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16~18세 여성 맞나… 새 춘향 영정 또 논란
전북 남원시가 친일 논란 끝에 새로운 ‘춘향 영정’을 제작했지만, 남원시의회는 물론 지역 시민 단체까지 나서 새로 만든 춘향 영정을 교체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남원시는 기존 춘향 영정을 친일 작가 김은호(1892~1979) 화백이 그렸다는 이유로 3년 전 새 영정을 제작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최근 새 영정이 나오자 지역에선 “도저히 10대라고 보기 어려운 춘향이 그려졌다”며 반발하고 있는 것이다.
남원시의회 자치행정위원회는 29일 “새로운 춘향 영정이 18세기 16∼18세의 춘향과는 동떨어진 모습이라는 여론이 많다”며 “작가와 협의해 새로 그려야 한다”고 밝혔다.
앞서 남원시는 가로 94㎝, 세로 173㎝ 크기의 새로운 춘향 영정을 제작했다. 예산 1억7000만원이 투입됐다. 김현철 화백이 지난 1월부터 제작해 지난달 완성한 것이다. 영정 속 춘향은 머리에 절개를 상징하는 대나무 뿌리 모양 죽절비녀를 꽂고 금봉채(金鳳釵·봉황의 모양을 새겨 만든 금비녀)로 장식한 낭자 머리를 하고 있다.
당시 젊은 여인이 즐겨 입은 다홍치마와 연두색 저고리도 영정에 반영됐다. 춘향의 인물상을 묘사하기 위해 복식 전문가의 고증과 조언을 거쳤다고 한다. 김현철 화백은 “경남 진주에서 생산한 비단을 사용하고 물감은 자연에서 채취한 염료와 석채(돌가루)를 주 안료로 사용해 전통 채색 화법으로 영정을 완성했다”고 했다.
이 영정은 지난달 25일 남원 광한루원 춘향사당에 봉안되면서 일반에 공개됐다. 남원시는 춘향전을 토대로 고증을 거쳐 당시 춘향의 모습을 최대한 반영했다고 설명했지만, 시민과 관광객 사이에선 춘향의 모습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반응이 나온다.
남원 지역 시민·사회 단체 15곳이 참여한 남원시민사회연석회의는 성명서를 내고 “새 영정은 춘향의 덕성이나 기품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는 것이 중론”이라며 “젊은 춘향의 곱고 순수한 자태가 드러나는 것도 아니고, 목숨을 바쳐 지켜내고자 했던 곧은 지조가 드러나는 것도 아니다”라고 했다. 연석회의는 “화가는 17세의 젊고 아리따운 춘향을 표현하려고 했다지만 전혀 의도를 실현하지 못했다”며 “그림 속 춘향은 도저히 10대라고 보기 어려운 나이 든 여성이다”라고 했다.
연석회의는 춘향제 기간인 지난달 25일부터 27일까지 시민과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최초 춘향 영정과 새 영정의 선호도 조사’를 실시했다. 참여자들이 선호하는 영정에 스티커를 부착하는 방식으로 진행했는데, 최초 춘향 영정이 1313표를 받았지만, 새로 그린 영정은 113표에 그쳤다. 연석회의는 “새 영정보다 최초 춘향 영정을 선호한 점을 보면 새 영정이 시민들의 마음을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이에 대해 남원시 관계자는 “춘향 영정에 대한 논란이 당분간 이어질 것 같다”며 “여러 의견을 경청하고 있고, 시간을 가지고 고민하면서 입장을 정리하겠다”고 했다.
한편 남원시는 김은호 화백이 그린 춘향 영정을 지난 2020년 10월 철거했다. 그의 친일 행적을 문제 삼아 내린 결정이었다. 김은호 화백은 1937년 총독부 ‘조선미전’에서 조선인 첫 ‘심사 참여 작가’로 위촉되면서 친일 논란이 생겼다. 국방 기금 마련을 위한 작품전에 심사위원 등으로 참여하고 귀족·관료 부인들이 금비녀를 모아 군(軍)에 헌납하는 장면을 그렸다는 이유로 친일반민족행위자에 이름을 올렸다.
김 화백에게 친일 논란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1919년 3·1운동 때 ‘독립신문’을 배포하다가 체포돼 징역 6개월을 선고받기도 했다. 김 화백은 순종을 그린 조선 마지막 어진(御眞) 화가로 논개, 신사임당, 이율곡, 안중근도 그렸다. 김기창·이유태 등은 그에게 그림을 배워 한국 화단을 이어갔다. 전북 지역의 한 작가는 “‘흑백 잣대’로 근현대사 인물들을 재단하다 보면 수많은 딜레마에 빠진다”며 “김은호 화백이 그린 춘향이 친일 논란이 일기는 했지만 작품성에 대해 의심받아 본 적은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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