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범죄자 극단선택 못 막은 죄, 美법무부까지 ‘엡스타인 심판대’

뉴욕/정시행 특파원 2023. 6. 29. 2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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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무부 감찰관실, 4년만에 보고서
“피해자들 정의 추구할 기회 박탈”
교도관 4명 추가기소 권고
미 헤지펀드 매니저 출신 억만장자인 제프리 엡스타인이 지난 2008년 처음 아동 성매매 혐의로 기소될 당시 플로리다 법정에 출석한 모습. 그는 공식 아동 성범죄자로 등록돼있었으나 정계와 재계 문화계와 학계 등 미 국내외 유명 인사들과 친분을 쌓아 영향력을 확대했고, 10대 소녀 수백~수천 명을 성 노예로 삼다가 2019년 기소됐다. 수감 36일 만에 자살했다. /AP 연합뉴스

미성년자 125명을 상대로 성범죄를 저질렀다 수감된 뒤 2019년 8월 스스로 목숨을 끊은 억만장자 헤지펀드 매니저 제프리 엡스타인에 대한 미국 사회의 거침없는 단죄가 그치지 않고 있다. 앞서 그와 연루됐던 미국 최대 은행 JP모건체이스가 지난 12일(현지 시각) 사건 피해자들에게 2억9000만달러(약 3741억원)를 지급하기로 한 데 이어 이번에는 그의 극단적 선택을 방치한 허술한 교도소 관리 실태가 드러난 연방 법무부의 자체 조사 보고서가 나왔다. 법무부 감찰관실(OIG)은 27일(현지 시각) 엡스타인이 수감돼있을 당시 뉴욕 맨해튼 연방교도소의 기강 해이와 불법 행위에 대한 조사 결과를 다룬 128쪽짜리 보고서를 공개하고, 교도관 4명을 재판에 넘길 것을 권고했다. 수감자 관리 의무를 게을리해 중범죄자의 자살을 막지 못한 것도 ‘범죄’로 보고 형사 책임을 지기로 한 것이다.

엡스타인은 2019년 7월 기소돼 맨해튼 교도소에 수감됐다. 재판에서 최장 징역 45년을 선고받을 것이라는 관측이 유력했다. 수감 당시 66세였던 그가 111살이 되어서야 출옥할 수 있다는 얘기였다. 이를 비관한 엡스타인은 죗값을 치르는 대신 수감 36일 만에 극단적 선택을 했다. 이런 일이 한국에서 벌어졌으면 사건은 공소권 없음으로 신속하게 종결되면서 대중들의 뇌리에서 잊혔을 공산이 크다. 하지만 미 법무부는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4년간 조사를 벌였다.

제프리 엡스타인이 2019년 아동 성범죄와 인신매매 돈세탁 등으로 기소된 뒤 수감됐던 뉴욕 맨해튼 소재 연방 메트로폴리탄 교정센터 외관. 엡스타인은 이곳에 수감 된 지 36일 만인 8월 10일 숨진 채 발견됐다. 법무부 등은 그의 성 접대를 받은 유명 인사들에 의한 타살설 음모론 등을 일축하고 그는 자살한 것이 확실하다고 밝혔다. /로이터 연합뉴스

보고서에 따르면 엡스타인의 이상 징후는 진작에 나타났다. 수감 뒤 16일째인 7월 23일 새벽 1시 27분쯤 극단적 선택을 시도했지만 당시 동료 수감자 신고로 가까스로 막았다. 당시 엡스타인을 진찰한 정신과 의사는 “절대 혼자 두지 말고 실시간 감시와 30분 단위 관찰 보고를 할 필요가 있다”고 경고했다.

그럼에도 별다른 조치가 없었고 위험 징후는 더욱 뚜렷해졌다. 8월 8일 변호인을 통해 유언장을 새로 써서 서명했고, 교도관에겐 침대 시트를 더 넣어달라고 부탁했다. 다음 날 오전 같은 방을 쓰던 동료가 다른 교도소로 이감되면서 엡스타인은 혼자 남아 방치됐다. 그날 저녁 엡스타인은 “엄마에게 전화하게 해달라”고 부탁했는데 교도관은 통화를 허용했으면서도 어떤 말이 오갔는지 파악도 하지 않았다. 엡스타인이 통화하겠다던 ’엄마’는 사실은 15년 전 사망했으며 이날 통화 상대는 여자 친구였다. 그가 마지막으로 극단 선택 계획을 털어놓았을 가능성이 있는 상대다. 엡스타인은 8월 10일 새벽 아침 식사 시간 침대 모서리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OIG는 그와 한방을 썼던 동료 수감자를 별도로 조사해서 그가 ‘자살 위험군’이었음에도 교도소 측이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점과 수감자 관리 실태가 실제 규정과 한참 동떨어졌던 점도 밝혀냈다. 엡스타인과 수감 생활을 같이 한 한 재소자는 “그가 빨랫줄을 만지작거리길래 빼앗아 변기에 버렸다”고 OIG에 진술했다. 다른 재소자는 “엡스타인이 통상 다른 수감자들은 받지 못하는 이불 2개를 추가로 받고 허용되지 않는 펜도 2개 받았다” “바닥에서 자는 것은 일반적으로 허용되지 않는데 엡스타인은 가능했다”고 말했다.

OIG는 이처럼 교도소 내의 어느 누구도 이상 징후를 포착하지 못한 것은 중대한 기강 해이인 동시에 범죄로 결론내렸다. OIG가 드러낸 당시 근무 실태는 엉망진창이었다. 기결수·미결수 등이 수감된 방 안팎의 방범 카메라는 모두 고장 나 있었다. 극단적 선택을 하는지, 수감자들 간에 폭력 사태가 벌어지지 않는지 등을 세밀히 감시해야 하는 카메라가 먹통이었다는 얘기다. 인력 부족 탓에 규정을 어겨 24시간 연속 근무를 하고 있던 한 교도관은 잠을 잤고, 다른 한 명은 밤새 온라인 쇼핑을 했다. 이들은 30분 간격으로 엡스타인 상태를 살폈다는 접속 기록을 모두 ‘완료’로 허위 기재해 징계를 피하려 한 사실도 드러났다. 이 같은 정황이 드러나면서 교도관 두 명은 이미 파면돼 기소됐는데, OIG는 이에 더해 교도관 4명의 추가 기소를 권고했다.

미 연방법무부의 독립 감찰기구인 감찰관실(OIG)의 마이클 호로비츠 감찰관이 지난 2월 미 하원의회에 출석해 증언하는 모습. 미 정부 부처 감찰관은 한국 부처 장관들이 임명하는 감사관과 달리, 대통령이 직접 지명해 상원 인준을 받는 막강한 자리로 독립적 활동을 보장받는다. 호로비츠는 27일 120쪽 분량 '엡스타인 자살 보고서'를 내면서, 범죄자의 자살을 막지 못한 법무부 최대 부서인 교정국 전반의 기강 해이와 업무 태만을 낱낱이 고발했다. /로이터 연합뉴스

OIG는 80여 개에 달하는 정부 주요 부처마다 설치돼있는 독립적 감찰 기구다. 일부 정부 부처의 감찰관은 독립성을 보장하기 위해 대통령이 임명하고 상원의회 인준까지 받는다. 이번 보고서에서 교도관 이름은 실명으로 공개됐으며, 엡스타인이 실제 수감됐던 교도소 내부와 독방의 사진도 여러 장 포함됐다. 마이클 호로비츠 법무부 감찰관은 보고서를 발표하면서 “(교정 당국의) 태만과 위법 행위, 그리고 명백한 업무 능력의 실패가 엡스타인이 극단 선택을 할 수 있는 충분한 환경을 만들어줬으며, (엡스타인의 타살 등) 음모론을 횡행하게 만들고, 피해자들이 그가 심판대에 서는 것을 목격하고 정의를 추구할 기회를 빼앗았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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