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판 노예' 사우디의 외국인 가사노동자… "케냐 여성 착취, 방관 안 돼"

권영은 2023. 6. 29. 0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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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디 가정의 외국인 가사노동자는 '현대판 노예'다.

싼값에 가사노동자를 '수입'하려는 사우디에서 이들은 인간 이하 취급을 받는다.

실제 사우디에서 일했던 가사노동자 출신 10여 명은 지난 2월 케냐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케냐 외무부에 따르면 2020~2021년 사우디에서 가사노동자로 일하다 숨진 이는 최소 57명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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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삶' 찾아 나선 여성들의 꿈 산산조각
굶기고 강제노동·임금 체불, 구타·성폭력까지
'가정에 사적 고용된 하인'… 법적 보호는 전무
싱글맘이 가사노동자로 일하는 내용의 넷플릭스 '조용한 희망'의 한 장면. 기사 내용과는 관련 없음. 넷플릭스 제공

#1. 조이 시미유(26)는 조국인 케냐를 '탈출'하기로 했다. 경제적 형편 탓에 대학을 중도 포기했지만 일자리가 없었다. 사우디아라비아 이주를 결심했다. 고학력 여성인 그가 사우디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단 한 번도 생계 수단으로 생각 안 했던" 가사노동뿐이었지만, "그곳의 삶이 더 나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기대는 산산조각 났다. 삼시 세끼와 휴식도 보장받지 못한 채 장시간 강제노동에 내몰렸다. 고용주는 "돈을 받을 만큼 일을 충분히 안 했다"는 핑계를 대며 임금마저 제때 주지 않았다.

#2. 또 다른 케냐 여성 퓨리티 음보고(33)도 학대와 착취에 노출된 채 사우디에서 가사노동자로 일해야 했다. 2020년 카타르 교사 채용 공고를 보고 지원한 그가 배치된 곳은 사우디의 한 가정이었다. 도착 첫날, 고용주는 휴대폰과 여권부터 압수했다. 몇 달간 가족과 연락도 하지 못했다. 항의를 하자 뜨겁게 달궈진 다리미로 폭행까지 당했다.

사우디 가정의 외국인 가사노동자는 '현대판 노예'다. 싼값에 가사노동자를 '수입'하려는 사우디에서 이들은 인간 이하 취급을 받는다. 임금 체벌과 과도한 노동, 구타, 심지어 성폭력도 빈발하고 있다. 자국민 여성을 외화벌이 수단으로만 보는 케냐 정부도 공범이다. 이 같은 인권 침해를 방관해선 안 된다며 인권단체들이 나섰다고 영국 가디언이 27일(현지시간) 보도했다.

2018년 필리핀 마닐라 니노이 아키노 국제공항에 쿠웨이트로 일하러 갔던 가사노동자들이 돌아오고 있다. 당시 필리핀 가사노동자가 고용주에 학대당한 뒤 숨진 채 발견되자 필리핀 정부는 노동자 신규 파견을 금지하는 행정명령을 발표했었다. 마닐라=로이터 연합뉴스 자료사진

'학대에 노출' 케냐 가사노동자, 최소 57명 사망

높은 실업률에 시달리는 최빈국 케냐는 '여성 송출' 국가다. 케냐 현지 비정부기구(NGO)는 약 12만 명(2019년 기준)의 여성이 중동에서 일하고 있다고 추산했다. 지난해 중동 이주 노동자들은 2억3,700만 파운드(약 3,928억 원)를 본국에 송금했다. 케냐가 작년 커피 수출로 벌어들인 3억100만 달러(약 3,937억 원)와 비슷한 금액이다.

케냐 정부는 외화벌이 수단인 이주 노동을 적극 장려한다. 일자리 창출을 국정 과제로 내건 윌리엄 루토 케냐 대통령은 지난달 사우디를 비롯해 독일, 캐나다 등과 양자 노동 협정을 맺었다. "자국민의 인권 침해엔 아랑곳없이 이주 노동에 내모는 처사"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인권단체들은 "사우디가 최소한의 기본적 기준을 충족할 때까지 모든 이주 노동을 즉각 중단하고, 피해자에게 손해배상을 하라"며 반발했다.

실제 사우디에서 일했던 가사노동자 출신 10여 명은 지난 2월 케냐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자국민 가사노동자의 사망·학대 사건 조사에 소홀했다는 이유였다. 케냐 외무부에 따르면 2020~2021년 사우디에서 가사노동자로 일하다 숨진 이는 최소 57명에 달한다. 사우디는 이들 모두 '심정지'로 사망했다며 발뺌만 하고 있다.

지난 16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한국노동조합총연맹, 한국YWCA연합회 관계자 등이 '2023 국제가사노동자의날' 기념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제3세계 여성 착취, 사실상 '인신매매' 비판

'오일머니 대국' 사우디는 가사 등 저임금 노동에 외국인을 투입한다. '제3세계 여성 착취'라는 구조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 이를 조장하는 건 걸프 국가들이 시행 중인 외국인 노동자 보증인 제도, 이른바 '카팔라'다. 고용주가 외국인노동자 비자 발급을 위해 보증을 서도록 하는 것인데, 사실상 노동자 인신을 구속하는 제도다. 고용주 허가 없이 노동자는 이직도, 여행도, 출국도 할 수 없다. 표준계약서는 물론, 최저임금도 없다. 신체적·성적 학대에도 쉽게 노출된다. '사적으로 고용된 하인' 신분이라는 얘기다.

심지어 약취·유인·감금 등까지 벌어지는 탓에 '국제법상 인신매매'라는 비판도 나온다. 유엔 지역간범죄처벌조사기관(UNICRI)에서 인신매매를 연구했던 알렉시스 아로노비츠는 지난해 7월 영국 더럼대 '글로벌폴리시 저널'에 게재한 '걸프 국가로의 인신매매'라는 논문에서 "외국인노동자에 대한 거짓 약속과 카팔라 제도 남용을 통한 강압·착취 등은 인신매매에 해당한다"고 지적했다.

권영은 기자 you@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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