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를 접어 차에 싣고, 원시의 정적 속으로 도망치다
물과 친해지기
우리는 물과 친하지 않다. 우리는 물과 거래처 직원처럼 지낼 순 있지만 엄마 아빠와 나 사이처럼 밀접해질 순 없다(물 안에서 물한테 산소를 달라고 투정부릴 수 없다!). 아무튼 물과 친하지 않은 덕분에 우리는 가야 할 곳, 가고 싶은 곳에 제대로 갈 수 없는 경우가 있다. 물과 가깝게 지내려면 배가 필요하다. 배야 곳곳에 있긴 하지만 모든 배를 자가용처럼 몰 수 없다. 그런 배가 있지만 매우 비싸고 어떤 건 집보다 크다. 이번 생에 배를 갖는 건 포기해야겠다고 마음먹기 전에 아예 배를 구할 생각조차 못 할 정도로 배는 부담되는 물건이다. 그러니 우리가 물과 허심탄회하게 지내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비교적 싸고, 갖고 다니기 편할 정도로 작은, 접이식 자전거 같은 배가 있다면 좀 다를 것 같다. 우선 나는 평일에 자주 웃을 것 같다. 사무실에서 빠져 나와 배를 타고 멀리 도망치는 상상을 하면서 말이다. (엇, 이거 새 텐트를 장만했을 때와 비슷한 기분인데!)
도망치는 거야 뭐, 나는 한 달에 두 번꼴로 하고 있는 셈인데(출장으로), 그 대피처가 매번 산이었으니 그것이 물렸던 모양이다. 이번에도 어느 날 사무실에서 불이 나도록 키보드를 치다가 갑자기 그 짓을 멈추고 물 한가운데를 동동 떠다니는 공상에 빠졌다.
이때 물과 나 사이를 떠받치고 있던 것이 배인지 그냥 판자때기인지 상관하지 않고 환상 속에서 둥실대고 있었는데, 환상 속의 내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카누!"라고 외쳤다. 나는 환상을 깨고 나왔다. '그렇지! 카누를 타면 이번 달에는 물로 도망칠 수 있겠어!' 곧바로 인터넷 지도를 켜고 제천 충주호 부근을 훑었다.
컴퓨터 모니터로 보는 충주호는 작았다. 나는 호수와 연결된 산, 계곡 등 가고 싶은 곳을 마구 골랐다. 하지만 내가 찍은 곳 모두 월악산국립공원구역이었다. 비법정탐방로였다. 실망했지만 다시 용기를 냈다.
반대쪽으로 화면을 옮겼다. 충주카누캠핑장이 나왔다. 여기서 호수 위 동쪽 방향으로 선을 쭉 그었다. 10cm쯤 그었을 때 이름 없는 산봉우리가 선을 가로막았다. '그래, 여기로 가자!' 장소는 정해졌고, 그런데 카누는 크지 않나? 이걸 빌려줄 사람 있을까? 검색창에 '카누'를 쳤다. 커피 광고가 우수수 나왔다. 화면 맨 아래서 '접이식 카누'라는 단어를 봤다. 다시 접이식 카누를 검색창에 쳤다. '마이카누'라는 업체가 나왔다. 업체 소개에 나온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남자가 받았다.
"네, 마이카누입니다."
"네, 저는 월간산 편집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6월호에 카누를 타고 산에 가는 걸 촬영하고 싶은데요."
"아, 그러세요? 날짜가 언제죠? 몇 명 가죠?"
진광석 대표라고 했다. 그는 굉장히 호의적이었다. 그는 2인용, 1인용 접이식 카누를 가지고 있고, 접이식이라 얼마든지 갖고 갈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웃었다.
일주일 뒤 마이카누의 진광석 대표, 김찬 이사, 김천기(아이엔지레져 대표), 김진표(아이엔지레져 대리), 양수열 사진 기자, 임동진(윤성중 기자의 친구, 오름 대표)과 나는 충주 카누캠핑장에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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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누와 카약은 어떻게 다른가?
카누와 카약은 다르다. 배의 모양보다 어떤 패들(노)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카약과 카누를 구분하는데, 물갈퀴가 양쪽에 달린 패들을 사용한다면 카약, 물갈퀴가 한쪽만 달려 있는 패들을 사용한다면 카누다. 이 외에 배 위가 덮여 있다면 카약, 활짝 뚫려 있다면 카누다. 이에 따라 카약은 빠른 속도를 내며, 카누는 느리다. 카약은 급류 계곡에 어울리고, 카누는 잔잔한 호수에서 타면 딱이다. 마이카누는 카누를 기본으로 하지만 카약처럼 탈 수도 있다. 물갈퀴가 양쪽에 달린 패들을 이용하면 되는데, 다만 마이카누를 이용해 급류에서 카약처럼 탔다가 물이 배 안으로 들어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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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지 선착장 도착! 임동진은 마이카누 스태프들에게 패들링 자세 좋다고 칭찬 받았다. 이 말을 의식한 듯 그는 배를 운전하는 내내 폼 꽤 잡았다.
"자, 배를 옮기자!" 2인용 카누는 둘이서 들기에 가벼웠다. 마이카누의 조립식 카누는 10년 이상 쓸 수 있을 정도로 튼튼한데, 이만큼 오래 쓰려면 관리에 신경 써야 한다. 자갈밭으로 이뤄진 선착장에서는 바닥이 긁히지 않도록 들어서 옮기는 것이 좋다. 무게가 무겁지 않아 2인용도 혼자서 들 수 있다.
육지로 올라와 텐트를 쳤다. 백패킹용으로 제작된 작은 텐트는 '카누 캠핑'에 딱이다. 카누와 텐트, 두 개만 있다면 국내 어디든 못 갈 데가 없다. 아무도 없는 휑한 노지에서 근사하게 머물 수 있다.
"저 뒤에 산은 뭐지?" 노지 뒤쪽으로 봉긋하게 산이 솟아 있었는데, 그 꼭대기에 무엇이 있을지, 꼭대기에서 어떤 풍경을 볼 수 있을지 궁금해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임동진, 양수열 사진 기자를 끌고 산으로 올라갔다.
"야, 여기 아무 것도 없잖아!" 힘들게 숲을 헤치고 봉우리 정상까지 올라갔지만 아무 것도 없자 임동진이 화를 냈다. 나는 가만히 있었다.
뒷산에는 볼 게 별로 없었다. 봉분이 몇 기 있었고 길은 이 무덤들을 연결해 희미하게 이어졌다. 괜히 올라왔나 싶을 정도로 아무 것도 없었다. 머쓱했다. 그 와중에 임동진이 또 포즈를 취했다.
결국 산에서 1시간 만에 내려왔다. 다 내려와서 걸음을 멈췄다. "야, 이거 너무 멋있잖아!" 우리는 우리가 만든 야영지와 주변을 둘러싼 풍광을 보고 감탄했다.
야영지엔 그늘이 없어 따가운 햇볕을 그대로 받았다. 하지만 바람이 시원하게 불었다. 우리는 타프 아래 모였다. 말 없이 가만히 있어도 어색하지 않았다. 모두 충주호를 둘러싼 산에 나무가 몇 그루나 있는지 세고 있는 것 같았다.
양수열 사진 기자의 옆모습. 평소 자신의 인증샷을 찍을 기회가 없을 것 같아 내가 휴대폰 카메라로 찍었다. 하지만 그는 사진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인지 심드렁했다.
밤이 되기 전 노을이 질 때 양수열 사진기자가 말했다. "야, 지금 좋다. 배 한 번 더 타자!" 나는 바로 배를 끌고 호수로 나갔다. 부담 없었다. 몸뚱아리만 배에 던져놓고 슬쩍 물을 튕기면 배는 앞으로 나갔다. 접이식 카약은 굉장히 간편했다.
밤이 됐다. 뻐꾸기와 고라니가 대화하는 소리만 주위에 울렸다. 그들이 대화를 그치면 굉장히 고요했다. 인간이 지구에 없던 시절은 이처럼 평화로웠을까? 생에 처음으로 정적 속에 놓인 기분이라 나는 이 자리에 오래 있지 못했다.
카누와 강과 산. 그리고 노을. 힐링에 필요한 최고의 궁합 아닐까?
꿈 같은 이미지다. 이 풍경을 사진으로 건질 수 있어 다행이었다. 돈을 모아 마이카누를 사면 매주 여기 갈 수 있다!
*제품 이미지를 위한 컷으로 촬영 후 철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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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쓴 장비
MSR 허바허바 쉴드 2(왼쪽)
허바허바는 미국이나 영국에서 "좋아, 좋아!" "됐어, 됐어!" "빨리, 빨리"로 통용된다. 이 텐트는 그 이름과 딱 들어맞는 제품이다. 자립식으로 어디든 꽤 안정적으로 설치할 수 있고 설치 방법도 쉽다. 무게까지 가볍다(총중량 1.47kg). 배 안에 툭 던져놓고 카누잉을 즐기기에 제격이다. 완성했을 때 모양까지 예쁘니 휑한 노지에서도 돋보인다. 인증샷용 텐트로 손색없다.
MSR 틴드하임 3
허바허바에 비해 설치가 약간 복잡한 편이다. 내피를 플라이와 연결할 때 쓰는 고리가 생소하지만, 그래도 완성된 텐트 내부는 굉장히 넓다. 함께 제공되는 풋프린트도 아주 유용하다. 패킹 총중량은 3.73kg. 이 무게가 부담이라면 내피를 빼고 플라이만 챙겨도 된다(이렇게 쓸 경우 플라이 안에 자전거를 보관해도 된다).
처음 본 의자
탤론 피벗체어 이번 카누 캠핑에 동참한 김천기씨는 탤론Talon이라는 캠핑용 의자를 만든다. 이 의자는 우산처럼 접고 펴는 방식이라 설치가 굉장히 쉽다. 완성된 의자는 360도 회전된다. 무게가 다소 무겁지만(2.5kg) 배에 싣기엔 아무 문제 없다.
좋은 아이디어!
마이카누 진광석 대표와 김찬 이사의 안락한 휴식처. 이들은 자신들이 탄 배를 이용해 '대피소'를 만들었다. 4개의 패들을 폴대 삼아 타프를 치고 그 안에 배를 집어넣었다. 매트리스 대용으로 배 안에 들어가 누웠다. 처음 하는 시도였는데, 진광석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바닥만 조금 더 보강하면 완벽합니다!"
충주카누캠핑장에서 함암리의 노지까지 3km 거리다. 카누로 약 1시간 걸렸다. 노지와 연결된 산에서 간단한 산행을 할 수 있다. 노지에서 오른쪽으로 임도가 희미하게 나 있는데, 이 길을 따라 가면 묘지가 나온다. 묘지 위로난 또렷하지 않을 산길을 따라 30분쯤 가면 산 정상이다. 정상에는 볼 게 없다. 가시나무가 많아 긴팔셔츠, 긴바지를 입고 가는 것이 좋다.
월간산 6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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