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지의 산속을 열차가 달리고 스테인리스 포석정에 물이 흘러간다
21세기 우리들 일상은 기실 날마다 눈으로 가상의 여행을 하고 다니는 삶이다. 신문과 방송, 온라인 매체들은 온갖 영상과 이미지, 활자들을 쏟아내면서 세상 곳곳의 상황을 신속하게 공유해주기 때문이다.
울산시립미술관 지하 2층 1전시실에 설치된 스페인 작가 마테오 마테의 설치작품 <세계풍경>(2023)은 수많은 신문지들의 더미로 만들어진 가상의 산과 계곡 사이에 선로를 놓고 미니 전기열차가 지나가는 풍경을 펼쳐내고 있다. 주행중인 열차에 부착한 카메라가 활자로 가득 채워진 주변 신문지 세상이 흘러가는 모습을 담아 영상으로 보여주면서 우리 주변을 둘러싼 세계와 세상의 이미지를 낯선 시점과 눈길로 보도록 이끌어간다. 작가는 2010년대 이래로 식탁의 음식들 혹은 침대의 시트 등을 배경 삼아 가상의 세계 여행을 펼치는 색다른 꾸밈새의 설치작품들을 시도해왔다. 이번에는 울산 미술관으로 찾아와 224평방미터의 지하 전시실을 통째로 차지하며 자신의 여행 작업중 가장 큰 규모로 판을 벌여놓았다.
마테오 마테의 작품은 지난 8일 이 미술관 지하 2층 1·2전시실에서 시작된 ‘어느 정도 예술공동체 : 부기우기 미술관’이란 제목의 기획전(9월3일까지) 일부다. 이 전시는 독립기획자 9명과 작가 60여명이 장르불문 어우러진 잡탕 기획전으로 권력화한 기존 미술관의 위계를 해체하고 예술가, 장르 사이 융합과 공유의 경지를 드러내려는 기획이다. 8명의 국내외 기획자들이 모두 8개 영역으로 전시장을 갈라 회화, 디자인, 컬트비디오, 사운드아트, 드로잉, 조각, 메타버스, 사진, 벽화, 퍼포먼스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을 내놓았다.
시선을 오래 붙잡는 공간은 역시 젊은 국내외 기획자가 두 사람이나 따라붙은 마테오 마테의 설치작품 ‘3종세트’가 있는 1전시실. <세계 풍경>에서 펼쳐낸 신문지 계곡의 열차 주행 풍경 말고도 해가 뜨고 저물기까지의 낮시간이 큰 탁자 위에서 재현되어 흘러가는 <끝없는 날들>과 작가가 쓰는 일상물건들을 가득 벌여놓고 세계 여행의 감각을 음미하라고 권하는 <책상에서 세계 일주>가 맞는다.
중견기획자 유진상 계원예술대교수가 꾸린 젊은 작가 다섯팀의 떼거리 전시 ‘아무도 기다린 사람은 없지만’도 기대를 모으는 섹션이다. 서울 을지로 한 건물 옥상 루프톱에서 운영되는 클럽이자 작가 레지던시 공간인 ‘육일봉’, 글자들로 작업하는 작가그룹 ‘워드 워크스’ 등을 통해 만나면서 일시적인 예술공동체를 형성한 다섯 팀의 작가그룹들의 작업들을 소개한다. ‘사랑당’, ‘비디오로즈’, ‘다큐육뽕’ ‘워드 워크스’ 등의 여러 작가팀들이 성소수자 예술부터, 신비주의적 컬트, 동화적 환상, 한국 사회의 공간적 현실 등을 화두로 다기한 매체 장르 작업들을 내보이는 작품 마당이다. 유진상 기획자는 ‘팬터지로, 사랑으로, 뽕으로’ 관객과 보이지 않는 연대의 감각을 일으키는 전시라고 소개했다. 이외에도 사이먼 후지와라 등의 유명 작가들과 함께 20세기 커피 하우스와 팬데믹 뒤 커피 서비스의 양상을 시각 사회학적으로 탐구한 중국기획자 차오지아싱의 ‘황금다실’, 지역 작가들의 작업을 다면적으로 뜯어본 ‘열린 지역 미술과 그 미래’, 가상환경의 현주소와 시각문화를 탐색한 ‘메타버스, 초연결 그리고 공간’ 등이의 소주제 전시들이 손짓한다.
울산시립미술관은 서울 평창동 토탈미술관 지하 1, 2층에도 ‘대면 대면 프로젝트: 중심의 전환’ 전(7월2일까지)을 차려놓았다. 2021년 작가와 평론가의 1대 1 대면 방식의 포토폴리오 리뷰 공모에서 선발된 24명의 울산과 동부경남권 출신 유망 작가들이 전시 주인공이다. 들머리에 놓인 이장욱 작가의 대나무+스테인리스 구조의 조형물 <세디먼트 영>이 우선 주목된다. 경주에 있는 유명한 신라 놀이유적인 포석정 수로의 물들이 흘러가는 ‘유상곡수’ 모양을 본떠 만들었다고 한다. 내부의 수로로 물이 떠다니고 그 위에 조형물을 띄울 수 있는 얼개인데 고대사의 역사적 공간과 현대미술의 기기묘묘한 접점 찾기로 비친다. 구겨진 듯한 대형 종이 덩어리를 기존 조각의 경직된 구도처럼 배치한 김문기 작가의 이색 설치작품과 울산에 대형 선박이 입출항하는 ‘무기력한 경관’을 잉크젯 프린터로 표현한 이재균 작가의 작품 등도 눈에 띈다. 지역 미술관이 예산, 인력의 한계를 딛고 서울 쪽 주요 미술관으로 영역을 넓혀 많은 작가들의 집단 기획전 형식으로 소개하는 형식은 전례없는 파격적 시도다.
두 난장은 미디어아트 전문가로 2020년부터 울산시립미술관 사령탑을 맡은 서진석 관장의 마지막 고별 전시다. 그는 지난해 1월 개관 이후 의미와 재미를 겸비한 미디어아트 난장과 국내외 현대미술 대가들의 근작전 등을 잇따라 내놓으면서 흥행 대박을 낳았지만, 지자체의 계약 불연장 방침에 따라 30일 퇴임한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도판 울산시립미술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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