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세 신인의 한민족 대서사…‘괴물’이 나왔다
- 하기주 전 코오롱 대표 첫 소설
- 일제강점기 고향 마산 배경 대작
- 유림·아나키즘·강제이주 삶 등
- 세밀함·통찰력은 작품성 드높여
작가 하기주(84)의 장편소설 ‘목숨’(전3권)은 한순간도 구체성과 집중력을 잃지 않는다. 특히 구체성을 놓고 본다면, (좋은 의미에서) 이런 ‘괴물’ 같은 소설이 대체 어떻게 탄생할 수 있었는지 거듭 경탄하면서 책장을 자꾸 넘기게 된다. ‘목숨’은 드물고 빼어난 역작이다. ‘목숨’ 세 권은 1939년생 하기주 작가의 첫 소설이다. 놀라운 84세 신인 작가의 탄생이다.
잠시 소설 속 몇 장면으로 들어가 보자. 때는 1940년대, 일제강점기 말기다. 공간은 경남 마산이 중심이되, 러시아 만주 일본 등지를 넘나든다. 마산의 양반 강세준 가문에서 제사를 지낸다. 그 장면은 혀를 내두를 정도로 세밀하다. 이 집안에서 혼례를 치른다. 그 장면은 혀를 내두를 만큼 세심하다. 지극히 높은 구체성에서만 머무르지 않는다. 왜 그렇게 하는지, 거기 담긴 ‘정신성’과 철학은 무엇인지 장면 장면 녹아들어가 있다.
제사에서 왜 하필 그 과일을 그 자리에 놓아야 하는지. 그때는 왜 제수를 데워서 올려야 하는지. 조선 유림의 정신세계를 감싼 음양오행은 어떻게 그 과정에 들어가 있는지. 혼례에서 어떤 옷을, 왜, 어떻게 입어야 했는지. 그 혼례절차는 왜 꼭 지켜야 했는지. 궁금하다면, 이 책을 보시라. 마산의 뱃사람 신태산이 가난한 어부에서 건실한 어물상으로 성장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의 어로 방식과 어촌생활이 필연으로 들어가야 한다. ‘목숨’은 그런 장면도 거의 복원 수준으로 그려낸다.
강세준의 방계 일가에 속한 젊은이 최규는 일제강점기에도 여전했던 적서 차별에 시달리지만, 시대 변화가 가져다준 기회에 힘입어 일본에 유학을 다녀온다. 세상을 바꾸고 싶은 그는 당시 조선 사회를 휩쓴 사회주의·공산주의에 물들고 뒤에는 아나키즘을 만나 그 세계로 아예 가버릴지 고민도 한다. 마산에서 견디기 힘들었던 최규는 곽상수라는 괄괄한 고향 후배와 함께 연해주·만주로 간다.
그 장면을 그리면서 작가는 연해주 한민족 동포의 중앙아시아 강제이주 역사를 깊은 안목으로 상세히 설명하고 이쪽으로 진출한 한민족 동포의 농업 상황을 들려준다. 최규가 쫓겨 러시아 볼셰비키 치하에서 벌목공으로 일하는 장면이 나온다. 작가는 당시 벌목공의 삶과 작업 과정을 또 상세하게 그려낸다. 대작가 박경리 선생의 ‘토지’에서 용이가 벌목공으로 일하던 장면에서도 이토록 실감 나게 그들의 삶을 담지는 않은 듯하다. 그 연장선에서 강세준의 아들 강청수가 질산나트륨으로 폭탄을 만들어 일제의 군용 열차를 처치하는 장면도 실감 난다.
한국 전통 음식문화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도 이 작품을 꼭 한 번 보십사 권한다. 가난 탓에 동래권번에서 배우고 마산 행림옥에서 기생으로 살아가는 한 여성이 당시 남해안 일대 어장을 지배했던 일본인 부호에게 시달리는 대목에서는 우리 전통 풍류 세계를 다룬다. 대문호 나림 이병주 작가가 평생 짐처럼 짊어졌던 일제강점기 조선인 학도병 이야기도 담았다.
이토록 세밀·세심한 구체성의 세계가 다 재미있지는 않다. 제례나 혼례 장면을 ‘복원’ 수준으로 설명하는 대목에서 젊은 독자는 기가 질리거나 힘들거나 지겨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런 장면을 뚫고 나오면, 비로소 이 작품의 주제의식이 서서히 드러난다. 하기주 작가는 ‘목숨’에서 수탈과 탄압이 극에 달한 일제강점기 말기 조선 백성의 상황과 지향, 모두가 독립을 원하며 군국주의 일제를 미워하고 저항했으되 계층·처지·인식에 따라 달랐던 대응방식을 생생하고 담담하게 풀어낸다. 민족사를 담은 것이다.
강세준이 그저 고리타분한 보수파·복고주의자 유림 같지만, 안 그렇다. 일제의 마수는 강세준 가문에도 뻗쳐온다. 그때 강세준은 높은 ‘정신성’을 결연하게 내보인다. 유학·유교가 마냥 시대착오에 그친 꽉 막힌 옛날 사상 같지만 광폭한 군국주의 일제에 맞설 높은 정신성을 길러낸 또 하나의 근거지였음을 작가는 말한다. 아나키즘·사회주의·공산주의에 관해서도 작가는 섣부른 판단을 하지 않고 ‘그 시대의 눈’으로 바라보려 한다.
누구 하나 딱 떨어지는 주인공은 아니지만 알고 보면 등장하는 모든 민중이 주인공인, 큰 작가 권정생의 명작 장편소설 ‘한티재하늘’이 생각났다. 사상과 정신의 세계를 튼실히 부여잡으면서도 백성의 삶부터 들판의 풀꽃까지 담은 한민족의 걸작, 박경리 선생의 ‘토지’도 생각났다. 우리 전통과 역사를 생생하게 되살린 대작으로 평가받는 최명희 작가의 ‘혼불’도 떠올랐다.
작가 하기주는 경남 마산에서 태어나 성호초등·마산서중을 나와 마산고(17회)를 졸업하고 서울대 상대 경제학과에 진학해 ㈜코오롱 대표이사(1989~1995)까지 지냈다고 한다. 은퇴한 뒤, 청소년 시절부터 품었던 작가의 꿈을 이루고자 ‘목숨’ 집필에 전념했다. ‘목숨’의 구체성은 구체성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 속에 작가의 삶이 담겼다. 그 구체성은 주제의식을 펼쳐나가는 과정에서 제구실을 충실히 한다. 서정성 넘치는 명쾌한 문장도 수시로 넘실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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