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속도로 건설의 의외 효과, ‘강남 투기 바람’ 일으켜

서울앤 2023. 6. 29.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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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을 변화시킨 10대 사건 ⑦ 1968년 경부고속도로 착공과 강남 땅값 폭등 ‘말죽거리 신화’

[서울&]

1966년 ‘첫 삽’ 한남대교는 전쟁 대비용

초기엔 언론 언급조차 많이 없었지만

68년 경부고속도로 착공과 맞물리며

투기 세력이 강남에 눈 돌리는 ‘촉매’ 돼

고속도 재원 마련 위해 구획정리 시도

말죽거리 일대에 복부인 들끓기 시작

정부도 대선자금 위해 수십만 평 구매

정권이 불붙인 ‘투기 신화’ 이후 쭉 확대

제3한강교(현 한남대교)는 1966년 1월 착공됐을 때만 해도 언론에서 언급조차 되지 않았을 정도로 관심거리가 아니었다. 본래의 건설 목적은 전쟁 대비였다.

6·25전쟁이 일어난 1950년을 기준으로 할 때 한강 다리는 제1한강교와 광진교뿐이었다. 그 후 1965년 1월25일 제2한강교(현 양화대교)가 건설됐지만 이는 전시 군사용이었다. 이에 따라 제2한강교는 평시에도 서울 남부에서 문산 등 서부전선으로 이동하는 군작전 차량과 군장비 이동이 우선순위였다. 따라서 민간인이 이용할 수 있는 다리는 여전히 2개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어서 건설된 제3한강교도 강남 개발이 목적이 아니라 유사시 서울시민 도강용으로 만들어졌다.

그런데 제3한강교가 착공된 지 1년 뒤인 1967년 대통령선거 유세 때 당시 민주공화당의 박정희 후보는 그때까지 국민에게 생소했던 ‘고속도로’ 건설을 제시했다. 고속도로 건설은 박정희가 서독 방문 때 히틀러가 건설한 아우토반에 매력을 느끼며 나온 공약이라는 평가가 있다. 실제로 당시 고속도로 건설 공약은 서울시와 건설부 등 관련 기관과 전혀 논의하지 않은 독단적 결정이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국도나 지방도의 정비부터 선행해야 한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중론이었고, 우리나라처럼 국토가 좁고 산이 많으며 인구밀도가 높은 나라는 자동차가 주된 교통수단이 되는 게 적합하지 않다는 의견이 많았다. 자동차보다 대량으로 수송할 수 있는 교통수단인 철도가 적합하다는 것이 교통학의 정설이다. 일본 등 외국의 사례 역시 그랬다.

한남대교: 본래 강남 개발이 아닌 군사적 목적으로 개발했지만 결과적으로 강남 부동산 개발(말죽거리 신화)의 일등공신이 된 일명 ‘제3한강교’.

당시 정부는 고속도로 건설이 지방의 발전을 추동해 균형발전을 가져올 것이라고 선전했다. 하지만 도시 간 시간 거리가 가까워지면 그때까지 중소도시가 담당했던 많은 기능이 대도시에 흡수돼 중소도시들은 이른바 공중분해 현상을 일으켜 쇠퇴해버린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전후 모든 것이 서울로 집중되던 시기에 고속도로 건설은 서울 중심화를 더욱 가속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1967년 대선에서 이긴 박정희 정권은 고속도로 건설을 밀어붙였다. 당시 군 출신들은 대개 도로사업에 가장 큰 힘을 기울였다. 이것이 가장 뚜렷하게 표가 날 뿐만 아니라 가장 오랫동안 남는 업적이기 때문이다. 군사정권인 박정희 정부의 군 출신 행정가들 대부분이 그러했다. 여기에 당시 1차 5개년 계획으로 울산공업단지가 완성됐고, 이후 포항제철이 건설을 통해 영남 경제권의 확장에 대비하여 이것을 연결하는 것도 필요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경부고속도로는 1968년 2월1일 착공식을 했다. 하지만 같은 시기 서울시의 여의도 윤중제 공사로 예산이 부족했던 상황에서 서울시장 김현옥은 ‘죽을 맛’이었다.

이런 때 고속도로 건설비를 마련해야 하다보니 서울시로서는 가장 적은 예산으로 가능한 방식을 선택하게 됐다. 도로에 편입될 토지를 수용하고 그 값을 지급하는 방식이 아니라 구획정리사업을 통해 거기서 나오는 체비지를 판매하는 방식을 택했다.

광진교: 제3한강교 건설 전까지 전쟁이 일어나면 유일하게 민간인이 이용할 수 있었던 다리였다.

이에 따라 경부고속도로가 관통하는 서초구 일대의 구획정리사업이 실시됐고, 이를 통해 그 주변에 ‘영동지구개발’이란 이름으로 주택지가 개발됐다. 그때까지만 해도 지금의 서초구 일대는 영등포구에 속했기 때문에 ‘영등포의 동쪽’이란 의미로 ‘영동지구’라 불렸다.

이런 상황에서 1969년 크리스마스 다음날 제3한강교가 준공되고 그 몇 개월 뒤인 1970년 7월7일 경부고속도로가 완공됐다. 이처럼 제3한강교와 경부고속도로는 강남 개발과 무관하게 시작된 사업이지만 박정희 당시 대통령조차 예상 못한 부동산 바람을 일으키게 된다.

현재 양재역 일대를 지칭했던 말죽거리란 옛 지명은 말에게 죽을 먹이고 사람도 여장을 푸는 곳이라 하여 이름 지어진 곳이다. 옛사람들은 지방에서 오는 경우에는 다음날 한양에 들어가기 위해서, 그리고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는 선비는 압구정에서 주연을 벌인 뒤 다음날 천 리 길을 출발할 때 바로 이곳에서 말도 사람도 준비했다. 하지만 경부고속도로 건설 여파로 이제 이곳에는 말 대신 ‘복부인’들이 들끓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한강변의 신사동이나 압구정동의 경우 장마 때면 침수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강남의 땅값 상승은 바로 토지구획정리를 했던 이 일대로부터 시작됐다. 이 때문에 강남의 부동산 바람을 ‘말죽거리 신화’라고 부른다. 사실 그 전까지만 해도 엄밀한 의미의 토지 투기란 우리나라에 없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영동시장: 강남 개발 초기 강남은 자기 이름도 갖지 못한 채 ‘영등포의 동쪽’이란 의미로 ‘영동지구’라 불렸고, 그 흔적은 영동시장, 영동대교, 영동고교 등 아직도 곳곳에 남아 있다.

이러한 변화에 복부인들은 정말 민감하고 발 빠르게 움직였지만, 그래봤자 그들이 사는 땅은 1인당 수백 평에 불과했다. 그와는 비교할 수 없는 진짜 거대한 투기꾼은 뒤에 존재했다.

제3한강교가 개통되자마자 권력층에서는 당시 서울시도시계획국장 윤진우를 헬기에 태워 강남을 선회하며 발전 가능성이 제일 큰 곳을 찾으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헬기에서 내린 뒤 당시 청와대 경호실장 박종규의 집으로 그를 데려갔다고 한다. 여기서 윤진우는 ‘탄천을 경계로 그 서부 지역 일대’를 지적했고, 그 뒤에는 민간사업자로 위장한 채 가명을 쓰면서 그 일대 땅을 본격적으로 매입하기 시작했다. 그 목적은 이듬해인 1971년 4월27일 치러질 제7대 대통령선거와 같은 해 5월25일 치러지는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 필요한 정치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고는 바로 이어 상공부는 산하기관이 들어갈 10만 평의 땅을 공개적으로 물색하면서 ‘정부기관 이전’이라는 뉴스가 잇따랐다. 이 소식은 이 지역 땅값을 상승시켰고 이에 윤진우는 그동안 매입한 23만7천 평을 모두 팔아 그것으로 얻은 차액은 정치권으로 흘러 들어갔다고 한다.

참고로 이때 상공부가 매입한 땅이 삼성역 일대였으며 그 일부에 한국전력이 이전해 들어갔다. 그러나 한전 부지의 약 2배 되는 나머지 땅(삼성역과 봉은사역 사이 인터컨티넨탈호텔과 코엑스몰 부지)은 다시 민간에 팔아 막대한 이익을 취했다.

말죽거리: 말에게 죽을 먹이며 쉬어가는 곳이었던 ‘말죽거리’는 1970년대 복부인들이 들끓던 곳으로 말죽거리 신화를 탄생시켰다.

이렇게 시작된 ‘말죽거리 신화’는 그 후 정권의 검은손은 빠졌지만, 1970년대 중반 또다시 거세게 일어났다. 당시 서울 인구의 폭증, 특히 강북으로의 집중이 크게 문제 되자 박정희 대통령은 1975년 연두 순시 때 강북 인구의 강남 이주를 적극 추진할 것을 명령했다. 이로써 강북에는 더는 호텔, 백화점, 술집 등 인구집중을 유발할 수 있는 것에 대한 허가를 금했을 뿐만 아니라 아예 택지개발 자체도 못하게 했다.

반면 강남에는 영동아파트지구 개발계획을 발표하고 경기고를 필두로 이른바 4대문 안에 있는 고등학교들을 강남으로 이전시켰다. 이뿐만 아니라 고속버스터미널도 강남으로 이전시켰고, 이를 위해 부족한 예산 속에서 일단 급한 대로 가장 저렴한 방식으로 한강 다리를 놓았다. 1975년 9월 착공해 이듬해 7월15일 완공된 이 다리가 바로 잠수교다.

1970년대 초 정권에 의해 부동산투기가 조장된 이후, 이렇게 1970년대 후반 또다시 강남 일대는 부동산투기의 장으로 변했다. 이후 석유 파동과 정부의 강력한 부동산거래규제법 등으로 주춤하기도 했지만 ‘말죽거리 신화’는 끊임없이 이어지며 지금의 강남 시대를 창출했고 서울을 양극화시키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글·사진 유영호 <서촌을 걷는다> <한양도성 걸어서 한바퀴> 저자

그림 김경래 기자 kkim@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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