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 [147] 적을 동지로 만든 외교관
1932~1942년에 주일 미국 대사로 재임한 조셉 그루(Joseph C. Grew)는 가장 유명한 직업 외교관으로 통한다. 10년이라는 재임 기간도 이례적이지만, 그의 존재감이 더욱 특별한 것은 그가 적지인 도쿄에서 태평양전쟁 개전을 맞이한 대사였기 때문이다. 그의 재임 기간에는 전시 억류 6개월이 포함되어 있다. 만주사변에서 태평양전쟁에 이르기까지 격동의 미일 관계를 그보다 더 현장에서 생생하게 경험한 사람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이 군국주의로 내달리던 시기에 보내야 했던 그의 도쿄 생활은 딜레마의 연속이었다. 일본의 모험적 행동에 제동을 거는 미국의 단호한 태도를 전해야 하는 부담과, 상황 악화를 막기 위해 본국을 설득해야 하는 이중고를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이 개입 수위를 높일수록 대미 강경 세력이 득세하는 도쿄 분위기와, 대결 국면을 마다 않는 워싱턴의 태도에 낙담하면서도 그는 파국을 막고자 외교관으로서 소임에 진력했다.
그루가 직업 외교관으로서 가장 안타깝게 생각한 것은 미완(未完)의 미일 정상회담이다. 1941년 가을 고노에 총리는 대미 관계 개선책을 포함해 루스벨트 대통령과 회담하는 방안을 그루에게 제안한다. 그루는 필사적인 심정이 되어 회담 수락을 건의했으나 워싱턴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전쟁을 막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한 그는 이때의 회담 무산을 두고두고 아쉬워했다.
전쟁 막바지에 국무차관에 취임한 그는 천황제 존속을 포함한 전후 대일 점령 정책 설계에 깊숙이 관여했다. 오랜 현장 경험에서 나온 그의 확신과 비전이 전후 새로운 일본의 탄생과 미일 관계의 극적 회복에 미친 영향은 결코 작지 않다. 어제의 적을 내일의 동지로 만들려는 그루의 외교적 신념이 새로운 미일 관계의 초석이 됐다고도 할 수 있다. 그루는 전쟁과 같은 극단적 상황에서도 이후의 일을 생각해야만 하는 것이 외교의 숙명임을 행동으로 보여준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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