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기자생활] 품격 있는 언어와 책임정치
[슬기로운 기자생활]
이우연 | 정치팀 기자
국회 출입기자의 하루는 오전 9시 전후 열리는 당 회의와 함께 시작된다. 회의 전 아침 라디오에 출연한 정치인들의 발언을 살펴보며 기삿감을 찾기도 하지만, 매주 세차례 열리는 최고위원회의(최고위)의 무게감은 남다르다. 당 대표와 원내대표, 최고위원 등 당 서열 1~3위가 당무를 의결하는 중요한 자리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30여명 기자가 회의 때마다 이들의 발언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받아 적기 위해 귀를 세우곤 한다.
출입처인 민주당에선 요즘 최고위 위상이 예전만 못하다는 지적이 들려온다. 무게감 있는 발언은 사라지고, 상대 당에 대한 말장난과 조롱만 넘쳐난다는 것이다. 지난 몇달 최고위에서 나온 발언들을 돌이켜 보면, 틀린 지적은 아닌 듯하다. 이재명 대표부터 윤석열 정부의 외교를 비판하며 ‘빵셔틀 외교’, ‘호갱 외교’라는 표현을 거침없이 사용한다. 최고위원들은 땅 투기 의혹을 받는 상대 당 김기현 대표를 향해 너도나도 “김기현 땅 대표”라고 칭한다. 그 밖에도 “변두리 깡패 정권”, “국제 바보”, “국제 왕따”…. 거친 언어를 내내 듣다 보면 비판 내용에 귀를 기울이기도 전에 피로해진다. 이러다 보니 기자들 사이에선 “최고위 발언을 기사에 인용하는 것조차 민망하다” “귀를 씻고 싶다”는 노골적인 푸념도 나온다.
최고위가 무게감을 잃은 건 출입기자들에게뿐만이 아니다. 한 민주당 최고위원의 보좌관조차 “봉숭아 학당 같은 모습에 한숨이 나와서 최고위를 보지 않는다”고 말할 지경이다. 당내 다양한 의견들이 오가던 민주적 장으로서의 모습이 사라졌다는 비판도 있다. 과거 최고위는 각 계파의 대리전이 열리는 장이어서 치열한 당내 토론이 이뤄졌는데, 이마저 찾아보기 힘들어졌다는 지적이다. 당직을 맡은 경험이 있는 한 민주당 의원은 “야당 최고위원은 상대 당을 정확하게 비판해야 할 공격수인데, 요즘 최고위를 보면 최고위원이 꼭 (강성 당원의) 치어리더 같다”고 했다.
정확하게 비판하되 품격 있는 언어가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요란한 퍼포먼스다. 최고위원들은 공격할 대상을 우스꽝스럽게 보이도록 편집한 영상을 반복해 재생하고, 시도 때도 없이 손팻말을 들어 올린다. 이들의 퍼포먼스와 거친 언어들은 비장한 배경음악이 깔린 영상으로 편집돼 유튜브 세계를 떠돌아다닌다. 코로나가 심해진 2020년 2월 최고위가 유튜브에서 실시간 중계되기 시작하자 최고위의 질이 급격히 낮아졌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아니나 다를까, 상대 당을 향한 최고위원의 말이 험해질수록 유튜브 댓글 창에는 “사이다”라는 극찬이 쏟아진다. 반면 정중한 어투를 쓰는 참석자에게는 “너도 엄중이냐” “수박(겉은 파란 민주당, 속은 빨간 국민의힘)이냐”라는 댓글이 달린다.
물론 야당 최고위원이 쓰러진 모습을 재현하며 “기절 쇼를 했다”고 주장하는 여당 최고위원을 보니, 이런 현상에는 여야가 따로 없는 듯하다. 지도부 출범 두달 만에 막말 논란으로 최고위원에서 내려온 이가 2명이니 도긴개긴인 셈이다. 여야 청년 최고위원이라는 이들이 “윤 대통령의 화동 뽀뽀는 성적 학대”, “머리에 온통 포르노나 성적 학대 같은 생각밖에 없냐. 욕구불만이냐”는 말을 주고받는 것을 실시간으로 보노라면 ‘이러려고 기자가 됐나’ 자괴감이 들기도 한다.
그럼에도 더 진보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야당 지도부의 말은 여당과 차별화됐으면 한다. 정부·여당이 놓치고 있거나 잘못 가는 방향은 정확하게 지적하되 대안 세력으로서 책임 있는 대안을 차분하게 제시하는 것이 야당의 언어 아닐까.
“좋은 말이 좋은 정치를 낳고 사나운 말이 사나운 정치를 낳는다. 국회의원의 말이 사나워지면 지지자들의 말은 더 사나워진다. 정치인과 지지자들의 말이 혐오스러워지면 사회 또한 적대와 증오로 분열되기 마련이다.” 정치학자 박상훈이 <정치적 말의 힘>에 쓴 말이다. 어휘가 날카롭다고 주장이 날카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공허한 말장난이 아닌 알맹이가 가득 찬 말로 아침을 시작하고 싶다.
aza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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