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의 사람들’ 키워드 셋, 프리고진은 2개를 갖고 있었다 [책&생각]

한겨레 2023. 6. 30.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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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틴의 요리사라 불리던 예브게니 프리고진이 지난 주말, 무장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접했다.

쿠데타 소식 이후 국내외 여러 매체를 통해 이번 사건의 의미와 앞으로의 예측이 쏟아지는 가운데 에이치(H). 알(R). 맥매스터의 <배틀그라운드> 를 책장에서 뽑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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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원의 길 위의 독서]

프리고진(왼쪽)이 2011년 11월11일 자신이 소유한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 외곽의 식당에서 푸틴 대통령에게 음식을 내고 있다.(위) AP 연합뉴스

배틀그라운드
끝나지 않는 전쟁, 자유세계를 위한 싸움
에이치(H). 알(R). 맥매스터 지음, 우진하 옮김 l 교유서가(2022)

푸틴의 요리사라 불리던 예브게니 프리고진이 지난 주말, 무장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접했다.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고전을 거듭하는 와중에 간간이 쿠데타설이 들려왔기에 드디어 올 것이 온 것인가 생각하며 사건 전개를 살폈다. 36시간 만에 커다란 유혈 충돌 없이 사건이 일단락되어 한편으로 안심도 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가슴을 쓸어내릴 수밖에 없었다. 구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 쿠데타 시나리오는 할리우드 액션영화의 단골 메뉴였기에 사건 자체는 낯설지 않았지만, 영화 속 이야기에 불과했던 세계 최대의 핵무장 국가에서 쿠데타가 실제 현실로 일어날 수도 있다는 사실은 모골을 송연하게 만들었다.

쿠데타 소식 이후 국내외 여러 매체를 통해 이번 사건의 의미와 앞으로의 예측이 쏟아지는 가운데 에이치(H). 알(R). 맥매스터의 <배틀그라운드>를 책장에서 뽑아 들었다. 이 책은 21세기 들어 지난 20여 년간 전개되어 온 국제정세와 미국의 국가안보정책에 대한 솔직한 평가를 담고 있다. 저자는 은성무공훈장을 받은 장성이자 오랫동안 전쟁과 군사사 분야를 연구해온 역사학자, 2017년 콜린 파월 이후 30년 만에 현역장성으로는 처음으로 트럼프 행정부에서 국가안보보좌관으로 일했던 인물이다. ‘배틀그라운드’란 제목에 걸맞게 현재는 물론 미래의 언젠가 미국과 갈등을 빚거나 국제분쟁이 일어날 수 있는 러시아, 중국, 남아시아, 중동, 이란, 북한 등을 다루고 있는데, 미국의 고급 관료를 역임한 인사가 쓴 책이기에 당연하게도 미국의 입장과 시각이 진하게 반영되어 있다. 국가안보보좌관으로 일하는 동안 전략적 자아도취에 빠진 트럼프 행정부의 외교정책을 비판하며 여러 차례 각을 세우다가 1년여 만에 ‘트위터 해임’을 당했던 인물답게 상대를 섣불리 타자화하는 대신, 미국의 국가안보와 관련한 주요 외교정책과 상대국가의 현실에 대해 비교적 중립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푸틴 치하의 러시아를 이해하기 위해선 ‘실로비크’(silovik), ‘올리가르히’(Oligarch), ‘상트페테르부르크’란 키워드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러시아어로 ‘강한 사람들’(strongmen)’을 뜻하는 실로비크는 푸틴과 마찬가지로 케이지비(KGB), 군대, 경찰 같은 정보공안기관 출신 인사들을 뜻한다. 언론인 출신으로 훗날 캐나다 외무장관을 역임한 크리스티아 프릴랜드는 푸틴 시대의 러시아가 “케이지비 요원 출신들의 새로운 천국”이 되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푸틴이 대통령에 선출되기 전까지 4%에 불과했던 정부 내 케이지비 요원 비율이 무려 58.3%까지 치솟았다. 이번 쿠데타의 주역이었던 프리고진 역시 푸틴과 같은 고향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의 올리가르히였는데, 이 말은 ‘신흥재벌’이란 뜻이다. 구소련 붕괴 이후 옐친 시대부터 정치권과 긴밀하게 유착하며 성장한 신흥재벌들 가운데 푸틴과 협력하길 거부한 올리가르히는 배임이나 횡령 혐의로 체포되거나 심한 경우 목숨을 잃었다.

푸틴은 이들의 빈자리를 이른바 ‘대통령의 사람들’로 채웠는데, 그들 중 상당수가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이었다. 한때 러시아에서는 이곳 출신이면 글만 읽을 줄 알아도 고위직에 오를 수 있다는 말이 떠돌 정도였다. 지금까지 20년 넘게 러시아를 통치하며 대통령의 사람들로 정재계를 채워 온 푸틴 치하의 러시아를 보면 반체제 지식인이자 인권운동가였던 안드레이 사하로프의 말이 떠오른다. “자국의 국민들조차 존중하지 않는 국가가 어떻게 이웃 국가들을 존중할 수 있겠는가.” 이 말이 어디 러시아에만 해당하겠는가.

전성원 <황해문화>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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