패를 운용했다.
마패로 술을 사 먹어?
마패는 숫자가 많다 보니 때론 파손되거나 도둑맞는 경우도 많았을 법하다. 그래서 마패를 파손하거나 훔치는 경우엔 매우 중한 형벌로 다스렸다.
마패를 파손한 자는 장 80에 도 2년, 즉 80대의 매를 맞고 2년 동안 감옥에 갇히는 형벌을 받아야 했다. 그리고 마패를 훔치거나 거래하는 경우 최고 사형에 처하기도 했다.
이런 엄한 형벌이 기다리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마패를 훔쳐다가 팔아먹는 간 큰 자가 있었다. 그것도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마패를 훔친 인물이 있었는데, 바로 중종 대의 상서원 서리 최맹손이었다.
그는 마패를 훔쳐다가 기생집에 가서 술과 음식을 사 먹었다. 그것도 한 번도 아니고 여러 차례에 걸쳐 상습적으로 한 짓이었다. 그리고 이 일이 발각되자, 중신들이 모여 그를 극형에 처할 것인지 아닌지 논의했는데, 대부분의 중신들은 마패를 훔쳐다가 말을 사용하는 데 쓰지 않았으니 사형은 과하다고 결론지었다.
최맹손은 이렇듯 유독 술에 관대했던 중신들 덕분에 목숨은 건졌지만, 많은 매질을 당하고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고 한다.
작가
■ 용어설명 - 경국대전(經國大典)
나라를 경영하는 큰 법전이라는 뜻을 가진 조선시대 기본 법전이다. 조선은 개국 후 전대의 법 규정을 정리해 ‘경제육전’을 반포했지만 규정이 없거나 규정 사이에 모순이 확인되는 경우가 많아 그때마다 새로운 규정을 추가했다. 세조는 이러한 단점을 보완한 경국대전 편찬을 시작했고 성종 재위 시기에 완성됐다.
Copyright © 문화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내달부터 ‘대구시 군위군’… 대구, 전국 가장 넓은 도시된다
- “죽일까 살릴까”…윤혜진, 또 대형사고 친 엄태웅에 분노
- 젤렌스키만큼 버틸까…“中 대만 침공시 차이잉원 지도력이 운명 결정”
- 신현지 “송혜교가 밥해주고, 제니 집서 자고”
- 변호 위해 1100km 달려갔더니 “오늘 재판 안합니다” 분노한 변호사 법원 상대 소송
- 미모의 대만 총통부 대변인, ‘유부남 보디가드’와 불륜 의혹에 사임
- ‘깡통폰 제출’ 송영길, “핸드폰 한번씩 포맷하지 않나…증거인멸 아냐”
- ‘갈 데 없는’ 딸 친구 거뒀더니...5억7000만원 횡령해 명품·성형수술에 펑펑
- “러 군 핵심 ‘아마겟돈’ 장군, 프리고진 반란 가담 가능성”…NYT “지도부 내분 치명적 신호
- 일생 6명 왕비뒀던 ‘바람둥이’ 헨리8세가 남긴 ‘손가락 낙서’…“신이 벌할까” 걱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