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시대와의 교감, 새로운 상상력의 올바름
미국 영화, 할리우드 영화라면 늘 상업성이 먼저 떠오른다. 매년 5~6월이면 마블산 블록버스터들이 수많은 관객을 끌어들인다. 그런데 원작이 된 만화는 이미 100살에 가깝다. 그러다 보니 오래된 상상을 자본과 기술로 우려먹는, 고갈될 공장처럼 여기게 되는 것이다. 크게 틀린 건 아니다. <아이언맨> 이후 전 세계 관객들의 사랑을 받아왔지만 <어벤져스: 엔드 게임> 이후 마블 블록버스터의 새로운 시도에 대해 대중의 반응은 싸늘하다.
이제 더 이상 미국식 대중문화 돌려막기가 안 통하나 보다 싶었을 때, 바로 이 애니메이션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가 출현했다. 2018년 바야흐로 마블, 디즈니라는 블랙홀로 거의 모든 코믹스 슈퍼 히어로물이 흡수되던 시절이었다. 마블, 디즈니의 팬들은 이 블랙홀에 유독 스파이더맨이 빠진 걸 아쉬워하기도 했다.
하지만 돌아보면 따로 떨어져 있던 게 다행이다. 독점과 획일화보다 문화에 위험한 건 없다. 문화만큼은 다양성과 이질적 충돌이 필요한, 말 그대로 다원적 민주주의의 공간이다. 이질성이 새로운 감수성의 씨앗임을 보여준 게 바로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였다.
2018년 이후 5년 만에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 그러니까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 후속작이 개봉했다.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에는 6개의 다중우주가 등장한다. 지금 우리가 사는 것과 비슷한 뉴욕, 수채화풍의 다른 우주 속 뉴욕, 흑백의 세계, 스톱 애니메이션 세계, 레고 세계 등. 사실 이건 이미 만화 <스파이더맨>에 존재했던 세계들의 재현이기도 하다.
<스파이더맨> 애니메이션 연작을 보다 보면, <스파이더맨>은 원래 ‘만화’였음을 절절히 확인하게 된다. 만화적 상상력은 무엇인가? 개연성이나 핍진성을 내재화할 수 있는 상상력의 망명 공간이 바로 만화이다. 실사 연기의 공백을 CG로 채워 마치 관객과 약속하듯 눈감아주는 다중우주세계가 아니라 애니메이션은 그 자체로 다중우주의 실현이다.
어느덧 영화가 산업적 발달과 기술적 발명, 대중적 소비 현상과 더불어 주류 문화가 되었다면 만화는 여전히 비주류 정서와 엉뚱한 상상력이 주를 이루는 B급 문화 공간이다. 문제적인 건 만화 소재 실사 영화가 주류 대중문화를 차지하면서, 비주류나 반골 정서와 결별하고 미국식 문화의 중심으로 나섰다는 사실이다. 서부 영화나 멜로드라마 영화에서나 보던 미국제일주의, 가족중심주의, 기독교적 선민의식이 만화 원작 영화에서도 주제부를 이루기 시작한 것이다.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의 주인공은 미국의 다양성을 구성하는 이민자 3세대 청소년이다. 푸에르토리코계인 마일스 모랄레스는 백인 주인공 일색이던 피터 파커류의 스파이더맨과는 차별화된다. 물론 만화 원작부터 <배트맨> <슈퍼맨>과 달리 서민적 캐릭터였다고 하지만 언제나 스파이더맨은 1960년대 뉴욕에 거주하는, 서민층 백인 청소년이었다.
하지만 마일스는 힙합 음악을 듣고, 조던 운동화에 애착하며, 이민자 가족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잔소리로 듣는다. 마일스는 스파이더맨이긴 하지만 피터 파커의 아류가 아니라 2000년대의 인물이다. 단지 젊은 피터 파커로 교체하는 게 아니라 스파이더맨의 정체성을 2000년대식으로 갱신하는 것, 새로움은 그 시대성 속에서 발견되고 구현될 수 있다. 새로움이란 곧 동시대와의 소통임을 <스파이더맨> 애니메이션이 보여준 것이다.
새로운 우주 속 스파이더맨은 인종, 성별, 언어, 문화, 심지어 돼지나 고양이, 공룡처럼 다른 종으로, 레고 블록 전사로도 등장한다. 잘생긴 백인 남성이 늘 조율해왔던 다중우주 운영권이라는 게 얼마나 고답적이었는지 다시 깨닫게 해준다.
이는 디즈니가 요즘 애먹고 있는 정치적 일방통행 방식에 대한 나름의 조언이 될 법하다. 계몽적 프로파간다로 정치적 올바름을 강조한다고 해서, 설득되는 건 아니다. 북유럽 출신 작가 안데르센의 <인어공주>를 굳이 유색인으로 바꾼다고 해서, 정치적 교정이 성취되는 건 아니다. 1989년 디즈니가 <인어공주> 원작의 비극적 결말을 해피엔딩으로 바꾸는 순간, 애당초 안데르센의 정서와 주제는 휘발됐다. 인종 교체라는 쉬운 방법보다 우리 시대와 정서를 반영하는, 우리 곁의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새롭게 만들어내는 것, 그게 바로 새로움이며 정치적 올바름이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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