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를 정체성으로 인정하라”…어떻게 가능할까 [책&생각]

최원형 2023. 6. 30.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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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과 의사의 철학적 탐구
‘매드 프라이드’의 사회적 수용 문제
정신과 의사인 지은이 모하메드 아부엘레일 라셰드는 인정을 요구하는 정체성으로서 ‘매드’(Mad)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게티이미지뱅크

미쳤다는 것은 정체성이 될 수 있을까?
광기와 인정에 대한 철학적 탐구
모하메드 아부엘레일 라셰드 지음, 송승연·유기훈 옮김 l 오월의봄 l 2만9000원

‘매드(Mad)운동’은 사회에 의해 “미쳤다”고 규정되는 사람들이 펼치고 있는 급진적인 당사자주의 운동이다. 흑인·장애·성소수자 민권운동으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으며, 무엇보다 자신들의 정체성을 인정해 달라는 요구를 통해 기존의 사회규범을 의문시하고 변화시키려 한다는 점에서 이들 당사자운동들은 비슷한 지향점을 공유한다. ‘게이 프라이드’, ‘블랙 프라이드’처럼 매드운동 당사자들 역시 ‘정신장애차별주의’에서 비롯한 억압과 낙인, 부당한 대우 등 공유된 경험에서 출발해, 광기는 치료해야 할 질환이 아니라 인정받아야 할 정체성이라 주장하며 나름의 ‘매드 정체성’을 형성하려 시도한다. 1993년 캐나다에서 전세계 최초로 ‘매드 프라이드 데이’ 행사가 열렸고, 이는 2019년부터 국내에서도 열리고 있다.

가장 최근 본격화한 당사자주의 운동으로서 매드운동에는 넘어야 할 산들이 많다. “미쳤다는 것이 정체성이 될 수 있느냐”는 질문은 그중 가장 핵심적이다. 미쳤다는 것, 곧 광기가 어떤 정체성을 형성하는 근거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면 우리 사회는 이를 ‘인정’의 대상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광기를 의료적인 치료와 돌봄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현재의 사회규범을 변화시키기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정신과 의사 모하메드 아부엘레일 라셰드는 자신의 저작 <미쳤다는 것은 정체성이 될 수 있을가?>에서 이 핵심적인 질문을 철학적 탐구의 방식으로 차근차근 풀어나간다.

광기는 예전부터 기피 대상으로 여겨졌으며, 근대에 들어선 이를 치료해야 할 질환으로 여기는 의료적 모델이 주류로 자리잡았다. 1960년대 후반 흑인·여성·성소수자·장애인이 중심이 된 민권운동의 영향 아래 ‘정신장애인’ 당사자들 역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 거대한 흐름은 크게 “‘인정’을 향한 투쟁”이라 아우를 수 있는데, 지은이는 게오르크 헤겔, 악셀 호네트, 찰스 테일러 등의 논의를 통해 ‘인정’의 의미를 철학적으로 톺아본다. “자유로운 행위 주체가 된다는 것은 자유로운 행위 주체로 인정받는 것을 의미하며, 이를 위해서는 그 인정이 내가 자유로운 행위 주체라고 인정한 사람들에게서 비롯되어야 한다.” 이 같은 ‘상호인정’의 한가운데에 ‘나는 누구인가’, 곧 정체성의 문제가 있다.

인정에는 크게 세 가지 형태가 있다. 자신의 고유성에 기대어 중요한 사람들과 주고받는 인정(사랑), 시민사회 내 보편적 존재로서 동등하게 주고받는 인정(권리), 자신이 속한 특수한 가치공동체를 기반으로 주고받는 인정(연대) 등이다. 이른바 정신장애운동의 여러 갈래 중에선 광기를 질병으로 보는 의료적 모델을 거부하지 않으면서도 강제치료에 저항하고 동등한 ‘권리’를 요구하는 운동이 있다. 반면 매드운동은 ‘연대’와 더 크게 관련되며, 광기가 다뤄지는 상징적이고 문화적인 공간 전체를 변화시키려 한다는 점에서 독보적인 운동이다. 광기를 정체성으로 인정받음으로써 기존 사회규범에 사로잡힌 관점 자체를 변화시키고, ‘진정한’ 수준에서 “자유로운 행위 주체”가 되겠다는 전략이다. 자기형성의 근거인 정체성은 본질적이지 않지만 사회적으로 주어진 범주에 끊임없이 영향을 받는다. 예컨대 인종이란 개념은 모호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떤 사회에 존재하는 백인, 흑인 같은 정체성을 없앨 순 없다. 곧 “정체성은 자기정의와 이에 대한 수용 사이에 놓인 복잡하고 논쟁적인 투쟁의 장소”다.

지난 2019년 10월26일 한국에서 처음 열린 ‘매드 프라이드’ 행사를 준비하고 있는 조직위원회 회원들의 모습. 김명진 기자 littlprince@hani.co.kr
2019년 10월 한국에서 처음 열린 제1회 ‘매드 프라이드’ 현장. 7월14일로 지정된 국제 매드 프라이드 데이는 하루에서 일주일가량 지속되는 축제로 여러 나라에서 개최된 바 있다. 영상화면 갈무리. 조소영 피디

이 때문에 광기를 정체성으로 인정하라는 요구는 사회적 수용성을 따져보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지은이는 “매드 프라이드 담론을 의심할 여지 없이 타당한 것이나 일종의 도덕적 의무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지양하고, 그 대신 광기를 정체성으로 인정할 수 있는 경로를 세세하게 가려나간다. 광기를 정체성으로 인정하는 데에서 제기되는 가장 큰 문제점은, 미쳤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정체성 형성 능력을 손상시키는 요인으로 간주된다는 점이다. “매드 정체성은 정체성 형성 능력을 손상시키는 것으로 보이는 바로 그 정신적 현상들을 자신들의 정체성을 주장할 수 있는 동등한 가치를 지닌 근거로 주장”하는 모순에 빠진다. 인정을 요구할 수 있는 정체성은 “실패한 정체성이 아닌 논쟁의 여지가 있는 정체성”이어야 하며, “분열과 단절 없이 통합된 정신의 표현”이어야 하고, “충분한 기간에 걸쳐 지속되어야 한다.” 자신이 영국 여왕이라 믿거나 다른 사람이 듣지 못하는 목소리를 듣는 등의 망상 증상은 자기 인식의 실패로, 주체의 소유권과 저자성의 분리를 경험하는 조현병·양극성 장애 등은 통합되고 연속된 자아의 실패로 여겨진다. 이럴진대 과연 광기를 정체성으로 인정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지은이는 “광기를 인정의 범위 안으로 포섭하기 위해 손상을 극복하고 광기를 정돈(ordering)”하는 길을 제시한다. 정체성으로서의 광기는 포기하지 않으면서, 그것을 사회적으로 승인될 수 있는 문화적 레퍼토리(서사)로 새롭게 가다듬고 자리매김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매드 프라이드 운동의 선구 단체 가운데 하나인 ‘이카루스 프로젝트’에서 제시한 ‘위험한 선물’ 개념은 이 같은 ‘매드 서사’의 대표적인 사례로 들 수 있다. 이들은 광기가 당사자에게 정신적 고난을 안겨주지만, 어떤 특별함도 함께 안겨주는 ‘양날의 검’이라 본다. 예컨대 다른 사람들이 듣지 못하는 목소리를 듣는 것은 자아의 ‘분열’이 아니라 자아의 풍요로운 ‘증축’이 될 수 있다. 이처럼 매드 당사자들이 정돈해낸 주관적 서사들은 타인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공유하고 발전시키는 사회적 서사로 충분히 자리매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책 전체에서 지은이가 근본적으로 집중하는 테마는 ‘화해’다. “정치적 개혁과 상호적 화해는 정당한 인정 요구에 대한 두 가지 가능한 대응”이다. 그러나 도덕적 의무와 사회정의의 언어를 쓰는 정치적 개혁과 달리, “삶의 구체적 맥락 속에서 이뤄지는 상호적 조정”인 화해는 가장 깊은 수준에서 우리를 움직일 수 있다. 그리고 화해로 나아가는 길은 오직 ‘대화’로부터 시작한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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