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이 삼촌’ 현기영 “‘네가 뭘 했다고 벗어나’···4·3 영령들이 꿈에 나타났다”
“3만은 숫자가 아닌 하늘이 낸 생명”
다큐멘터리 프로덕션 감독 임창근과 PD 안영미 부부가 4·3 사건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러 제주로 간다. 안영미의 할아버지 안창세의 증언을 들으려 한다. 안창세의 가족은 4·3 때 죽었다. 자신은 모진 고문 후유증을 앓는다. “평생 그 사건에 영혼이 붙들린 채 남몰래 그것과 혈투”를 벌여왔다. “그놈들이 자꾸 꿈에 나타나 총검으로 가슴팍을 팍팍 찌르는” 악몽도 꾼다.
안창세는 안영미·임창근 부부의 설득에 입을 연다. 열흘 동안 1943~1948년 열한 살부터 열여섯 살이 되는 사이 제주 조천리에서 벌어진 비극을 들려준다. 현기영 신작 <제주도우다>(창비, 전 3권)는 해방공간에서 “통일국가를 꿈꾸며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격렬하게 활동”했으나 “국가폭력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거의 절반이 목숨을 잃어야 했던 제주도 청년들”에 관한 회고담이다.
현기영은 ‘작가의 말’에서 “그 당시 청년들을 사로잡았던 열정의 정체는 무엇이고, 어떻게 그들이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휩쓸려 들어갔는지, 삶과 죽음은 무엇이고 인간은 또 무엇인지를 이 소설에서 탐구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제주도우다>는 1978년 <순이 삼촌>으로 시작한 현기영 4·3 소설의 집대성이자 마무리 성격의 작품이다. 현기영은 애초 <순이 삼촌> 등 중단편 세 편을 발표한 뒤 “이거면 이제 됐다”며 그만 쓰려 했다. 고문당하는 악몽을 꾼 뒤 다시 펜을 잡았다. 현기영은 29일 서울 창비서교빌딩에서 연 기자회견 중 이 ‘악몽’에 관한 이야기를 전했다.
“(소설을) 해보자 했는데 그게 안 돼요. 내 마음과 몸이 갈등이 있었던 거겠죠. 밤에 악몽을 두 번이나 꿨는데, 내가 (<순이 삼촌> 발표 뒤) 보안사에서 당했던 그런 식의 고통스러운 고문을 당하는 거예요. 그런데 고문하는 주체가 누구냐? 4·3 영령이에요. 영령이 나를 불러서 ‘네가 뭘 했다고 4·3에서 벗어나려고 그러느냐’면서요.”
현기영은 “4·3의 3만 영령들에게 공물을 만들어 바쳤고, 할 일을 다 한 것 같다”고 말했다.
4·3은 악몽 같은 현실이었다. 소설은 대수난과 대학살의 참혹함을 묘사한다. “각양각색의 살인 행위들이 벌어졌는데 차마 끔찍해서 그대로 묘사할 수가 없더라. 완화했다”고 했다.
이 작품은 역사소설인가? 현기영은 “4·3은 대한민국 공식 역사에서 배제돼 있다. 4·3 얘기를 쓴 게 어떻게 역사소설이 되는가”라고 되물었다. 소설에 등장하는 크고 작은 사건 대부분은 실제로 벌어진 일들이다. 직접 취재한 내용, 청취록 같은 문헌에 바탕을 두고 썼다. 현기영은 신문 기사, 격문, 구호, 노동요와 유행가, 저항가 가사 등 여러 글 형식을 빌려 ‘폭력의 기록’을 재현한다.
현기영은 희생자 3만명이 단지 통계 숫자가 아니라고도 했다. “한 명 한 명이 하늘이 내려주신 생명인데, 국가가 그 국민을 대량으로 학살해서 파괴해 버린다면, 그 국가가 무엇이냐고 얘기할 수 있는 거 아니겠어요?” 현기영은 3만명의 인명 피해, 3만명의 개개인을 강조했다. “그 죽은 개개인을 다시 살려내는 거예요. 그들에게 피를 부여하고 뼈를 부여하고 한숨과 눈물을 부여하고 살을 부여해서 그 당시 현장, 사건의 진상이 드러나는 거예요. 역사가 쓰는 기술하고 전혀 다른 겁니다. 소설을 통해서 역사의 진상에 접근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소설엔 로맨스도 나온다. 현기영은 전략적으로 배치한 게 아니라 실제 삶을 반영한 것이라고 한다. “(해방공간에서) 새 나라를 세우려는 그 열정과 열광을 고스란히 탐구해 넣고요. 연애하는 젊은이, 사랑하는 젊은이도 (넣었어요). 그 젊은이들 삶이 그랬으니까 그렇게 세팅한 거죠. (소설엔) 즐거움도 있고, 기쁨도 있고, 낭만도 있고요.”
책 제목 ‘제주도우다’는 ‘제주도다’ ‘제주도입니다’라는 뜻이다. 소설 중 “우리는 북조선도, 남조선도 아니고 제주도다!”라는 대사가 나온다. “삼팔선이 그어진 직후에 일본에서 귀향민이 들어올 때 맥아더 사령부가 물었주, 남과 북 중에 어느 쪽으로 가겠느냐고. 그때 우리 제주 백성들은 이렇게 대답했주”에 붙은 말이다.
‘제주도우다’는 소설 속에 나오는 제주 전설과 설화, 역사,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현기영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소설을 쓰며 가장 고민한 게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렇게 말했다. “내가 사랑했던, 내가 정을 줬던, 문학을 지망하는 등장인물들, 서로 사랑하고 순수한 (모든 게 잘되고, 새 국가를 우리가 만들면 잘될 것이라는 낙관주의를 지녔던) 젊은이들이 1948년 다 죽습니다. (소설가로서 등장인물들을) 죽일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죠. 가슴이 참 아팠고요.”
현기영은 청년들 죽음에도 낙관주의를 잃지 않은 듯했다. 현기영은 책 앞에 “어떠한 비극, 어떠한 절망 속에서도 인생은 아름답고, 살 만한 가치가 있다는 확신이 필요합니다”라고 썼다.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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