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순욱의 술기행](98) “순창 고추장만큼 순창 지란지교 술도 유명해요.”
순창서 난 멥쌀, 찹쌀, 자가누룩을 원료로 약 200일 걸려 술 빚어
2016년 명주대상 최고상 수상, 직접 기른 무화과 넣은 무화과 탁주 대박 나
자연침지법으로 빚은 약주는 원재료에서 우러나는 향과 풍미가 살아있어
우리에겐 고추장으로 잘 알려진 전북 순창에는 또 하나의 명물이 있다. 순창에서 생산되는 원재료를 활용해 빚은 고급 전통주 ‘지란지교’가 그 주인공이다. 발효와 숙성을 합해 100일 동안 빚은 후에, 90일의 추가숙성을 거쳐 완성되는 지란지교는 은은한 단맛과 신맛이 잘 어우러진다는 평가가 많다. 국내 대표적 전통주 대회의 하나인 대한민국명주대상 2016년 대회에서 최고상을 받았을 정도로 품질은 진작에 인정받은 술이다. 그뿐 아니다. 순창군에서 고향사랑기부제(개인이 고향에 기부하면 답례품과 세액공제를 받는 제도로, 답례품은 기부금액의 30% 수준이다) 답례품으로 지란지교 술을 선정했을 정도로 이미 순창을 대표하는 특산품으로 자리잡았다.
지란지교 술은 순창으로 귀농한 임숙주, 김수산나 부부가 마음과 정성을 다해 빚은 고급 전통주다. 지하 791m 천연암반수, 품질 좋은 순창의 멥쌀과 찹쌀, 옛부터 평양의 술 도가에서도 가져다 썼다는 순창의 전통누룩으로 술을 빚었다.
지란지교 술은 탁주, 약주 구분없이 단맛과 신맛, 쓴맛, 떫은맛과 향까지 오감을 자극하는 술로 유명하다. 첫 모금에는 쌀의 단맛이 느껴지다가, 바로 이어 누룩의 산미(신맛), 그리고 알코올의 쓴맛이 뒤따른다. 멜론, 사과향이 느껴지는데 특히, 농익은 사과향을 얘기하는 이들이 많다.
지란지교 술을 만드는 농업회사법인 (유)친구들의술 임숙주 대표가, 양조장을 찾아간 기자를 처음 안내한 곳은 발효실이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꼴인가? 술항아리들이 죄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질 않은가? 임숙주 대표가 겸연쩍게 웃으며 하는 말씀이 이웃집 아저씨같이 푸근하다. “사실 보여주고 싶지 않은 공간입니다. 소위 과학 하신 분들은 ‘제발 이것(발효 중인 술항아리를 이불로 감싸는 것) 좀 치워라’고들 하시죠. 술 발효는 온도 유지가 가장 중요합니다. 그런데 문을 여닫을 때마다 바깥 공기가 오가니, 온도에 예민한 술 속의 미생물 활동에 좋을 리가 없지요. 온도 변화를 주지 않으려고 이불로 감싸는 건데, 보기는 좀 그렇죠. 허허.”
이곳 발효실 온도는 24~27도 안팎으로 유지된다고 한다. 지란지교 술은 이양주다. 멥쌀 죽으로 밑술을 만들고, 찹쌀 고두밥을 덧술로 쓴다. 그래서 발효는 7~10일 정도면 끝난다. 발효란 곡물의 전분이, 당분으로, 다시 알코올로 바뀌는 공정을 말한다. 그러나, 임 대표는 “발효가 끝났다는 것은 알코올이 만들어졌다는 것뿐이지, 사실 술의 향과 맛을 결정하는 것은 오랜 기간 저온에서 진행되는 숙성”이라고 말했다. 지란지교 술은 발효 10일, 숙성 90일을 거쳐 단맛과 신맛, 쓴맛, 떫은맛까지 조화를 이룬 술이 완성된다. 아니, 아직 미완성이다. 지란지교 양조장은 발효실, 숙성실, 그 다음에 보관실이 따로 있다. 100일 걸려 발효와 숙성을 거친 술들은 다시 영하 0도 안팎의 보관실에서 거의 80~100일을 더 보낸 후에야 술병에 담겨진다.
지란지교의 근간이 되는 술은 순창 백일주다. ‘100일’이라는 긴 시간을 발효와 숙성에 보낼 정도로 지극정성으로 빚어야 완성되는 술이 순창 백일주다. 그런데 지란지교는 한술 더뜬다. 발효 10일을 포함해 100일 동안 숙성을 하고 나서도 곧바로 술병에 담지 않고 90~100일간 더 추가숙성을 한 다음에야 병입을 한다. 다시 말해, 100일이 아닌 거의 200일이 걸리는 술이 지란지교다. 제자가 스승보다 뛰어나다는 ‘청출어람’이 아닐 수 없다. 그만큼 숙성에 공을 들인 술이 지란지교다.
30년간 공무원으로 일하다 퇴직한 임숙주 대표가 고향인 순창에 귀농한 것은 2013년이다. 술을 빚으려고 귀농한 것이 아니라, 무화과 과수원을 하기 위해서였다. 지금도 무화과를 재배하고 있고, 직접 키운 무화과를 아낌없이 넣어 만든 술이 2021년에 내놓은 ‘지란지교 무화과 탁주’다.
그에게 술 빚기는 우연이었다. 아니, 인연이었다. 술을 시작한 계기를 그의 육성으로 들어보자. “무화과 농사를 지으면서 우리 부부 마시려고 집에서 틈틈이 소량으로 술을 만들어봤어요. 어린 시절, 어머님이 명절 때 빚던 술이 생각나서죠. 하지만,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셨고, ‘술을 빚을 때 차가운 곳에 오래 둬야 한다’는 말씀은 기억나 발효가 끝난 술을 곧바로 마시지 않고, 오랫동안 숙성을 시켰습니다. 거의 석달 동안 숙성을 한 다음에 술맛을 보니, 기가 막히게 좋지 뭡니까. 좋은 술은 나눠 마셔야 더 맛있죠. 그래서 이웃과 친구들에게도 맛을 보게 했더니, ‘이런 술은 대회에 출품시켜야 돼’라고 하길래 별 생각없이 응모했지요. 출품을 하려면 술 이름이 필요하다고 해서 ‘혀로 맛을 보고 가슴에 품자’는 뜻을 담아 ‘설주’라는 이름까지 붙였어요. 그 대회가 2016년 대한민국명주대상이었고, 그해 최고상인 대상을 받았습니다. 번듯한 양조장도 없이 집 부엌과 안방 아랫목을 오가며 빚은 술이 1등상을 받았으니, 제가 가장 많이 놀랬어요.”
대한민국명주대상은 박록담 소장이 운영하는 한국전통주연구소가 주최하는 행사로, 국내 대표적인 전통주 대회 중 하나다. 임숙주 대표는 별 기대없이 출품했던 술이 최고상을 받은 것 외에 자신이 만든 술의 기원을 처음 알게 됐다. 행사를 주최한 전통주연구소 박록담 소장이 “이 술이 순창 백일주”라고 임 대표에게 알려준 것이다. 그리고 하나 더. 박 소장은 임 대표가 출품한 술 이름을 ‘지란지교’로 지어주었다. 임숙주-김수산나 부부가 함께 술을 빚는다는 점에 착안해 지은 이름이다. 박록담 소장은 “술은 예로 시작하여/예로서 마시고 대접하며/예의로 마치는 것이다./그 예의 바탕에 술을 빚는 부부가/사랑과 신의를 다 하니/’지란지교’가 되었다.”고 했다.
하지만, 박 소장의 얘기를 듣고도 임 대표는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순창 백일주에 대한 자세한 주방문(제조방법)이 적혀 있는 문헌을 찾기가 어렵고, 순창 백일주를 만들어 오신 분도 거의 없어, 순창 백일주를 그대로 재현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의 얘기를 좀 더 들어보자. “박록담 소장님으로부터 내 술의 근간이 ‘순창 백일주’라는 얘기를 들었지만, 순창 백일주를 어떻게 만드는지 자세히 알 방법이 없어 답답했어요. 기록도 없고, 순창 백일주 빚었다는 분도 수소문해봤지만, 이미 돌아가셨고, 그 자손들은 술을 빚지 않는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순창 백일주 빚는 법을 알려줄 분이 한분도 없다는 거죠. 그러니, 어쩌겠어요. 제 술을 순창 백일주 그대로 빚을 필요는 없으니, 제 방식대로 술을 빚기로 했어요.”
자신이 마시려고 가양주 스타일로 빚은 술로, 덜컥 2016년 대한민국명주대상 최고상을 받은 임 대표는 한번 더 욕심을 낸다. “순창 고추장이 임금님께 진상했듯이, 순창에서 내가 만든 술도 청와대에 한번 들어가봐야지” 하는 목표가 생긴 것이다.
하지만 ‘청와대 납품’은 간단하지 않았다. 우선 가양주는 자격 미달이었다. 상업양조장을 정식으로 허가받지 않은 상태에서는 청와대에서 술을 받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임 대표는 부랴부랴 양조장 면허를 급하게 받았다. 농업회사법인 ‘친구들의 술’ 양조장은 임 대표의 청와대 납품 욕심으로 생겨난 셈이다. 그리고 양조장을 설립한 그해 2019년 12월에 지란지교 술은 마침내 청와대 행사 술로 들어갔다. “베트남 국왕이 방한한 행사장에 지란지교 술이 제공됐어요. 비공식 행사라서, 언론 보도는 없었어요. 하지만, ‘청와대 진상’이라는 소원은 풀었으니, 만족했어요.”
대한민국명주대상 대상, 청와대 납품이라는 2가지 업적을 이룬 임숙주 대표는 이제 느긋해졌다. 상업양조장을 차렸지만, 술을 많이 팔 욕심은 내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주업은 무화과 과수원이었다. 그렇다고, 술 빚기를 게을리한 것은 아니었다. 지란지교 탁주, 약주, 소주까지 전통주 라인업을 구축했다. 하지만, 시장 반응은 그리 뜨겁지 않았다. 국내산 찹쌀, 멥쌀, 전통 밀누룩 등 최고 품질의 재료를 사용한 탓에 가격이 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알코올 도수 13도의 탁주가 1만5000원, 15도 약주는 3만원, 43도 소주는 무려 15만원이었다.
그런데, 반전의 기회는 의외로 가까운데 있었다. 임 대표의 부인 김수산나씨가 ‘대박 사고’를 친 것이다. 과수원에서 직접 기른 무화과로 만든 무화과청(무화과를 설탕에 버무린 것)과 레드비트(뿌리채소의 일종으로 레드비트 분말을 액체에 풀면 분홍빛이 난다)를 부재료로 넣은 ‘지란지교 무화과 탁주’가 폭발적인 인기를 끈 것이다.
“처음에 저는 무화과 탁주 개발을 반대했어요. 지란지교 술은 탁주든 약주든 설탕 같은 감미료를 전혀 넣지 않거던요. 그런데, 설탕이 들어간 무화과청을 넣은 무화과 탁주라니 안된다고 했어요. 하지만, 아내가 ‘한시적으로라도 출시해보자’고 우겨서 그냥 내버려뒀더니, 2~3일만에 무화과 탁주 1000병이 팔리지 뭡니까. 그때 아내 말 안들었더라면, 양조장은 진작에 없어졌을 거예요.”
2021년에 세상에 나온 지란지교 무화과 탁주는 이제 양조장의 효자 상품으로 확실히 자리잡았다. 전체 매출의 70%를 무화과 탁주 한 제품이 차지하고 있다. 무화과 탁주 한병에는 무화과 4개 정도의 무화과 열매가 들어가 있어, 한모금만 들이켜도 무화과 향이 입안 전체를 맴돈다. 거기다 술 전체가 분홍빛까지 띠고 있어, 여성들의 반응이 뜨겁다. 이제는 잘 나가는 무화과 탁주 기세를 몰아, 지란지교 탁주, 약주 매출까지 덩달아 오르고 있다. 2022년 양조장 매출이 전년도인 21년의 세배까지 뛰었다.
또 하나 소개해야 할 술이 지란지교 약주다. 이 술은 레몬 빛의 연노란색을 띤다. 그런데, 다른 약주들과 달리, 그리 맑지 않다. 다소 뿌옇다. 하지만, 농익은 단맛과 산미, 그리고 감칠맛이 느껴진다. 임 대표는 “본디 약주는 맑은 술을 뜻하지만, 오랜 숙성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고형물이 가라앉도록 하는 자연 침지법으로만 여과를 하기 때문에 빛깔이 다소 탁하다”며 “여과를 강제로 하지 않기 때문에 원재료 고유의 향과 맛이 그대로 살아있다”고 말했다.
지란지교 술 중 가장 대중에 덜 알려진 술이 소주다. 가격이 15만원에 달해, 주문이 들어올 때만 병입하기 때문에 생산 자체가 워낙 소량이다. 흔한 동증류기 대신, 전통 소줏고리에 증류하고 1년 이상 숙성을 거쳐 완성되는 귀한 증류주가 지란지교 소주다.
그래서, 임 대표는 가격을 다소 내린, 병당 5만원 안팎의 소주 제품을 별도로 만들 생각이다. “대중화된 소주를 만들더라도, 감압증류방식(강제로 기압을 낮추어 일찍 알코올이 휘발되도록 하는 증류방식)이 아닌, 우리 선조들이 써왔던 상압증류방식은 고수할 겁니다. 가격을 내린다고 해서, 품질까지 갑자기 쑥 내릴 수는 없어요. 그래서 고민입니다. 그래서 새 소주 제품은 언제쯤 나올지 저도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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