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없는 K-팝 그룹’ … 탈 국적·탈 인종 ‘하이브리드’로 더 큰 도약
일본인 구성 ‘니쥬’ 오리콘 1위
현지화 통해 글로벌화 성공 사례
비 한국인이 외국어로 부르지만
국경 한계 벗어나 새 활로 열어
하이브 등 대형기획사 소속 아닌
흙수저 그룹들 플랫폼서 입소문
BTS처럼 음악·맨파워로 승부
‘피프티피프티’핫100‘17위’에
방탄소년단(BTS) 이후 스트레이키즈, 세븐틴, NCT부터 이른바 ‘중소 기획사’의 에이티즈, 피프티피프티까지 미국 빌보드 차트와 영국 오피셜 차트에서 연일 눈부신 성과를 내고 있지만 정작 K-팝 내부에서는 위기론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달 중순 한국갤럽이 발표한 ‘2022년 콘텐츠산업 동향분석’에 따르면 K-팝 관련 콘텐츠 기업의 61.5%가 “세계 경제 침체로 어려움을 겪었다”면서 “팬데믹 때보다 더 힘들다”고 답변한 것으로 조사됐다. 방시혁 하이브 의장도 앞서 지난 3월 관훈포럼에서 “미국 등 주류시장에서 K-팝 성장이 둔화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K-팝의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해 새로운 전략과 대책이 필요한 이유다.
# 경계를 넘다…하이브리드 그룹 등장
K-팝 시장의 성장기는 크게 4단계로 나뉜다. 그룹 H.O.T와 S.E.S로 대표되는 태동기를 거쳐 빅뱅, 동방신기, 소녀시대가 아시아 시장을 중심으로 외연을 확장한 게 2단계다. BTS와 블랙핑크를 전면에 내세운 3단계에서는 활동 범위를 전 세계 시장으로 넓혔고, 외국인을 멤버로 영입해 글로벌 시장을 공략했다. 그리고 현 4단계는 K-팝이 ‘스타’가 아닌 ‘시스템’을 전파하며 철저하게 현지화는 방식이다. 하이브, JYP, CJ ENM 등 거대 엔터테인먼트 기업은 현지인으로 구성된 하이브리드 K-팝 그룹으로 각국에서 눈에 띄는 성과를 내고 있다. 멤버의 국적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하이브는 지난해 12월 첫 일본 그룹인 9인조 앤팀(&TEAM)을 데뷔시켰다. 일본인 7명, 대만인 1명, 한국인 1명으로 이뤄진 다국적 보이그룹이다. CJ ENM 역시 ‘프로듀스 101 재팬’ 시리즈로 결성된 일본 보이그룹 JO1, INI 등을 가동 중이다. JYP는 2020년에 이미 전원 일본인으로 구성된 걸그룹 니쥬로 일본 오리콘 차트 정상을 밟았다.
이런 전략은 한한령(限韓令·한류수입금지령)으로 인해 K-팝 스타의 활동이 어려운 중국 시장에도 적용된다. SM에 소속된 그룹 NCT의 중국 유닛 웨이션브이, JYP가 내놓은 보이스토리가 대표적이다. K-팝 그룹으로 분류되지만, 현지인을 내세운 그룹들은 이질감 없이 현지 팬들과 섞인다. 박기수 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는 “단순히 외국인 멤버를 포함한 K-팝 그룹이 외국 시장에 진출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현지인을 활용해 현지에 주요 기반을 두고 활동하는 K-팝 그룹들이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물론 곱지 않은 시선도 있다. 비(非) 한국인이 한글이 아닌 가사로 노래를 부르는데, 과연 그들을 ‘K-팝 그룹이라 부를 수 있느냐’는 질문이다. 하지만 한국 배우와 감독이 참여한 ‘오징어게임’이 자본을 댄 넷플릭스의 ‘오리지널’ 콘텐츠로 분류돼 미국 작품을 대상으로 하는 에미상에서 수상했듯, 탈(脫) 국경, 국적, 인종을 인정해야 K-팝의 새로운 활로를 모색할 수 있다는 주장이 가볍게 들리지 않는다. 박지원 하이브 CEO는 앤팀 등의 활동에 대해 “다변화된 아티스트 포트폴리오로 특정 국가에 치중하는 것을 피하고 변화하는 트렌드에도 유연하게 대응해 리스크를 줄일 수 있다”는 청사진을 제시했다.
# ‘금수저’·‘흙수저’ 그룹의 공존
방 의장은 글로벌 시장에서 2%에 불과한 K-팝 기업의 점유율을 거론하며 “삼성·현대 같은 글로벌 K-팝 기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업계 관계자들은 “반(半)만 맞는 말”이라고 반박한다. BTS가 ‘흙수저’ 기획사 출신임에도 맨파워와 음악의 힘으로 세계 정상에 올랐듯, 재기발랄한 기획력을 가진 강소 기업을 키워야 한다는 주장이다.
4인조 걸그룹 피프티피프티가 대표적이다. 지난해 11월 데뷔한 이 걸그룹은 미국 빌보드 메인 싱글 차트 ‘핫100’ 17위에 올랐고, K-팝 걸그룹 중 블랙핑크, 트와이스 등을 제치고 역대 최장기간 핫100에 진입하는 신기록을 세웠다. 이들은 ‘글로벌 10대들의 놀이터’라 불리는 SNS 플랫폼인 틱톡을 활용한 마케팅으로 ‘입소문’을 내는 데 성공했다. 이는 BTS가 글로벌 플랫폼인 유튜브를 통해 강력한 팬덤을 구축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빅4 기획사를 중심으로 덩치를 키우는 데 총력을 기울이는 것이 아닌 투 트랙(two track) 전략을 고민해야 하는 이유다.
또 다른 그룹 에이티즈와 피원하모니의 성과 역시 ‘전략의 승리’다. 에이티즈는 이번 주 미국 빌보드 메인 앨범 차트인 ‘빌보드 200’ 2위에 올랐다. 최근 해당 차트 51위를 기록한 피원하모니의 소속사 FNC엔터테인먼트 김성한 음악사업본부 상무는 “미국 소재 K-팝 전문 회사와 레이블 협업을 통해 미국 버전 앨범을 현지 발매했고, 9개 주에서 팝업스토어를 개최하고 글로벌 쇼트폼 채널에서 신곡 챌린지를 진행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중소 기획사가 해외 시장에서 지속적인 활로를 마련하려면 정부 차원의 지원이 필요하다. 박보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도 “K-팝의 성공은 K-팝 아티스트의 탁월한 매력과 무한한 상상력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세계에서 사랑받는 K-팝의 지속적 탄생을 위해 짜임새 있는 정책을 펼쳐 나가겠다”고 밝히고 있다. 실제로 문체부와 한국콘텐츠진흥원은 미국 ‘사우스바이사우스웨스트’나 영국 ‘더 그레이트 이스케이프’, 독일 ‘리퍼반 페스티벌’ 등 글로벌 음악 행사에 참여하고, 각 그룹이 쇼케이스를 열어 현지 산업 관계자와 만나는 ‘코리아 스포트라이트’(Korea Spotlight)를 개최하고 있다. 올해는 이를 확대해 카자흐스탄, 독일, 호주, 일본, 멕시코 등에서 각각 5팀 내외 K-팝 그룹을 소개한다. 이외에도 중소 기획사를 위한 온라인 공연 및 영상콘텐츠 제작 지원 스튜디오인 ‘코카(KOCCA) 뮤직 스튜디오’도 운영되고 있다.
“에이티즈 데뷔 5개월만에 해외투어 빌보드 2위… ‘세계화’ 승부수 통해”
■ 소속사 신동영 부사장
“다음 타깃은 블루오션 중동”
8인조 보이그룹 에이티즈(사진)는 ‘해외에서 먼저 알아본 그룹’으로 손꼽힌다. 2018년 데뷔 앨범 타이틀곡 ‘트레저’가 빌보드 월드 앨범 차트 13위에 오르는 ‘사고’를 냈다. 이후 꾸준히 해외 시장을 노크했고, 지난 16일 발매한 신보로 빌보드 메인 앨범 차트 ‘빌보드 200’에서 2위를 차지했다.
이는 에이티즈를 발굴한 KQ엔터테인먼트의 철저한 현지화, 해외 진출 전략이 밑바탕이 됐다. 신동영 부사장은 29일 문화일보와 나눈 인터뷰에서 “에이티즈는 데뷔 5개월 만에 해외 투어를 시작했다”면서 “에이티즈는 ‘A TEEnager Z’로 ‘10대들의 A to Z(모든 것)’라는 의미인데, 10대들이 열광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갖춘 팀을 지향한다. 이런 세계관과 더불어 완성도 높은 음악과 퍼포먼스를 강조했는데 글로벌 팬들이 반응해줬다”고 말했다.
신인 그룹을 위해 해외 시장에 대규모 자본을 쏟아붓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다. 하지만 그룹 블락비의 성공을 통해 노하우를 쌓은 KQ엔터테인먼트는 처음부터 ‘세계화’라는 승부수를 띄웠고, 이는 통했다. 이에 대해 “‘음악’이기에 가능했다”는 신 부사장은 “음악은 전 세계 모두가 즐길 수 있는 공통된 문화이기 때문에 국적, 언어 같은 물리적 조건을 뛰어넘을 수 있었다”면서 “유통이나 프로모션의 경우, 시간과 장소의 제약을 넘어서 글로벌 팬들과 실시간으로 소통할 수 있는 플랫폼을 활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에이티즈가 다음 타깃으로 삼고 있는 시장은 중동이다. 보수적인 시장인 만큼 K-팝에 대한 개방 속도가 늦지만, 장기적 관점으로 볼 때 블루오션이다. 신 부사장은 “중동에서 본격적으로 K-팝에 문호를 개방하기 시작했다. 에이티즈도 1년 사이 두 차례 방문한 데 이어 오는 7월에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단독 콘서트를 갖는데, K-팝 시장에 새바람을 가져올 지역”이라고 내다봤다.
안진용 기자 realyong@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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