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홍수로 일터 못 나간 남성이 아내에 폭력을 쏟아냈다"
[김효진 기자(hjkim@pressian.com)]
세계 곳곳이 이른 더위로 신음하고 있는 가운데 기온 상승이 친밀한 관계에 있는 여성에 대한 폭력을 증가시킨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28일(현지시각) 미국의학협회 정신의학 저널(JAMA Psychiatry)에 게재된 남아시아에 위치한 중·저소득 3개국에서 여성에 대한 친밀한 관계에서의 폭력(IPV·intimate partner violence)과 주변 기온 간의 관계를 밝힌 연구에 따르면 연평균 기온이 1도 상승하면 해당 폭력이 4.5%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IPV란 현재 또는 과거의 부부 또는 연인, 파트너 관계에서 발생하는 폭력을 의미하는 개념으로 성폭력, 신체적 폭력, 정서적 폭력을 포괄한다.
연구자들은 2010~2018년까지 인도, 파키스탄, 네팔의 15살~49살 여성 19만 4871명의 폭력 경험과 기후 변화와의 연관성을 분석해 이 같은 결론을 도출했다. 연구자들은 이번 연구가 "지구 기후 온난화의 맥락에서 중·저소득 국가 내 친밀한 관계에서의 폭력을 경험하는 여성의 취약성과 불평등을 조명했다"며 연구 결과가 "높은 기온이 여성에 대한 친밀한 관계에서의 폭력 위험과 관련될 수 있다는 증거를 제시한다"고 설명했다.
연구는 또 향후 기후 변화 경로에 따라 이번 세기 말까지 친밀한 관계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이 얼마나 증가할지 예측했다. 연구는 2021년 유엔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 6차 제1 실무그룹 보고서가 제시한 5가지 기후 변화 시나리오 예시 중 최악의 상황으로 흘러갈 경우 해당 폭력이 이번 세기 말 21%나 증가할 것으로 봤다.
해당 IPCC 보고서는 2050년께 탄소중립(net zero)을 달성하는 가장 낙관적인 시나리오부터 오히려 배출량이 2배로 상승하는 가장 비관적인 시나리오까지 5가지 예시를 제시하고 가장 낙관적인 경로에서만 지구 평균 기온이 산업화 이전 시기(1850~1900년)보다 1.5도 이내로 상승할 것으로 내다봤다. 제시된 최악의 시나리오는 2050년 탄소 배출량이 2배로 증가해 세기 말 기온 상승폭이 4.4도에 이르는 것이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폭염으로 인해 경작을 망치고 기반시설이 붕괴되며 경제가 잠식되고 외출이 어려워 일을 할 수 없게 되는 상황이 가족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안기고 폭력 발생 가능성을 높인다고 설명했다. 연구자들은 기온 상승과 관련된 폭력 증가는 모든 소득 집단에서 증가했지만 특히 저소득층과 농촌 가구에서 증가폭이 컸다고 지적했다.
이번 연구의 공동 저자인 미셸 벨 미 예일대 환경 건강학 교수는 "높은 기온이 폭력 위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회적이고 생리적인 여러 잠재적 경로가 있다"고 설명했다.
인도 여성운동가 수니티 가르기는 <가디언>에 기후 위기가 가정 폭력 증가와 관련이 있다고 확신한다며 "비정상적으로 높은 기온이 점점 흔해지고 있다. 이는 가정에 엄청난 경제적 스트레스를 유발한다. 남성이 일자리를 얻지 못하면 그의 아내는 남편의 좌절과 분노를 받아내게 된다"고 말했다. 한 여성은 가르기에게 폭염이 닥치는 5~6월이 되면 남편이 밭에서 일할 수 없게 돼 가족을 부양할 수입을 얻을 수 없다는 좌절감을 핑계로 아내에게 화풀이를 하고 자녀를 때리는 행동을 반복한다고 토로했다.
인도 북동부 비하르주에 기반을 둔 젠더 폭력 반대 단체 부미카 비하르의 책임자 실피 싱도 기후 위기가 전통적인 성별 불평등을 악화시켰다고 <가디언>에 말했다. 그는 시골에선 "상황이 좋을 때도 아내를 때리는 것이 일상"이지만 기후 위기가 상황을 악화시키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여성들은 폭염이나 홍수가 없어 남성들이 대부분의 시간을 밖에서 보내면 상황이 더 나아진다고 말한다"며 극단적 기후로 남성이 집에 머물게 되면 가족을 부양하지 못한다는 분노를 가정 내에 표출한다고 덧붙였다.
기후 위기가 여성에 대한 폭력을 증가시킨다는 연구는 수차례 제시돼 왔다. 2021년 케냐를 대상으로 한 연구에선 폭염을 포함한 극단적 기후 현상을 경험한 지역에서 그렇지 않은 지역보다 친밀한 관계에서의 폭력이 보고될 확률이 60% 더 높았다.
해당 연구는 "케냐 여성들이 기후 변화의 비용을 부담하고 있다"며 국민 대다수가 농업으로 주된 소득을 얻는 케냐에서 기후 변화가 농업에 미치는 악영향이 가정 폭력 증가로 이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2018년 스페인에서 실시된 연구에선 폭염이 여성이 남성 파트너로부터 살해당할 위험을 40%나 증가시킨다는 결과도 나왔다.
<가디언>은 많은 나라들이 폭염 관련 질환 사망자 수는 집계하지만 기온 상승과 연계된 가정 폭력과 이로 인한 여성들의 죽음에 대해선 주목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벨 교수는 이 같은 상황으로 인해 "기후 변화가 공중 보건에 미치는 영향이 과소평가 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짚었다.
[김효진 기자(hjkim@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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