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난장] 대통령의 ‘전천후 전문가론’

유일선 한국해양대 국제무역경제학부 교수 2023. 6. 30.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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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 바탕 교육·노동 등 개혁, 이견엔 감사와 수사로 해결
타협·상대 존중 정치 사라져…尹 한마디에 사회 전반 출렁
유일선 한국해양대 국제무역경제학부 교수

인간이 처음 배운 언어는 ‘엄마’다. 이상한(?) 여자가 자신을 안고 젖을 물리며 환한 미소로 하는 말 ‘엄마’, 아이는 수천 번 옹알이 끝에 드디어 엄마라고 소리 낸다. 아이는 무엇을 배웠을까? 엄마라는 소리 발성법을, 또한 엄마라는 언어의 쓰임새를 배운 것이다. 엄마라는 의미(개념)는 모르지만 오직 이 여자만을 엄마라고 인식하고 엄마라고 부른다. 자기 경험으로 인지할 수 있는 ‘엄마’는 이 세상에 오직 한 명이다. 아이는 성장하면서 지적훈련을 통해 엄마의 개념을 학습한다. 엄마를 ‘결혼해서 자녀가 있는 여자’로 개념화해 보자. 아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 첫째, 인식의 지평이 확대된다. ‘결혼해서 자녀가 있는 여자’는 누군가의 엄마라고 인식한다. 그러면 이 지구상에서 수십억 엄마의 존재를 알게 된다. 둘째, 개념은 또 다른 개념의 출발점이다. ‘결혼하지 않고 자녀를 가진 여자’는 ‘엄마’가 아닌가, 이런 문제제기는 또 다른 엄마의 개념을 창출할 수 있다.

인간은 개념이 없는 상태에서 오직 자신의 본능, 습관과 경험을 통해 사물을 인식하고 행동할 수밖에 없다. 한 인간이 경험칙으로 인식할 수 있는 범주는 어느 정도 될까? 인간의 육체적 한계를 인정한다면 자신이 인식한 세상은 극히 협애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지적 훈련을 통해 개념을 학습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논리적 추론 과정을 거쳐 또 다른 개념을 창출하고 결합하면 경험 밖의 현실과 세계를 인식할 수 있다. 나아가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세상을 재설계·재조직해 모두 공존할 수 있는 새 질서를 창출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때 역사는 진보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개념은 포용적이고 윤리적이어야 한다.

만약 권력자가 개념에 무지하거나 자신의 이익에 따라 의도적으로 개념의 범주를 축소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1990년대 세계화의 파고가 전 세계를 휩쓸 때 한국정부는 선진국클럽이라 불리는 OECD에 가입했다. 하나회 척결, 금융실명제 실시 등 다년간 정치적 경험을 통해 다져진 정치적 감각에 따른 판단을 자신했던 당시 김영삼 대통령이 세계화의 개념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정치적 이익을 위해 내린 의사결정이었다. 이것이 한국 외환위기로 귀결돼 얼마나 많은 고통과 희생을 겪었는지 우리는 안다. 또한 국정에 대한 명확한 개념 없이 “내가 해봐서 아는데”란 건설회사 사장의 경험으로 국정을 운영했던 이명박 전 대통령의 국정운영의 참담한 결과를 우리는 기억한다. 개념을 어떤 의도를 가지고 협소하게 해석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사랑의 종교, 모든 인간은 신 앞에 평등하다는 기독교가 19세기 이후 제국주의 시절, 왜 그 많은 인디언을 학살하고 아프리카 흑인을 납치해 대서양 너머로 끌고 가 노예로 삼아 착취했을까? 히틀러는 왜 그 많은 유대인을 학살했을까? 경제적 정치적 이익만을 위해 그 많은 사람이 학살과 착취에 가담했을까? 기독교를 믿는 백인의 인간 개념 범주에서 인디언, 아프리카 흑인, 유대인을 제거했기 때문에 학살하고 착취해도 거리낄 이유가 없었다.

지난 4월 ‘대전환포럼’에서 진행한 설문조사가 공개됐다. 현 정부 출범 1주년을 맞아 대학교수, 국책연구기관 연구원, 시민사회단체 인사와 정당 보좌진 등 국가정책에 관여하는 262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의 국정철학의 핵심 키워드로 ‘무개념’이 꼽혔다. 최근 ‘수능 발언’ 사태에서 “윤 대통령이 검사시절 입시 관련 수사를 한 경험이 있다. 저도 전문가이지만 정말 많이 배운다”는 이주호 교육부 장관의 언급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이명박 전 대통령 집권시절의 국정운영이 부활한 것처럼 보인다. 윤 대통령은 ‘검사전문가’의 경험으로 국정을 운영하는 것만 다를 뿐이다. “윤 대통령이 조국 일가 수사를 지휘했으니 교육전문가”라는 박대출 국민의힘 정책위의장의 언급이 이를 입증하고 있지 않은가?


윤 대통령은 이런 ‘전천후 전문가론’으로 국정을 쉽게 보고 거침없이 운영할 것이다. 국가의 모든 현안을 자신에게 익숙한 수사의 관점에서 바라보니 크게 숙고할 일도 없다. 따라서 다른 전문가의 조언을 경청할 필요가 없다. 교육개혁에 반대하면 ‘이권카르텔’ 수사로, 노동개혁에 반대하면 민주노총과 건설노조 수사로, 반대하는 공무원은 감사원 감사를 동원해 면직하거나 수사로 해결하면 된다. 감세 정책으로 인한 재정적자와 중국과의 무역수지 적자가 쌓여도 전 정권의 책임으로 돌리면 된다. 국정에 대한 개념이 없으니 범죄 혐의로 의심되는 야당 대표와 만나 국정에 대해 논의할 필요도 없다. 정치는 사라져도 행정만 있으면 되니까. 5세 취학 논란, 주69시간제 논란, 이태원 참사에 대한 무책임 등에 대해 ‘전천후 전문가’의 의견을 국민이 오해한 것뿐이다. 앞으로도 개념 없는 대통령 말 한마디에 정부 부처, 정치권, 언론 등 모든 분야가 출렁거릴 것이다. 우리가 민주주의 국민이라면 주인으로서 책무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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