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언니 봐봐, 여기 진한 두 줄”…국내 첫 임신 동성부부
벨기에에서 정자 기증받아 임신…9월 출산
‘대한민국 저출생대책 간담회’ 베이비샤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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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꽤 많이 나왔죠.”
김규진(31)씨가 동그랗게 부른 자신의 배를 만지며 말했다. 배우자 김세연(34)씨가 옆에서 “벌써 임신 8개월이 됐다”고 덧붙였다. 낯설 것 없는 규진씨의 임신이 생경한 건 이들이 ‘와이프’만 두 명인 동성 부부기 때문이다.
4년 전 신혼여행 휴가를 받기 위해 회사에 청첩장을 제출해 주목받았던 규진씨가 정자를 기증받아 임신했다. 논란이 될 걸 알면서도 임신 사실을 공개한 이유에 대해 두 사람은 “아이를 낳는 동성 커플이 존재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국내에서 동성 커플의 임신이 공개된 건 처음이다.
출산을 약 2달 남겨 둔 지난 6월24일, 규진씨와 세연씨의 집에서 이들 부부를 만났다. 두 사람은 2019년 5월 미국 뉴욕에서 혼인신고를 하고, 같은 해 11월 한국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자신을 ‘한국 국적 유부녀 레즈비언’이라고 소개하는 규진씨는 책 〈언니, 나랑 결혼할래요?〉를 쓰기도 했다.
“레즈비언이라고? 아이는 낳을 거지?”
“원래 아이를 가질 생각이 없었어요. 이성애자였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같아요. 좋은 부모 되는 게 쉽지 않잖아요.”
지난해 12월, 규진씨는 벨기에의 한 난임병원에서 기증받은 정자로 인공수정해 임신했다. 임신과 출산을 생각해본 적 없던 그가 임신을 고민하게 된 건, 2021년 프랑스에서 주재원으로 일하면서부터다. “(한국보다) 프랑스인들은 자녀를 키우는 것에 큰 부담을 느끼지 않고, 행복해 보이는 사람이 많았어요. 달리 보였죠.”
이후 프랑스에서 만난 여성 상사가 던진 말은 규진씨가 본격적으로 임신과 출산을 고민하게 했다. “상사에게 ‘난 와이프가 있다’고 말했더니 ‘그렇구나. 근데 애는 낳을 거지?’라고 되묻더라고요. 제가 레즈비언인 것에 놀라지 않았다는 점에서 첫 번째로, 동성 커플에게 출산을 추천한다는 점에서 두 번째로 놀랐어요.”
하지만 임신을 결정하는 데 가장 결정적이었던 건, 그가 현재 행복하다는 것이었다. “불행은 내 대에서 끊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그는 자신이 선택한 가정에서 행복감을 느꼈다. “제가 행복하니, 자녀도 행복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언니가 나보다 더 좋은 엄마가 돼 줄 것 같았어요”라고 세연씨를 가리켰다. 세연씨는 “저는 낳을 자신이 없었는데, 규진이가 낳겠다고 하니 말릴 이유가 없더라고요”라며 크게 웃었다.
애초 규진씨는 자신이 거주하는 프랑스에서 시술을 받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정자를 구할 수 없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정자가 없었다. “병원에 문의했더니 정자가 없대요. 비혼 여성 등에게 시험관 시술을 합법화한 뒤로 정자를 기증받으려는 여성이 늘어서 정자가 동났다는 거예요. 시술받으려면 1년 반은 기다려야 한다더라고요. ‘세상에 정자가 없다고? 대체 뭔 소리지’ 싶었죠.”
프랑스는 2021년 비혼 여성과 동성 커플에게 시험관 시술을 합법화했다. 43살 미만의 여성에게 인공수정, 시험관 시술 등 난임 시술 비용을 국가가 지원한다. 다양한 가족관계를 인정하는 프랑스의 합계출산율은 2020년 기준 1.83명이다. 지난해 한국의 합계출산율 0.78명과 비교된다. “한국 출산율이 0.8명도 안 된다고 하면, 프랑스 사람들이 거짓말하지 말라고 해요”라고 규진씨가 말했다.
한국에서 시술받는 걸 고려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시험관 시술을 받으려고 병원을 찾았다가 번번이 거절당하는 비혼 친구들을 보면서 마음을 접었다. 정자 기증자를 찾는 것도 불가능에 가까웠다. “한국 병원에선 법적부부나 사실혼 이성애 부부에게만 정자를 제공하기 때문에 저는 해당이 안돼요. 개인적으로 기증자를 찾더라도 정자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는 건 불법이에요. 그럼 지인에게 부탁해야 하는데 그것마저 쉽지 않아서 포기했어요.”
그래서 선택한 곳이 벨기에였다. 프랑스와 국경을 맞대고 있어 기차로 몇 시간이면 갈 수 있었다. 프랑스가 비혼여성·동성 커플에게 시험관 시술을 합법화하기 전, 임신을 원하는 프랑스의 비혼 여성 등은 벨기에에서 시술을 받았다.
임신하니 이성애자와 더 가까워진 느낌
벨기에 난임센터에서 겪은 경험은 ‘엄마’로서의 사고를 확장하는 기회가 됐다. 병원에선 정자를 받아 임신을 시도하는 이들과 두 차례 상담하는 필수 과정이 있었다. ‘아이에게 엄마가 두 명이라는 걸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 ‘아이에게 소개해줄 만한 좋은 남성 어른이 주변에 있는지’ ‘(커밍아웃을 받아들이지 못한) 부모님에게 아이를 소개할 생각인지’ ‘자녀가 학교에서 엄마가 두 명이라는 이유로 괴롭힘을 당할까 걱정일 땐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같은 질문과 답을 서로 주고받았다.
“저희는 성인이고 또 선택해서 내린 결정이지만, 아이는 부모를 선택해서 태어난 게 아니니까 걱정은 돼요. 우리가 나서서 미리 아이가 상처받지 않도록 단속해야 하는 건 아닌지 걱정했더니, 상담사가 ‘영원히 아이를 보호할 수 없다’고 하더라고요. 가정이 안전한 곳이라는 걸 아이가 느낄 수 있도록 하고, ‘우리는 서로 사랑해서 너를 원했다’고 아이에게 잘 설명할 생각이에요.“ (규진)
시술을 받은 뒤 임신을 확인하기까지 걸린 2주는 임신테스트기를 ‘낭비’하는 시간이었다. 한 줄인지, 두 줄인지 뚫어지게 들여다보는 ‘매직아이’의 시간이기도 했다. 세연씨가 “병원에서 시술 2주 뒤에 테스트기 하라고 했는데, 거의 매일 하더라고요”라고 눙치자, 규진씨가 “난 하루에 세 번 해보고 싶었던 걸 참았던 거라니까”라며 항변했다. “다리를 달달 떨면서 답답해하던” 시간이 지나고, 연한 두 줄은 진한 두 줄이 됐다. 규진씨는 세연씨에게 “봐봐. 언니 내가 임신 맞댔지!!!”라고 외쳤다.
규진씨가 임신한 뒤 무거운 짐들기, 집안일은 세연씨 담당이 됐다. 세연씨는 ‘임신부 배우자’ 역할을 톡톡히 하기 위해 육아에 대해 잘 모르는 퀴어들 대신 이성애(헤테로) 친구들한테 육아 정보를 묻는다. 세연씨는 “퀴어와 헤테로여서 멀었던 감정이 ‘부모 역할’로 가까워지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여성인데다 의사이니, 와이프의 임신에 대한 이해가 높진 않을까. “전혀 아니더라고요. 제가 겪는 일이 아니다 보니 임신부의 상태는 말을 해줘야 알겠더라고요. 남편들이 왜 헤매는지 이해할 것 같아요”라고 말하며 세연씨가 웃었다. 규진씨는 세연씨가 일하는 병원에서 출산할 예정이다. 덕분에 세연씨의 커밍아웃 횟수도 늘었다. “언니가 중년 상사 놀라게 하는 커밍아웃 중독자가 된 것 같아요”라며 규진씨가 깔깔댔다.
‘남편’만 출입되는 산후조리원, 아내는?
규진씨가 출산한 뒤 입소할 산후조리원은 ‘남편’만 출입할 수 있다. ‘남편’은 없고 ‘아내’만 있는 규진씨는 난감할 터. “조리원에 ‘아내’ 출입이 가능한지 물었을 때 직원이 ‘저는 다양한 라이프 스타일을 존중합니다’라고 하더라고요. ‘라이프 스타일’이라는 표현이 너무 재미있었어요.” (규진)
“정상성의 끝판왕”인 산후조리원 생활은 기대된다. “이른바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정상성의 트랙을 밟아온 이들과 친구가 되는 건 너무 재미있는 경험이 될 것 같아요. 옆에서 살아 숨 쉬는 사람이 소수자라면 외면할 수 없거든요”라고 규진씨가 말했다. ‘동성애는 악마’라고 하던 규진씨의 이모들이, 부모도 참석하지 않은 규진씨의 결혼식에 참석한 것처럼 말이다.
결혼을 탐탁치 않아 했던 규진씨의 아버지는 딸의 임신 소식에 든든한 지원군이 됐다. 레즈비언인 친구들은 ‘사실 나도 아이를 낳고 싶었다’고 속내를 털어놨다. 세연씨는 부모님과 연락하고 있지 않지만, 부모님이 곧 와이프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될 것 같다. 세연씨는 “아버지가 인터넷 기사를 많이 읽어요. 아마 곧 아실 거예요”라고 말했다.
“인생이 TMI(시시콜콜한 것까지 다 공개)”인 규진씨가 8개월 동안 임신을 숨기는 건 쉽지 않았다. 하지만 소비자 마케터답게 가장 화제가 될 수 있는 때를 기다렸다. “저희의 존재를 대중에게 잘 알려야 하니까요.”
이에 규진씨 부부는 7월1일 열리는 제24회 퀴어 퍼레이드에서 임신을 공개할 예정이다. 결혼식 복장을 하고 게이 커플과 함께 명동성당과 시청에서 각각 부케를 던진다. 명동성당은 세연씨가 결혼식을 올리고 싶던 장소였고, 시청은 부부가 혼인신고를 불수리당한 종로구청과 가까워 의미있는 곳이다.
올해 퀴어퍼레이드는 규진씨에게 의미가 남다르다. 서울시가 서울광장 사용을 불허하면서 서울 을지로2가 일대에서 열리기 때문이다. 지방정부까지 가세한 성소수자 혐오에도 규진씨는 낙관적이다. “그래도 퀴어퍼레이드가 중단되지 않고 이어진다는 점에서 희망”을 본다.
최근에 용혜인 기본소득당 의원이 대표발의한 생활동반자법(혈연이나 혼인관계가 아니더라도 함께 돌보며 사는 이들을 가족으로 인정)과 장혜영 정의당 의원이 대표발의한 가족구성권 3법(혼인평등법, 비혼출산지원법, 생활동반자법)도 규진씨 부부를 들뜨게 한다. 희망 속에 분노도 있다. 이를테면 한동훈 법무부장관이 생활동반자법을 두고 동성혼 찬성법이라는 취지로 발언한 것 등이다. “한 장관이 장혜영 의원 발의안은 없는 것처럼 무시하더라고요. 그리고 생활동반자법은 동성혼이랑은 취지가 전혀 달라요. 한 장관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말한 거라면 정말 못됐다고 생각해요.”(규진)
이들은 법적 부부가 아니기에 세연씨는 육아휴직도, 출산휴가도 쓸 수 없다. 유치원이나 학교에서 아이를 하원·하교시킬 때마다 일일이 ‘엄마’라고 신원 확인을 해야 할 수도 있다. 훗날 증여·상속 문제도 있다. 규진씨는 “나중에 내가 잘못됐을 때, 아이의 양육권은 언니한테 바로 갈 수 없어요. 입양 등의 절차를 거쳐야 하죠. 그럴 리 없겠지만, 만약 저희 부모님이 친권을 행사하겠다고 하면 법적 다툼이 생길 수도 있고요”라고 말했다. 규진씨는 생활동반자법과 가족구성권 3법이 통과되길 바란다.
‘대한민국 저출생 대책 간담회’ 베이비샤워
규진씨 부부는 7월 중하순, 임신과 출산을 축하하는 행사인 베이비샤워를 떠들썩하게 연다.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정상성’과 레즈비언의 ‘퀴어함’의 모순과 간극을 담아내는 행사다. 사회자와 출연진들에겐 ‘고 빅 오얼 고 홈(할 거면 제대로 하든지 아니면 하지 말든지)’라는 제목의 PPT를 만들어서 초대장을 보냈다. 장혜영 의원과 가수 이랑 등이 베이비샤워에 참석한다.
베이비샤워의 제목은 ‘대한민국 저출생 대책 간담회’. 저출생 대책의 일환으로 비혼 여성에게 시험관 시술을 하자는 데로 논의가 흐르는 것을 희화화한 제목이다. 한술 더 떠 이날 초대가수 이랑은 ‘좋은 소식 나쁜 소식’이라는 노래를 부른다. 가사 중에 ‘세이프 섹스를 하고 새 생명을 내보내지 말게’라는 내용이 있다. 임신과 출산을 축하하는 베이비 샤워에서 아이를 낳지 말자는 노래는 판을 뒤집는다. ‘축의금 품앗이’인 결혼식을 하기 쉽지 않은 퀴어들을 위해 ‘축의는 금지’다. 베이비샤워 때 사용되는 비용은 부부의 결혼 기사에 악플을 남긴 이들에게 받은 합의금으로 충당한다.
두 사람은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유예기간’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때까지 세상을 바꿔보려고 노력할 계획이다. 만약 아이가 친구들에게 ‘아빠가 없다’며 괴롭힘을 당하면, 이민 가는 것도 고려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한국을 좋아하고, 한국에 희망을 가지고 있어요. 동성혼 대중캠페인도 이렇게 대대적으로 할지는 몰랐거든요.”(규진)
‘아이의 미래가 걱정된다’며 우려를 가장한 독설을 내뱉는 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하나다. “그들의 두손을 잡고 ‘그럼 당신이 도와주면 되겠다’고 말하고 싶어요. 그분들이 도와주면 좋은 사회가 빨리 올 수 있지 않을까요.” (세연)
마지막으로 어떤 엄마가 되고 싶을까. “보호자 임과 동시에 아이를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로 인정하는 엄마가 되고 싶다”고 규진씨가 말하자, 세연씨가 “난 안 될 것 같다. 내 연장된 인격체라고 생각돼서”라며 웃었다.
장수경 기자 flying710@hani.co.kr
한국서 비혼 시험관 시술은 합법이지만…병원에선 번번이 거절
결혼하지 않은 여성이 아이를 낳기 위해 시험관 시술(난자와 정자를 채취해 체외에서 수정시켜 만든 배아를 다시 포궁강 내로 이식하는 방법)을 하는 것은 불법이 아니다. 현행 ‘모자보건법’과 보조생식술(임신을 목적으로 생식과정에 인위적으로 개입하는 의료행위)을 관장하는 ‘생명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생명윤리법) 모두 혼인 여부에 따른 금지 규정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산부인과 의사단체들은 현행법을 이유로 시험관 시술과 같은 보조 생식술을 비혼 여성에게 제공하지 않고 있다.
모순은 모자보건법에서 비롯되고 있다. 이 법은 ‘난임’을 ‘법률혼·사실혼 부부가 1년이 지나도록 임신이 되지 않는 상태’로 규정하고 있는데, 대한산부인과학회가 이 규정을 근거로 시험관 시술은 ‘원칙적으로 부부(사실상의 혼인 관계에 있는 경우를 포함) 관계에서 시행되어야 한다’는 윤리지침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험관 시술 뿐만 아니라, 이 시술에 필요한 정자 기증도 법률혼·사실혼 부부 사이에서만 가능하다.
이같은 지침은 ‘비혼 출산’에 대한 긍정적 인식이 커져지고 있는 사회적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통계청이 지난해 발표한 ‘2022년 사회조사’(13살 이상 가구원 3만6천여명 대상) 결과를 보면, ‘결혼하지 않고도 자녀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이 34.7%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4년 전(30.3%)보다 4.4%포인트 증가한 것이다. 서울시여성가족재단이 2021년 서울시에 거주하는 성인 20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는 응답자의 57.1%가 ‘결혼하지 않고도 자녀를 가질 수 있다’고 답하기도 했다.
장혜영 정의당 의원은 이런 분위기를 반영해 지난달 혼인 여부에 관계 없이 시험관 시술과 같은 출산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담은 모자보건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현행 모자보건법 속에 담긴 난임의 정의 규정을 삭제하고, 임신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보조생식술을 지원하도록 하는 것이 핵심이다. 또한 ‘난임 극복’과 같이 난임을 비정상적인 것, 극복해야 하는 것으로 표현한 문구를 삭제했다.
오세진 기자 5sj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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