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팝에 애정의 시선? 실패할 자유를 누려라

2023. 6. 30. 0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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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팝 다이어리] 2023년 상반기, 다사다난했던 케이팝

[김도헌 대중음악평론가(zener1218@gmail.com)]
2023년의 반이 지나갔다. 보통 한 해를 차분히 돌아보는 결산을 선호하지만, 케이팝을 바라보는 입장에서는 이제야 6개월이 지나갔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만큼 올해 케이팝에는 많은 일이 있었다.

두 달 전인 4월 7일 '케이팝 다이어리' 첫 연재 칼럼의 주제는 케이팝 위기론이었다. SM엔터테인먼트 인수전을 통해 드러난 기획사들의 건전하지 않은 회사 경영 및 고착화된 창작 구조, 해외 시장에서의 주목에 비해 미미한 실제 실적, 신인 발굴의 어려움을 지적했다.

우려를 비웃듯 곳곳에서 승전보가 들려왔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경기장인 미국 로스앤젤레스 소파이 스타디움에서 월드 투어 하이라이트를 장식한 걸그룹 트와이스와 음반 선주문량 최초 500만 장 이상을 기록한 스트레이키즈의 활약에 힘입어 JYP엔터테인먼트는 올해 상반기에만 시가총액을 두 배 이상 높여 5조 원대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다. 뉴진스, 세븐틴, 투모로우바이투게더, 르세라핌을 앞세운 하이브도 건실한 활약을 펼쳤다. 카카오의 손을 잡고 'SM 3.0' 시대를 선언한 SM 역시 멀티 레이블 체제를 바탕으로 에스파, 샤이니, NCT를 컴백시키며 존재감을 과시했다. 새로운 성공 방식도 등장했다. 이들과 맞서 정상을 차지하고 있는 걸그룹 아이브의 활약도 대단하다. 중소 기획사 소속 걸그룹 피프티피프티는 소셜 미디어 트렌드를 영민하게 흡수한 '큐피드(Cupid)'로 빌보드 싱글 차트 17위까지 오르며 케이팝 역사상 미국에서 가장 성공한 노래의 주인공이 됐다.

산업의 측면으로 보았을 때 케이팝은 분명한 상승세다. 높은 교육열과 엘리트주의, 일상화된 경쟁의식 등 한국 사회를 압축해 놓은 듯한 케이팝 산업은 혹독한 훈련 끝에 팔방미인 기인을 양성하여 화려하고 완벽한 무대를 소개하는 형태로 글로벌 음악 시장에서 이름을 알렸다. 양적 성장은 확실하다. 그러나 질적으로도 성숙하고 있느냐 물으면 선뜻 대답하기 어렵다. 도전적이고 대안적인 창작보다 안정적인 수입과 대단한 성과에 몰입하는 모습이다. 팬덤 위주의 소비 형식에 맞춰 제작되는 콘텐츠는 팬이 아닌 이들과의 간극을 깊게 만들고 있으며 팬덤이 가는 길조차 점차 험난해지고 있다. 숫자에 가려 덮이곤 하는 구조적 문제는 결정적 순간에 비극이 되어 모두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창작의 고착화

최근 케이팝 아이돌 그룹의 음악을 관통하는 주제는 강력한 자의식이다. 무대 위 찬란하게 빛나는 나의 모습 (아이브, 'I AM'), 모든 금기를 거부하며 새 시대를 열어나가겠다는 힘찬 포부 (르세라핌, 'Unforgiven'), 특별하다 못해 스스로에게 별 다섯 개를 부여하는 자긍심 (스트레이 키즈, '특')이 꿈틀거린다. 명품 앰버서더를 넘어 인간 명품 호칭을 장려하는 케이팝에 있어 치열한 생존경쟁과 살인적인 스케줄, 두려움은 극복해야 할 사소한 문제일 뿐이다. 황홀한 우상과 성공의 단맛, 환상의 세계를 아우르는 세계관을 강조하는 케이팝은 셀러브리티의 음악이자 셀러브리티를 위한, 셀러브리티가 되고 싶은 이들을 위한 힘찬 구호와 행진을 목표로 한다.

케이팝은 대중의 공감으로부터 점차 멀어지고 있다. 해외 차트에서 훌륭한 성과를 내고 수백만 장 단위의 앨범 판매고를 올리는 그룹이라도 그들의 팬이 아닌 이상 멤버 수가 몇 명이며 어떤 음악을 지향하는지를 꿰차고 있는 이들은 많지 않다. 대중은 미디어에 자주 등장하는 유명인들의 유명한 노래라서, 그저 스트리밍 서비스의 차트 상위권에 올라 있어서 음악을 소비할 뿐이다. 한국의 시스템이 만든 한국의 가수인데도 정작 그들이 무슨 노래를 부르고 왜 인기가 있는지 이해할 길이 없다. 유명한 것으로 유명한 음악이다.

회사는 더 큰 수익을 위해 소속 가수들의 활동 일정을 무리하게 기획한다. 1년에 앨범 한 장 발표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1년에 2번 이상의 컴백도 익숙한 시대가 됐다. 숨 가쁜 일정 가운데 진지한 토론과 새로운 도를 통해 기획자들의 독특한 개성을 주입할 시간이 허락되지 않는다. 그러니 결과는 무한한 동어 반복과 고민 없는 레퍼런스지만, 팬덤이 만족하는 선은 유지하기에 매번 최고의 음반 판매량을 갱신한다. 대중은 유튜브 뮤직 상위권을 차지하는 팝과 제이팝에서 대안을 찾는다. 제작자의 확고한 방향 지시를 바탕으로 사소한 일상의 감정을 노래한 뉴진스, 스스로의 결함을 인정한 (여자)아이들, 팝 성향의 이지리스닝을 지향한 피프티피프티의 케이팝이 폭넓게 사랑받으며 롱런하는 이유를 돌아봐야 한다.

▲스트레이키즈. ⓒJYP엔터테인먼트

팬덤의 고충

팬이 되기도 쉽지 않다. 과거처럼 가수를 응원하고 그들의 음악을 많이 소비한다고 해서 팬으로 인정받는 게 아니다. 원한다면 버블 같은 유료 서비스에 일정 금액을 지불하고 가수와 개인적인 메시지를 나누며 만족감을 얻을 수 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아이돌 그룹을 직접 만나기 위해서는 우선 매년 소속사가 공식 모집하는 팬클럽에 가입비를 내고 회원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해야 그룹의 음악방송 무대를 현장에서 보는데 유리하며 치열한 콘서트 티켓 예매 경쟁에서 우위에 설 수 있다.

콘서트 티켓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 국가에서 운영하는 KSPO 돔 등 시설의 대관료는 크게 오르지 않았는데도 팬데믹 이전 10만 원, 12만 원대에 형성되던 아이돌 콘서트 티켓 가격은 15만 원을 넘어 20만 원을 돌파했다. 지난 5월에는 하이브의 콘퍼런스 콜에서 미국 티켓마스터가 채택하고 있는 수요에 따른 티켓 가격 변화 시스템 '다이내믹 프라이싱(Dynamic Pricing)'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 팬덤이 반발하는 일이 있었다. 국내 음악 방송 활동 기간이 2주 내외로 짧은 데다 공연 가격도 비싸지니 한국 가수의 '내한 공연'이라는 씁쓸한 우스갯소리가 나온다.

참석도 쉽지 않다. 대부분 해외 공연을 겸하는 월드 투어로 진행되는데, 한국에서의 공연은 서울에 집중되어 있다. 지방에 거주하는 팬들은 치열한 티켓 예매 경쟁을 이겨낸 후 새벽부터 일어나 교통비와 숙소비를 추가 지불하며 기꺼이 나의 우상을 만나기 위해 상경한다. 필수 지참품이 되어버린 응원봉과 기타 응원 도구 비용은 덤인데 그마저도 수량이 넉넉하지 않아 애를 태운다. 지난 5월 13일 잠실 올림픽 주 경기장에서 5년 만에 콘서트를 연 '가왕' 조용필이 관객 전원에게 응원봉을 무료 제공했다는 사실이 화제가 되며 케이팝 팬들은 부러움과 소속사를 향한 원망의 목소리를 냈다.

응원하는 가수의 생일 카페 등 팬덤의 자발적인 행사 지출을 제외하고 나면 굵직한 오프라인 팬 활동만 이 정도가 된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내가 지지하는 가수가 새 앨범과 함께 돌아오면 앨범을 구매해야 한다. 그런데 앨범은 한 장만 살 수 없다. 소속사는 개별 멤버, 그룹의 다양한 콘셉트에 맞춰 다양한 앨범 패키지를 구성한다. 가짓수가 너무 많다 보니 기본적으로 3~4장 이상 앨범을 구입해야 한다.

단출한 구성이라도 복수 구매는 필수다. 기획사가 앨범마다 무작위로 끼워 넣는, 멤버들의 사진이 담긴 포토카드를 수집하기 위해서다. 유튜브에 '앨범깡', '포카깡'을 검색하면 자신이 응원하는 그룹 멤버들의 포토카드를 확인하기 위해 박스채로 쌓여있는 앨범 수십, 수백 장의 비닐을 기계적으로 뜯는 영상을 쉽게 볼 수 있다. 또한 앨범 과소비는 그룹 사인회 당첨 확률을 높일 뿐 아니라, 첫 주 판매량을 의미하는 '초동' 판매 경쟁에서 응원 가수의 위상을 확인하는 지표로 작용한다. 미국 빌보드 차트에 이름을 올리는 가수라면 앨범 판매량의 중요성은 더 말할 것이 없다.

국내 음원 스트리밍 서비스가 개편된 후 앨범의 모든 곡을 차트 상위권에 올리는 '줄 세우기'가 불가능해지자 팬덤은 지지하는 아티스트에게 왕관을 씌우고자 앨범 판매량, 그중에서도 선주문과 첫 주 구입에 화력을 집중하고 있다. 한국소비자원의 통계에 따르면 케이팝 팬덤 활동 소비자의 52.7%가 굿즈 수집을 목적으로 음반을 구매하며 1인당 평균 동일 음반을 4.1장 구매한다고 한다. 소속사는 음반 판매량의 지속적인 증가에 행복한 비명을 지르고 있지만, 팬덤의 부담은 가중되고 있다. 버려지는 앨범이 야기하는 환경 파괴 문제도 흘려 들을 이야기가 아니다.

케이팝에 실패할 자유를 

화려한 무대 이면 케이팝의 어두운 현실도 자각해야 한다. 경영권 분쟁 과정에서 탄로 난 이수만 총괄 프로듀서의 방만한 경영 행태, 수많은 논란에도 YG엔터테인먼트 총괄 프로듀서로 돌아온 양현석 설립자의 소식도 2023년 상반기의 일이었다. 건강 문제를 호소하며 활동을 중지한 아이돌은 빌리 수현, 더뉴식스 천준혁, 아이브 레이, 레드벨벳 조이, 샤이니 온유, NCT 쟈니, 에스파 지젤, 블랙핑크 제니, 피프티피프티 아란에 달한다. 보이그룹 아스트로의 대표 멤버이자 빌리 문수아를 동생으로 둔 멤버 문빈은 4월 19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큐피드' 이후 꽃길만 걸을 것 같던 피프티피프티는 소속사와 용역업체의 소송으로 미래가 어두워졌다.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케이팝에 보다 애정 어린 시선을 보내달라는 의견을 많이 듣는다. 지표를 통해 칭찬하는 것은 쉽다. 좋은 면만 바라보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나는 케이팝이 양적으로도 질적으로도 대단히 흥미로운 문화 결과물을 내놓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비판적인 의견을 개진한다. 애정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상반기 한 단계 더 거대한 규모로 도약한 케이팝이 하반기에는 안정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실패할 자유를 마음껏 누리는 음악, 그리고 산업을 구성하는 모든 이들이 불행하지 않은 제도와 개선 방안을 선보이기를 기대한다. 나무보다 숲 전체를 바라보는 넓은 의식이 필요하다.

[김도헌 대중음악평론가(zener1218@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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