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유정의 음악 정류장] [87] ‘경부철도노래’에 담긴 서글픔과 의지
기차는 멀리 떠나기도 하지만 돌아오기도 하고, 기차역에서는 사람들이 만나기도 하지만 헤어지기도 한다. ‘기찻길 옆 오막살이’에서는 아기가 잘도 자고, ‘은하철도 999′는 어둠을 헤치고 힘차게 달린다. 소나무가 안타까운 마음으로 간이역을 바라본다고 여겨 단번에 창작했다는 이규석의 ‘기차와 소나무’는 어떠한가. 손인호의 ‘비나리는 호남선’, 안정애의 ‘대전 부루스’, 김수희의 ‘남행열차’, 한영애의 ‘완행열차’, 다섯손가락의 ‘새벽 기차’, 김현철의 ‘춘천 가는 기차’ 등은 ‘기차’ 관련 대표적 노래들이다.
기차와 관련된 가장 이른 시기의 노래는 최남선이 1908년에 발표한 ‘경부철도노래’다. 전체 67절의 긴 노랫말이어서 34쪽의 책으로 신문관(新文館)이라는 출판사에서 발간되었다. 실제로 노래로 불렀는지 알 수 없으나 짧은 유절 형식의 노랫말이 악보와 함께 실려 있다. 서울서 부산으로 가는 철길을 따라 오늘날 우리에게도 친숙한 역명과 지명이 수없이 노랫말에 등장하고 있어 정겹다.
일본에서 1906년에 발표한 ‘만한철도창가(滿韓鐵道唱歌)’에 촉발되어 만든 ‘경부철도노래’지만 이 둘은 분명한 차이점이 있다. ‘만한철도창가’가 만주와 우리나라에 대한 일본의 야욕을 드러낸 것과 달리, ‘경부철도노래’는 기울어져 가는 나라 상황에 분통을 터뜨리고 국권 회복의 의지를 담고 있다. “우렁차게 토하는 기적 소리에”로 시작한 노래가 후반부에 이르면 “슬프도다”라며 서글픈 현실 인식을 표출한다. 당시 철도가 근대화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제국주의의 수탈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양가 감정을 불러온 것으로 보인다.
‘경부철도노래’의 곡조를 1900년에 발표된 일본의 ‘철도창가’와 같은 것으로 오인하기도 한다. 하지만 ‘경부철도노래’의 원곡은 우리에게 ‘들놀이’라는 동요로 친숙한 ‘호밀밭 사이로(Coming Through the Rye)’이다. ‘호밀밭 사이로’는 스코틀랜드에 전하는 곡조에 시인 로버트 번스(Robert Burns)가 노랫말을 붙인 것이다. 오노 우메와카(多梅稚)가 작곡한 일본의 ‘철도창가’는 “청산 속에 묻힌 옥도 갈아야만 광채 나네”로 시작하는 ‘학도가’의 곡조로 차용되어 우리나라에서 유행했다.
6월 28일은 ‘철도의 날’이었다. 어쩌면 우리는 저마다 자신의 이름을 내건 기차역일지도 모른다. 각자의 역에 누군가 기차처럼 다가와서 머물다 떠난다. 다만 우리가 기차와 다른 점은 시간표가 없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떠날지, 오래 머물 것인지 스쳐 지나갈 것인지 알 수 없다. 한 치 앞도 못 보는 세상살이에서 새로운 기차를 발명할 수 있다면 그 이름은 ‘네게로 가는 기차’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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