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소에도 멈추지 않는 트럼프, 나중에 ‘셀프 사면’?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미국 전현직 대통령으로선 처음으로 연방 검찰에 의해 기소됐다. 2020년 1월 퇴임 후 기밀문서를 자택에 가져가 불법으로 보관하고 은닉한 혐의 등을 받고 있다. 앞서 그는 과거 자신과 성관계를 한 포르노 여배우에게 입막음용으로 돈을 지불하면서 기업회계를 조작한 혐의로 지난 3월 뉴욕 지검에 기소되었는데, 불과 석 달 만에 연방법 위반으로 형사 기소되었다. 트럼프는 이번 기소를 ‘사법체계의 무기화’ ‘사상 최대의 마녀사냥’이라며 민주당 행정부와 조 바이든 대통령을 비난했다. 여기에 공화당 유력 인사들까지 트럼프의 주장에 동조하면서 정치적 양극화로 분열돼온 미국 사회가 더욱 심각한 내홍에 빠져들고 있다.
트럼프 전 대통령 기소는 메릭 갈런드 법무장관이 연방 검사 출신인 잭 스미스를 지난해 11월 특검에 임명한 직후 예견돼왔다. 스미스 특검은 불과 6개월 만에 기밀 유출 건에 대한 수사를 마무리한 뒤 37가지 혐의로 트럼프를 기소했다. 37가지 가운데 31건은 국가 기밀을 고의로 자택에 불법 보관한 혐의다. 나머지 6건은 기밀 은닉 및 허위 진술 등의 혐의다. 각 죄목의 형량을 감안할 때 유죄가 확정되면 트럼프는 최대 420년 징역형을 선고받을 수 있다.
기소장(총 49쪽)에 따르면 트럼프 전 대통령은 기밀이 담긴 상자들을 플로리다주에 있는 마러라고 저택의 화장실과 샤워실, 사무실, 침실, 창고, 무도회장 등 여러 곳에 허술하게 분산·보관했다. 실제 부실한 관리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진이 공개되기도 했다. 미국의 주요 정보기관이 취합한 문건들로 미국과 동맹의 방위능력, 핵무기 프로그램, 적의 공격 시 미국과 동맹국의 잠재적 취약점, 외국의 공격 가능성에 대비한 보복 계획 등 1급 기밀이 담겨 있다. 또한 트럼프는 이란에 대한 미국의 공격 계획 같은 기밀을 외부 인사들에게 두 차례나 공개한 사실이 이번에 드러났다. 그는 기밀 상자를 은닉한 사실을 숨기거나 관련자에게 거짓말을 하도록 교사하는 등 사법 방해를 한 혐의도 받고 있다.
트럼프는 형평성에 어긋난 기소라며 불만을 드러냈다. 그는 바이든 사례를 거론한다. 바이든이 과거 부통령 임기가 끝난 뒤 기밀이 담긴 약 10개 서류 상자를 자신의 저택과 사무실에 보관해온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올해 1월 연방 수사국으로부터 압수수색을 당했다. 현재 특검이 이 사건을 수사하고 있다. 이에 대해 바이든 대통령은 해당 사실을 인지한 뒤 곧바로 문제의 기밀문서를 자진 반납했는데, 기밀문서를 은닉하고도 자진 반납을 거부한 채 압수수색을 당한 트럼프와는 분명히 사안이 다르다는 입장이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이와 같은 일을 자신을 낙마시키기 위한 정치적 음모라고 규정했다. 그는 기소된 직후 영상 메시지를 통해 “나는 결백하다”라며 여러 번 주장했다. 그는 “바이든 행정부가 법무부와 연방수사국(FBI)을 무기화해 날 잡으려 안달이다. 이는 내 평판을 깎아내려 내년 대선에서 이기려는 선거 개입이다. 끝까지 싸우겠다”라고 말했다. 열성 지지층의 결집을 노린 것이다.
공화당 유력 의원들도 기소를 맹비난하면서 정치 쟁점화하고 있다. 공화당 케빈 매카시 하원의장은 “현직 대통령이 반대 당의 선두 대선후보를 기소하는 것은 부당한 짓”이라며 바이든 대통령을 정조준했다. 공화당의 짐 조던 하원 법사위원장은 갈런드 법무장관에게 보낸 항의 서한에서 이번 기소를 두고 “심각한 이중 잣대와 법리 오용”이라고 비판했다.
에이사 허친슨 아칸소 전 주지사를 제외한 공화당 대선후보들도 트럼프를 옹호하고 나섰다. 최근 대선 경선 출마를 밝힌 론 디샌티스 플로리다 주지사는 이번 기소를 “연방 법 집행기관의 무기화”라고 규정했다. 그는 “바이든 행정부가 트럼프를 잡는 데는 그토록 열심이면서 클린턴이나 헌터에 대해선 왜 그리 소극적인가?”라고 말했다. 2016년 대선 당시 민주당 후보였던 힐러리 클린턴이 국무장관 시절 개인 서버에 1급 기밀을 보관한 사실이 드러났지만 기소되지 않은 점, 바이든 대통령 차남 헌터 바이든의 탈세 의혹 등을 1년 이상 수사하고도 기소하지 않은 점을 지적한 것이다.
대배심원단, 재판 관할지 선정에 고심
이번 기소와 관련해 스미스 특검이 공정성 시비 등에 대해 고심한 것으로 보인다. 일처리 과정에 그런 흔적이 엿보인다. 그는 트럼프 전 대통령 기밀 누출 건을 심리하고 판단할 대배심원단을 구성하기 위해 트럼프의 거주지인 남부 플로리다 주민 가운데 23명을 무작위로 선발했다. 대배심원단이 트럼프의 혐의를 인정한 이후에 스미스 특검이 기소를 결정했다. 재판 관할지 선정도 신경 써서 플로리다주 남부 연방지법을 택했다. 이번 사건을 심리할 판사는 트럼프가 재임 시절 지명한 에일린 캐넌이다. 캐넌 판사는 지난해 8월 FBI가 트럼프 자택에서 회수한 기밀문서를 법무부가 아닌 특별조사관이 검토하도록 해야 한다는 트럼프 측 요청을 수용한 바 있다. 〈뉴욕타임스〉는 사설에서 “플로리다에서 무작위로 선발된 시민 23명으로 구성된 대배심원단이 트럼프의 혐의를 인정했음에도 트럼프와 공화당 지지 세력은 이번 기소를 정치화하려 하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기밀문서 유출 건 말고도 2021년 1월 친트럼프 세력의 의사당 난입 사건의 배후 조종 혐의, 조지아주 대선 결과 조작 지시 혐의 등으로 조만간 추가 기소될 가능성이 높다. 트럼프는 설령 법정과 유세 현장을 오가는 상황이 벌어져도 대선을 완주하겠다는 입장이 확고하다. 기소 상태로 유세 현장을 누비며, 최악의 경우 옥중 유세를 하는 것이 ‘정치적 박해’ 이미지를 극대화해 지지층을 결집할 수 있는 호재라고 본다. 실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지난 3월 뉴욕 지검에 기소된 뒤 불과 2주 만에 1500만 달러(약 192억원)를 모금했다.
공화당 여론조사가인 닐 뉴먼하우스는 AP 통신에 “트럼프 스스로 기소될 것이라고 누차 말했기 때문에, 이번 기소는 친공화당 유권자들에겐 놀랄 일이 아니다”라면서 공화당 대선주자 1위인 그의 입지가 흔들릴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공화당 전략가인 세라 롱웰은 “트럼프가 탄핵되거나 기소될 때마다 오히려 지지자들의 결집 효과가 나타났다. 이번 기소 외에 추가로 기소돼도 트럼프가 공화당 대선후보로 확정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트럼프의 완주’가 트럼프로서는 손해 볼 게 전혀 없는 전략이라는 말이 나온다. 트럼프가 대선에서 승리하면? 취임 후 곧바로 ‘셀프 사면’에 나설 것이 확실하다. 다른 공화당 후보가 대선에 승리하면? 트럼프에 대한, 친공화당 유권자들의 사면 압력에 직면할 것이기에, 이러나 저러나 손해 볼 게 없다는 것이다.
워싱턴∙정재민 편집위원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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