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리아스' 새 번역 내놓은 고전학자 이준석 "압도적 아름다움"
'오뒷세이아'도 곧 출간 예정…"인류 존속과 함께 이어질 고전들"
(서울=연합뉴스) 김용래 기자 = "사람은 누구나 아름답고 근사한 것이 자기 삶에 있어야 살 수가 있습니다. 저는 압도적인 아름다움을 호메로스의 문학을 통해 만났지요."
호메로스의 대서사시 '일리아스'의 새 고대 희랍어(그리스어) 원전 번역본을 내놓은 서양고전학자 이준석(48) 교수(한국방송통신대 문화교양학과)는 마지막 원고를 마치던 날 어두운 연구실에 홀로 앉아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일리아스' 맨 뒷부분에 실린 옮긴이의 말에서 그는 "홀가분한 기쁨이 조금은 있을 줄 알았는데 애태워 사랑하던 이의 마지막처럼 서럽기만 했다. 자신을 소진하며 빠져들던 그 황홀과 고통을 다시는 맛보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직감했기 때문"이라고 썼다.
지난 27일 서울 대학로의 방송대 본부 연구실에서 만난 이 교수에게 탈고 당시 통곡한 심정을 다시 묻자 "부끄럽다"면서도 "일리아스를 한줄 한줄 옮기던 그 황홀했던 시간이 이제 다 지나가 버렸구나하는 아쉬움이 무척 컸다"고 했다.
기원전 8세기경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일리아스'는 고대 그리스 문학이 전하는 가장 오래된 작품이자 유럽 문학의 효시로 꼽힌다. 신의 뜻에 따라 트로이 전쟁을 수행하는 그리스군과 트로이군의 비극적인 운명, 삶과 죽음 등 인간사에 대한 깊은 통찰이 1만5천693행의 서사시로 담겼다.
이 교수의 '일리아스' 번역은 국내에서는 고대 희랍고전 번역의 거두로 꼽히는 고(故) 천병희(2022년 작고) 전 단국대 교수의 번역에 이어 두 번째로 고대 희랍어 원전을 한국어로 옮긴 작업이다. 천병희 번역의 초판이 국내에서 1982년 나왔으니 무려 41년 만에 새 원전 번역이 나온 셈이다.
천병희 번역본이 가독성을 중시해 자유로운 의역을 택했다면, 이준석 교수의 새 번역은 원전의 뉘앙스와 글자 그대로의 의미를 살리는 데 중점을 둔 직역이라는 점이 가장 큰 차이다.
가령, 천병희 번역본의 '너는 무슨 말을 그리 함부로 하느냐?'는 대목을 이 교수는 '네 이빨 울타리를 빠져나온 그 말은 대체 무엇이냐'로 옮겼다. 이 교수가 '날개 돋친 말을 건네었다'라고 옮긴 부분은 천병희 번역본에는 한국 독자들에게 친숙한 관용어구인 '물 흐르는 듯 거침없이 말했다'로 번역돼 있다.
"제가 천병희 선생님의 번역과 경쟁하거나 대체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번역도 새 시대에 맞게끔 새 버전이 필요하다고 봐요. 모든 고전이 그렇습니다. 저는 호메로스 본연의 문체와 표현, 은유 이런 것을 가감 없이 그 해상도 그대로 전해드리고 싶었습니다."
이태수 서울대 명예교수도 추천사에서 "천병희의 번역은 가독성을 큰 장점으로 가지고 있다. 호메로스를 꼼꼼하게 연구해온 학자 이준석의 번역은 좀 더 정확하게 호메로스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겠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준석 교수는 서울대 미학과와 대학원 서양고전협동과정을 마친 뒤 호메로스 연구의 세계적 명문으로 꼽히는 스위스 바젤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2015년 귀국했다.
유럽 각국에서 모인 전공자들 사이에서 유일한 아시아인이었던 그는 고대 희랍어와 라틴어는 물론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가 마구 뒤섞여 진행되던 강독 시간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일리아스'에 이어 이 교수의 차기작도 곧 나온다. 이 역시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뒷세이아'다.
'일리아스'는 중간에 출판사가 바뀌는 등 우여곡절 끝에 번역에 착수한 지 7년이 넘어서야 책이 나왔지만, '오뒷세이아'는 이미 번역이 끝나 이르면 오는 9월쯤 독자를 만날 예정이다. 이후엔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등 고대 그리스 비극의 원전을 새로 번역해 내놓을 계획이다.
하루 종일 책상 앞에서 앉아 낡은 책들과 씨름하는 것이 업인 이 교수는 매일 체육관에서 바벨을 들고 지방 강의가 있을 때는 바이크를 타고 다니며 바람을 즐긴다고 했다. 좋아하는 고전 연구와 번역을 오래도록 건강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에게 하루 종일 들여다봐도 지겹지 않은 호메로스의 매력은 무엇일까.
"'일리아스'는 우리가 알고 싶은 인간의 모습, 왜 살고 왜 죽는지, 전쟁이라는 한계상황에서 인간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는지, 행복은 뭐고 불행이 무엇인지 유감없이 보여줍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들은 인류가 존속하는 한 계속 이어질 유산이지요. 그게 바로 '고전'입니다."
아카넷. 844쪽.
yongla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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