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 모순 직시하고, 모순 해결 도움 되는 역사 연구하라던 강만길 선생에게”[추모기고]
https://m.khan.co.kr/culture/book/article/202306232018001
늘 그랬듯이 양양 하조대로 가는 날 즈음이면 명절을 앞둔 설레는 분주함으로 마음이 부산해집니다. 행여 길을 잘못 들어 늦어지나 하여 전화주실 때면 휴게소에서 커피 한잔으로 노닥거린 여유가 괜스레 머쓱해지곤 합니다.
이제는 단골이 되어버린 하조대 해변의 횟집에서 회고하시는 한국사학사와 늘 재구성하고자 하시는 사론은 정감 어렸고, 늘 궁금할 정도로 재미있습니다. 선생님의 구술을 작심하고 받으리라며 그때그때 기록해 두지 못한 제 게으름을 변명한 지가 지금까지입니다.
자칭 타칭 원로는 많으나 길은 희미한 이 시절에 김용섭 선생님과 나누시던 따뜻한 정담이 가끔 생각납니다. 2017년 11월 쌀쌀해지는 겨울 초입이니 벌써 몇 해 전이 되었고, 그때는 그럴 줄 몰랐지만 두 분의 마지막 만남이 되었습니다. 책을 쓰느라 힘들어 병원 신세를 졌다며 김 선생님이 갓 출간된 <농업으로 보는 한국통사>를 건네자 선생님은 이제 건강도 챙기시라고 권유했고 김 선생님은 이제 사회적 책임에서 좀 자유로워지시라고 선생님께 권유했지요. 학문적 동지로 한 시대를 헤쳐온 두 분의 대화치고는 소박해 거창한 화두를 내심 기대한 얕은 제 머리로는 다소 실망스러웠지만, 역사를 공부하다 보니 사회적 책임도 외면할 수 없었다는 선생님의 겸연쩍은 대답이 왜 역사를 공부하는지 스스로 반문할 때면 새록새록 되살아납니다.
선생님과 함께 계간지 <내일을 여는 역사>를 만들 때입니다. ‘나는 역사를 이렇게 본다’는 코너를 만들자고 제안하셨지요. 제가 이 코너에 글을 쓸 수 있는 필자가 많지 않을 것 같다고 하자, 역사를 곡해하는 것도 문제지만 역사를 공부하면서 이런 과제에 답하지 못한다면 그것도 문제라고 하셨지요. 아픈 곳을 찔린 것 같았지만 왠지 유쾌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코너 이름을 ‘나는 왜 역사를 공부하는가’로 조금 완화하기는 했지만 말입니다.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와 사관의 정립, 이 양자의 선후를 따지는 일은 의미 없어 보이지만, 제 얕은 소견으로도 앎은 지식인에게 스스로 사회적 책무를 지우게 되는 것 같습니다.
2018년 12월 히도츠바시(一橋)대학에서 강덕상 선생님과 함께했던 좌담도 제게는 인상 깊은 자리였습니다. 오랜만의 해후였지만 이 역시 두 분의 마지막 만남이 되었습니다. 두 분이 교유한 지는 오래된 것으로 알고 있지만, 두 분은 여러모로 닮은 점이 많은 것 같습니다. 자본주의맹아론과 내재적 발전론에 입각한 경제사 연구를 출발점으로 사회운동사로 확대해 간 연구 이력도 그렇지만, 분단된 반공독재사회, 민족 차별이 더해진 분단된 재일조선인사회에서 자기 존재의 모순을 사회 모순으로 전화시키며 실천적 연구를 통해 앎과 삶을 일치시키려 한 지식인이라는 점은 후학인 저의 바람이기도 하겠습니다.
대학 교정을 돌아보다가 조선사회 정체후진성론을 입론한 후쿠다 도쿠조(福田德三)의 동판을 보시고는 백남운이 <조선봉건사회경제사>에서 우리 역사에도 중세사회가 있었다고 논증해 자신의 선생인 후쿠다의 논리 즉 조선사회가 고대사회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는 논리를 반박했다고 하시면서 한껏 웃으시던 게 어제 일 같습니다. <조선봉건사회경제사>는 임창순 선생님의 소개로 평생의 친구가 되었던 성대경 선생님을 만나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으니, 선생님에게는 학문적 인연에 사람의 신뢰를 더 해 준 특별한 책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선생님은 늘 저희 후학들에게 역사학자는 사학사에 남을 수 있도록 연구에 힘써야 한다고 하셨지요. 학문적 세도로 명성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모순을 직시하고 나아가 그 모순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는 역사 연구로 사학사에 남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당부였습니다. 조선이 식민지를 면할 수도 있었던 계기로 자본주의 맹아와 공화주의 운동을 추적하고 그 실패로 결국 식민지가 되게 되었던 역사적 과거를 현실로 직시한 것도, 식민지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적극적인 민족해방운동과 그 하나의 방법으로 민족통일전선에 주목한 것도, 남북 분단을 피하고자 했던 현실적 노선으로 좌우합작운동에 천착하게 된 선생님의 연구 이력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모든 사물은 변증법적으로 변화‧발전하기에 역사 역시 변하기 마련이며 그것은 곧 이상의 현실화 과정이라는 것이 선생님의 지론이었습니다. 한국사에서 자본주의의 성립 조건을 찾아보고자 했던 선생님을 비롯한 동인들의 노력들이 그와 상반되는 연구들에 마주하게 되는 것도, 한국자본주의 발전의 보수적 기원을 식민지시대에서 구하고자 하는 연구에서 촉발된 논란도, 민족과 계급으로 상징되는 민족해방운동의 과학적 합리성의 준거들이 해체되는 경향도, 선생님이 강조하셨듯이 연구를 통해 결국 인류의 이상을 현실화하는 새로운 방향으로 정립되어 가리라 생각됩니다. 헤겔이 근대성 담론을 개시하면서 역사와 이성의 관계는 여전히 구성적이라 했듯이 말입니다.
갓 박사학위를 받은 연구자들의 연구 조건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후속 연구를 격려하고자 선생님이 연구지원금을 만든 것도 이런 연유라 생각됩니다. 역사 문제가 정략의 도구가 되고 역사 대중화가 상업주의를 넘어서지 못하는 세태에 현실의 모순을 직시하고 무엇보다 연구에 힘쓰라는 선생님의 당부는 역사와 현실 간의 팽팽한 긴장을 견지하며 연구해 온 선생님의 연구 역정이기도 했습니다.
새 천 년이 시작되던 2000년 선생님이 대중역사지로 <내일을 여는 역사>를 창간할 때만 해도 새로운 시각으로 한국사 연구를 개척해 가던 ‘신진’ 역사학자들의 연구 성과를 일반인들에게 알릴 수 있는 매체가 많지 않았지만, 오히려 지금은 대중 매체는 많으나 그 내용을 채울 연구가 상대적으로 부족하다는 느낌마저 듭니다. 새로운 연구 성과들의 대중적 보급이 필요했던 시기에 충분히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자기 역할을 다하고 역사대중지로서 계간지는 종간된 것이라 생각됩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를 맡아 애쓰셨던 시간들이나, 은사이신 신석호 선생님에 대한 원고를 회고록에서 빼면서 임창순, 정재각 선생님 부분도 함께 빼게 되었던 과정은 곁에서 보아도 선생님의 어려운 마음을 짐작케 했습니다. 해방된 지 반세기가 지나도록 식민지시대 친일문제를 학문적으로 정리하고 극복한 연구가 변변치 않다고 늘 말씀하셨고, 위원회를 그런 계기로 삼고자 하셨지요. 이를 두고 세간의 평가는 다양할 수 있지만, 여론몰이식 개인적 단죄로는 해결될 수 없는 친일문제를 식민지시대의 총체적인 성찰로서 학문적으로 극복하고자 한 선생님의 바람은 후학들의 연구를 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습니다.
‘해방 후의 시대’를 ‘분단시대’로 성격 지우면서부터 선생님의 연구가 분단을 극복하기 위한 통일문제로 귀결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인지도 모르겠으나, <분단시대의 역사인식>으로부터도 30여 년의 시간을 요구했습니다. 국내외의 현실적 조건에서 추론되는 분절적 사유에 근거하기보다 한국근현대사 연구의 논리적 결론으로 통일문제를 이해하고자 한 선생님의 통일론은 통일문제 인식의 역사학적 전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1945년 38선 획정으로 인한 ‘국토분단’과 1948년의 ‘국가분단’, 1950년 6·25전쟁으로 인한 ‘민족분단’ 이후 통일문제만큼이나 우리 사회를 양분한 문제도 없어 보입니다. 그런 가운데 선생님은 친북 인사나 종북론자로 폄훼되기도 하지만, 선생님의 지론처럼 분단을 극복하려면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반도에 사는 주민들의 역사인식이 고도로 성숙되어야 하듯이 선생님의 통일문제 인식이 분단을 고통스러워했던 한 역사학자의 논리적인 연구로 통용되는 양식 있는 사회로 우리 사회가 발전해 간다면 이 역시 호사가들의 말잔치로 웃어넘길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 폄훼조차 늘 괜찮다며 괘념치 말라시던 선생님의 낙관은 수 백년의 시대를 넘나드는 역사 연구에서 현재의 모순은 이상으로 나아가는 과정에 불과할 뿐이라는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겠지요.
우리 사회가 식민지를 경험하고 곧이어 분단되었던 만큼 자립의 터전을 마련하고 분단을 극복하는 것이 중요했기에 선생님의 연구에서 민족주의는 빼놓을 수 없는 가치였지만, 선생님은 자신이 평화주의자, 열린 민족주의자, 미래지향적 인간주의자라고 밝히셨지요. 배타적인 민족적 가치보다는 보편적인 인류의 가치를 존중하고 민족주의는 어느 시점에서는 넘어서야 할 가치일 수밖에 없다고도 하셨지요. 그 시점이 언제인지는 제 기억에 없지만, 그때까지의 과정에서도 민족주의는 개방적이고 이해관계를 서로 나누며 평화적이어야 한다고 하셨지요. 그래서 평화적인 아시아지역공동체를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여기에 북측이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참여할 수 있는 조건이 어떠해야 하는지가 선생님 노년의 관심사가 되었지요.
선생님은 또 한 분의 스승이신 임창순 선생님이 스스로 사회주의자라고 밝히셨다면서 자신도 사회주의적 가치를 지향한다고 하셨지요. 조선 후기 상업자본의 발전 과정을 밝힌 선생님의 박사학위 논문이 그렇듯이, 사회의 변화 과정을 역사 연구의 중요한 과제로 평가하는 관점에서는 자본주의가 영원히 지속된다는 가정은 성립 불가능하기에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하고자 한 사회주의적 가치를 또 하나의 이상으로 지향한 것이겠지요. 그 사회주의가 마르크스의 과학적 사회주의인지 혹은 역사적 현실로 존재했던 사회주의인지는 제 기억에 없지만, 역사 발전 과정에서 도출되는 자본주의 이후의 어떤 새로운 사회를 지칭한 것으로 기억됩니다. 자본주의의 계급 불평등을 지양하고자 하는 사회주의자는 휴머니스트일 수밖에 없으며, 식민지시대에 활동했던 조선의 많은 사회주의자들도 대개는 그러했다고도 하셨지요.
여행 중에 구입한 마르크스와 레닌의 조그만 흉상을 언젠가 제게 주시며 21세기는 20세기보다 더 격렬한 사상의 세기를 요구할 것이기에 이론과 사실을 겸비해야 한다는 당부는 산업자본주의와 금융자본주의를 지나 ‘4차 산업혁명’의 시대를 살아가는 후학들에게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기 위한 과제를 던져주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서울에 오실 때마다 몇 권의 신간을 사가실 때면 그간 제가 본 책은 몇 권이나 되는지 견주어 보고는 부끄러웠던 적도 많았습니다.
이제 멀리 출타하셨으니 이 편지를 부치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선생님과 함께 얘기하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보기도 했던 하조대의 밤바다로 생생한 시간여행을 떠날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이곳 캘리포니아의 밤도 깊어만 갑니다. 늘 뒤척이셨던 불면의 밤들이었지만 오늘만은 평안한 밤 되십시오. 안녕히 계십시오.
신용옥 전 내일을여는역사재단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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