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상 책임 진 외국인 계절노동자 이탈…체류기간·임금 현실화 숙제
밤새 내린 비가 멈춘 들판은 뜨거웠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숨이 턱 막혔다. 채 열걸음도 떼지 않았는데 땀방울이 맺힌다.
지난 27일 낮 충북 괴산군 불정면을 찾았다. 산 아래 2천㎡ 남짓한 밭에 세 사내가 장화를 신고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밭고랑에 고인 빗물 탓에 걸음걸이가 쉽지 않은지, 발을 옮길 때마다 “아우, 아우” 하는 감탄사를 연신 내뱉었다. 필리핀에서 온 공공형 계절노동자 아이반 카일(25), 마크 킴슨(38), 제썰(28)이다. 이들은 이날 아침부터 밭에 서리태를 심었다. 아이반은 “조선소에서 일했는데, 농사일이 만만치 않다”고 힘겨워했다. 농부 출신 제썰은 “필리핀 밭보다 커서 조금 힘들긴 하지만 할 만하다”고 했다.
이들은 지난 4월3일 다른 동료 27명과 함께 입국해 오는 8월까지 괴산 농가 곳곳을 돌며 일하게 된다. 숙식은 괴산 성불산 휴양림에서 해결한다. 일반적인 국외 계절노동자는 규모가 큰 농장에 5~6명씩 배치돼 3~5개월 단위로 일하지만, 공공형 계절노동자는 일손이 필요한 농가에 일용근로 형태로 투입된다.
공공형 계절노동자는 지난해 괴산 등 전국 5곳에서 시범 사업으로 도입했는데, 반응이 좋아 올해엔 전국 19곳으로 확대됐다. 지역 농협이 이들과 근로 계약을 하고 최저 시급 수준의 급여(월 200여만원)를 준다. 농가는 하루 8만7천원 안팎의 일당을 지역 농협에 지급한다. 이날 필리핀 노동자를 부른 최원자(69)씨는 “하루 12만~13만원 이상을 줘도 일손 구하기가 힘든데 이 사람들이 와서 시름을 덜었다. 요령 안 피우고 일을 너무 잘한다. 요새 농촌엔 노인이 태반이라 외국인 없으면 농사 못 짓는다”고 했다.
4~5㎞가량 떨어진 유상구(58)씨의 담배밭에서도 외국인들의 손놀림이 분주했다. 비를 맞은 듯 흥건하게 젖은 국외 노동자 5명이 담뱃잎을 따 차에 싣느라 여념이 없었다. 캄보디아에서 온 계절노동자들이었다. 이들은 유씨의 집에서 함께 먹고 자고 일한다. 민챙이온(44)은 “캄보디아에서 고구마·감자·과일을 기르는데 농사철이 지나 한국으로 왔다. 지난해 음성에서 일한 적도 있어 익숙하다”고 했다. 옆에 있던 므응펄(46)은 “땀이 너무 나는 한국 날씨가 힘들다”며 “그래도 돈 많이 벌 수 있으니까 기회가 되면 가족을 위해 또 오고 싶다”고 했다. 이들을 고용한 유씨는 “농촌에서 일손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다. 코로나 땐 정말 죽을 맛이었다. 그나마 이 친구들이 있어 농사를 계속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들 국외 계절노동자의 출입국을 관리하는 부처는 법무부다. 올해 3만9657명을 입국시켜 전국 지방자치단체에 배정했다. 올해 상반기 124개 지자체에 2만6788명을 배정한 데 이어, 지난달 24일 107개 지자체에 1만2869명을 추가했다. 지난해 11월 말 기록(전국 98개 지자체, 1만1342명)을 뛰어넘는 역대 최대 규모다.
농림축산식품부의 분석을 보면, 올해 1분기에만 국외 계절노동자 8666명이 입국해 농가 등에서 일하고 있다. 지난해 같은 기간(1373명)에 견줘 531% 늘었다. 국외 계절노동자가 사실상 농가의 손발이 되고 있다는 얘기다. 이규웅 괴산농촌인력중개센터장은 “계절노동자는 농촌 인력난 해소와 함께 농촌 임금 적정화 등 여러 효과를 낸다. 체계적 관리·운영이 필요하다”고 했다.
문제는 이들의 이탈이다. 지난 10일께 충북 보은군의 공공형 계절노동자 6명이 무단이탈한 뒤 지금껏 연락이 없다. 이들은 지난달 20일 동료 등 44명과 입국해 보은 지역 농가에서 일해오다, 숙소로 써온 보은 충북알프스 휴양림에서 짐을 꾸려 잠적했다. 이들을 관리한 남보은농협의 김원하 상무는 “한방에서 생활하던 노동자가 한꺼번에 사라졌다. 국내외 브로커 등과 연계한 계획적 이탈로 추정한다”고 말했다. 지난 3~4월 충남 당진에선 몽골 계절노동자 2명이 이탈했다. 앞서 지난해 전북에 들어온 계절노동자 1006명 가운데 321명(32%), 강원에 들어온 노동자 2951명 가운데 506명(17%)이 이탈했다.
이탈 사유는 대부분 돈, 체류 기간과 관련이 있다. 정부도 손을 놓고만 있지는 않았다. 지난달 30일 계절노동 체류 기간을 1회에 한해 3개월 연장(최대 8개월 취업)하는 방안을 내놓았다. 지자체도 이탈 방지 대책을 세우고 있다. 강원 양구, 충북 보은·영동 등은 계절노동자를 관리하는 출신국 공무원의 파견을 의무화했으며, 충북 음성과 강원 화천 등은 결혼 이민자 친척에게 계절노동자 입국 자격을 주고 있다. 충북 괴산은 캄보디아·베트남 출신의 결혼이민 여성을 국외 노동자 관리 직원으로 뽑았다. 하지만 이런 대책들도 이탈을 막기엔 역부족이다.
안건수 이주민노동인권센터 소장은 “농촌의 계절노동자는 숙식비를 제하면 하루 10만원을 채 못 벌지만 산업·건설 현장은 대개 20만원 안팎까지 받을 수 있다”며 “체류 기간을 획기적으로 늘리거나 실질 임금을 현실화하지 않는 한, 현장 관리를 강화하는 것만으로는 계절노동자 이탈을 막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오윤주 기자 sti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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