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라면값 인하보다 아픈 낙인 효과
집 앞 편의점에서 신라면 봉지 가격은 1000원, 진라면과 삼양라면이 950원이다.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니 묶음으로 판매하는 대형마트에선 신라면이 개당 800원, 쿠팡 같은 e커머스에선 740원 정도였다.
편의점 계산대 앞에 진열된 자일리톨껌 하나 가격은 1200원이다. 껌값도 안되는 라면이 고물가의 중심에 섰다.
지난 5월 소비자 물가 상승률은 3.3%였다. 같은 기간 라면 가격 상승률은 13.1%로 14년만에 가장 높았다. 숫자로 보면 라면값 상승률은 지나치다. 국제 밀값이 작년 라면값 인상 당시보다 50% 내렸다는 설명(추경호 경제부총리)이 곁들여지면 기업의 욕심에 화가 난다. 전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그리드플레이션(Greed+Imflation, 기업의 탐욕이 물가상승을 가중시키는 상황)이 떠오른다. 추 부총리는 '시민단체들이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추 부총리의 주문에 시민단체가 응답했고 한덕수 국무총리는 "공정거래위원회가 (라면값) 담합 가능성을 들여다봐야 한다"고 지원사격했다. 정부가 공정위, 담합까지 거론하면 버틸 기업은 없다. 부총리 발언이 나온지 열흘도 못돼 라면 회사들은 백기를 들었다. 농심 삼양식품 오뚜기 팔도 등 라면 4사는 다음달부터 일제히 라면값을 낮추기로 했다. 대략 개당 50원씩 가격이 낮아진다. 이제 라면값은 껌 한통에서 낱개 껌 몇개를 꺼내야 하는 수준이 됐다.
라면값 인하를 전하는 기사의 댓글은 대체로 험악하다. '겨우 50원이냐'는 반응이 대부분이다. 농심은 이번 가격 인하로 매출 200억원을 포기했지만 소비자들이 느끼는 체감도는 '겨우 50원'일 뿐이다. 라면값 인하 효과가 물가에 미치는 영향도 거의 없다. 라면의 소비자물가지수 가중치는 1000분의 2.7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휘발유는 20.8, 전기요금은 15.5, 돼지고기는 10.6이다. 라면값 인하를 체감하기 어렵지만 7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나오면 라면이 물가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미미한지는 체감할 수 있을 것이다.
정부가 라면값 인하를 위해 밀가루를 지렛대로 쓴건 신의 한수였다. 라면에 이어 밀이 들어간 과자, 빵까지 줄줄이 가격을 낮췄다. 하지만 소비자들은 혼란스럽다. 정부의 '신의 한수'에 기업들은 '꼼수'로 대응한 탓이다.
정부가 밀가루 가격을 낮춰 라면값 인하의 명분을 만들었는데 제분업체들은 밀가루 가격을 낮춘 적이 없단다. 밀가루 공급가격을 낮춘게 아니라 라면업체에 제공하는 판매장려금을 높여서 인하 '효과'를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밀가루 가격을 낮췄다는데 마트에서 판매하는 밀가루 가격표는 변동이 없다.
7월부터 라면값을 낮추기로 했지만 불닭볶음면, 진라면, 비빔면의 가격표는 7월에도 변동이 없다. 농심(신라면)을 제외하고 라면회사들은 주력제품을 가격 인하 대상에서 제외했기 때문이다. 잘 팔리는 왕뚜껑 껍라면은 놔두고 본적도 없는 왕뚜껑 봉지면 가격을 낮추는 식이다.
먹거리 전선은 더 확대되고 있다. 식품업계 관계자는 "(정부가) 가격 낮출 수 있는 제품이 또 없는지 계속 압박하고 있다"고 전했다.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은 지난 2월 식품업계 대표들을 소집해 "상반기 중에는 가격 인상을 자제해 달라"고 요청했다. 기업들은 일제히 가격인상 계획을 철회하고 상반기를 버텼다. 하지만 상반기가 끝나는 6월말 돌아온건 "가격 인하 압박"이었다. 7월 가격 인상을 예고했던 편의점 아이스크림은 29일 다시 동결을 발표했다.
식품업계 전체로는 수백억원의 매출 감소가 불가피해졌다. 하지만 기업들에게 잃어버린 매출보다 더 아픈건 '낙인'일지 모른다. 부총리의 한마디에 식품기업들은 원자재 가격이 오르면 득달같이 제품값을 올리고 원자재 가격이 내리면 이익을 챙기는 탐욕스러운 집단으로 전락했다. K-푸드를 새로운 수출 주력상품으로 만들겠다며 그렇게 기업들을 치켜 세우던 정부에서 벌어진 일이다. '기업이 가장 중요하다'는 정부다운 접근은 불가능했을까.
김진형 산업2부장 jhkim@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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