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문학상] 6월 독회, 본심 후보작 심사평 전문
올해로 54주년을 맞은 동인문학상은 독자와 함께하는 한국 문학의 축제입니다. 매달 독회를 통해 추천작을 쌓아올린 뒤 연말에 그해 수상작을 선정합니다. 동인문학상 심사위원회(정과리·구효서·이승우·김인숙·김동식)는 최근 월례 독회를 열고 소설 작품들을 검토했습니다. 이달 독회 추천작은 2권. 구자명 소설집 ‘건달바 지대평’과 이주란 소설집 ‘별일은 없고요?’입니다.
다음은 독회 심사평 전문.
◇정과리·문학평론가
◊구자명 ‘건달바 지대평’
구자명의 ‘건달바 지대평’(나무와 숲)은 두 가지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첫째, 거의 무명에 가까운 작가의 등장이라는 점이다. 오늘날 문학 출판계의 전략적인 상업 유통망에 의해서 배제된 작가의 작품이 눈에 띄었다면, 그것은 그냥 주목받은 게 아니다. 저 문제의 유통망을 찢으며 튀어나왔다고 해야 한다. 그리고 오늘의 지배적 유통망이 ‘사생활에 대한 사소하고 자질구레한 접근’(이는 대중 미디어에서 연예인들이 나와서 잡담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으로 한국 문학을 제한하고 있는 상황에 설치된 언어의 철조망에도 약간의 균열이 생겼음을 뜻하기도 한다. 박수칠 만한 까닭이 있다.
둘째, 한국인들의 오래된 집단 무의식 중의 한 커다란 덩어리에 충격을 주었다는 점이다. 19세기 말에 한반도에 들어와 조선인에게 무한정 애정을 쏟았던 헐버트(H. B. Hulbert)는 “한국인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신앙은 원시적인 영혼 숭배 사상”이라고 단정하면서, 이는 “정령설 (精靈說), 샤머니즘, 배물교적(拜物敎的) 미신 및 자연 숭배 사상을 일반적으로 포함”(‘대한제국멸망사(The Passing of Korea)’, 신복룡 옮김, 집문당, 2005, [원본발행년도: 1906], p.469)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 영혼 숭배 사상은 최길성이 소개하고 있는 秋葉隆의 견해(최길성, ‘한국무속의 이해’, 예전사, 1994, p.19)에 의하면 ‘프리애니미즘’과 구별되는 ‘애니미즘’의 특징으로서(그리고 이 견해의 원천은 R.R. Marett의 ‘종교의 문턱The Threshold of Religion’, 1914에 있다. 나는 이 세 단계의 굴곡을 거쳐서야 겨우 한국 샤머니즘의 성격을 알 수 있었다), “동물, 식물, 자연 대상들의 생기”에 대한 믿음인 ‘프리애니미즘’과 달리, “신령스런 존재에 대한 믿음”(Marett)이다. 따라서 한국인의 영혼 숭배 사상은 동물 등의 자연물에 대한 신앙이 아니라, “불승 또는 도사의 옷을 입고 수염을 늘인” “구름을 탄 노인”(秋葉隆)에 대한 신앙으로 나타난다.
이 정보는 한국인들이 무위도식하는 은거자들, 혹은 그런 삶에 대해 무의식적인 선호도가 강력한 이유를 설명한다(그래서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TV 프로가 인기인 것이다.) 한국인에게 그런 존재들은 신비한 진실과 비의를 가지고 있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이런 태도를 일상적 현상으로 옮기면, 건달들에 대한 관용이라고 할 수 있는데, 구자명의 ‘건달바 지대평’은 바로 이런 한국인들의 건달 선호 현상을 직접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 현상을 그대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꼼꼼히 건달들의 행적들을 추적함으로써, 미만한 무위도식주의, 즉 개똥철학으로서의 건달 선호 현상을 넘어서서 건달적 삶의 참된 자세를 찾아가는 구도적인 모험을 개진하고 있다. 그 차이는 아주 큰 것이다. 이 소설이 한국인의 집단무의식을 충격했다는 진술의 의미이다. 독자는 소설의 전개를 따라가는 가운데, 치열한 경쟁 사회인 현대적 삶과 그로부터 벗어나는 무용성의 삶 모두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이주란 ‘별일은 없고요?’
이주란의 ‘별일은 없고요?’(한겨레출판)는 미세한 어긋남에 대한 소설들을 모두고 있다. 이 어긋남은 물론 사람들 사이의 어긋남이고 사람들 사이에 그런 현상이 있다는 것은 각자의 입장에서 상대방이 얼마간 ‘맞지’ 않는다, 즉, ‘편하지 않다’는 뜻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어긋남은 분열과 불화를 야기한다. 첫 소설에서 주인공이 직장을 그만두는 데서부터 시작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그쳤더라면 이 소설집은 그닥 흥미를 끌지 못했을 것이다.
이 어긋남은 절망적 감정을 유발할 수도 있으나, 어쨌든 감정의 여진을 남긴다. 이주란식 인물들은 이 부스러기 감정들을 소중히 보듬고 그것들에서 생의 기미를 다시 지피는 의욕을 보인다. 이 의욕들이 피어내는 생의 작은 파닥거림들은 마치 어둔 밤의 반딧불이처럼, 더 나아가 봄날의 나비 무리처럼 생의 에너지를 증거하고 또 일으키며 삶의 공간에 부산한 생기를 발산한다. 이 작품들의 아름다움은 여기에서 나온다.
다만 이 기미들이 너무 많아서 일관된 흐름으로 모이지 않는 게 이 작품들의 약점이라 할 것이다. 게다가 작가의 섬세한 촉수는 기미들(소설이 이 기미들을 통해 삶과 교섭한다면, 바로 이것들이 소설적 요소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을 과잉적으로 찾아내는데, 이 지나친 섬세함이 아이러니하게도 작품을 지루하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그러니 생의 작은 기미들이란 하나의 일관된 흐름으로 모일 때 속도가 붙고 활기를 띤다는 점을 작가가 유념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전기의 흐름은 순식간이지만, 실제 그 전기를 구성하는 전자 각각의 속도는 달팽이보다도 느리다는 사실(‘월간 뉴톤’ 2023년 6월호 참조)은 그에 대한 맞춤한 비유로 새겨볼 필요가 있다.
◇구효서·소설가
◊구자명 ‘건달바 지대평’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걸까?
소설 읽기를 길 가기에 비유하자면 ‘건달바 지대평’에 나 있는 길은 썩 낯익다고만 할 수 없다. 그렇다고 낯설어 걷기 힘든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잘 읽힌다. 그런데 읽으면서,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건지가 자꾸 궁금해진다.
썩 낯익지는 않지만 썩 낯설지도 않고, 읽기가 어렵기는커녕 잘 읽히는데 고개가 갸웃해지다니.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걸까? 라는 질문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건달이야기다’라며 소설을 시작하고 있으니 무슨 이야기인지 모를 리 없잖은가. 건달 이야기라니 재밌고 박진감 넘치겠다, 기대하며 읽을 수밖에 없는데 소설은 그러나 이 섣부른 기대를 충족시키지 않는다. 미리 그려 본 지도의 길과 사뭇 다른 길들이 펼쳐지는데 ‘건달’에 어울릴 법한, 커브와 굴곡이 심한 길과는 너무도 다른 길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건달바 지대평’의 길은 하염없음에 가깝다. 딱히 할 말을 정하지 않고 시작한 듯한 이야기는 프루스트처럼 느긋하게 꼬리만 물더니, 때로는 몇 갈래로 슬쩍 갈라지다가 슬며시 한 줄기로 다시 모여지고 하면서 독자의 보챔 따위 아랑곳하지 않는다. 보채봤자 소설은 ‘나는 나대로 간다.’는 식인데 아닌 게 아니라 작가는 본문에 장기하의 노래를 인용한다.
이 길이 내 길인 줄 아는 게 아니라 그냥 길이 거기 있으니까 가는 거얏…. 빰빠빰빠…. 원래부터 내 길이 있는 게 아니라 가다 보면 어찌어찌 내 길이 되는 거얏…. 빰빠빰빠….(225쪽)
일반적인 소설의 진행단계를 따르지 않아 뚜렷한 위기나 절정의 부면이 드러나지 않고, 그래서인지 구성이 평면적인 것처럼 보인다. 위기나 절정의 단계를 위해 여타 단계들을 보조 역할에 머물게 하지는 않겠다는 의도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인물들도 선형적인 갈등관계로 잇지 않고 면형적인 보완관계로 겹쳐 쌓아 놓음으로써 지대평과 김천세, 구석희, 황해룡, 박인실, 혜윤, 만수 등의 인물이 하나이면서 여럿이고 여럿이면서 하나인 중첩 내지는 누적 효과를 띠게 한다. 이러한 누적 및 중첩의 효과는 인물들에게만 유효한 게 아니라 사건과 배경이라는 구성의 요소에도 적용되어 각기 다른 사건과 배경임에도 동일한 서사 성분이 반복되는 특수한 전개 양상을 보인다.
이쯤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걸까? 라는 질문이 잘못되었음을 알게 되면서 소설이 이처럼 특별하게 진행되는 이유도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우선은 ‘건달’이라는 말이 요즘 통용되는 ‘조폭’과는 아무 상관도 없을뿐더러 오히려 폭력배와는 극단의 대척점에 자리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당초부터 커브와 굴곡이 심한 이야기는 가당치 않았던 것이다.
소설에서도 언술되다시피 건달이란 ‘하는 일 없이 먹고 노는 자’다. 하지만 행간에는 이런 되물음이 있다. ‘하는 일 없이 먹고 노는 일이 어때서? 먹고 일만 하는 너희들은 스스로 한 번이라도 그런 자신을 되돌아본 적 있니?’
무엇을 위해 먹고 일만 하나. 나를 위해서라면 그 나가 정말 나인가. 혹시 나라고 착각하는 나를 위해 내 희망도 아닌 타자의 희망에 봉사(혹은 희생)하는 삶이 아닌가. 이처럼 건달이란, 하는 일 없이 먹고 노는 자이면서 먹고 일만 하는 자들에게 질문하거나 질문을 유발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리고 본인은 그 질문의 답을 삶으로 실천하는 자.
소설이 ‘나는 나대로 간다.’의 길을 내듯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 또한 그들 식으로 살아가거나 죽어간다. 그런 식으로 가는 사람들 모두 나름 지대평이며 건달이 아닐 수 없다. 정해졌거나, 그래서 마땅히 그래야 한다거나, 마침내 그리할 줄밖에 모르게 된 소설의 전개방식이라는 것이 있듯이 정해졌거나, 그래서 마땅히 그래야 한다거나, 마침내 그리할 줄밖에 모르게 된 삶이라는 게 있지 않을까. 그런 삶이 있다면 나는 그 삶의 주인일 수 있을까. 아니라면 그 삶의 주인은 누구일까. 어디에서 온 나일까.
이 물음에 답을 얻지 못하고는 삶에도 일에도 무턱대고 매진할 수만은 없을 터, 겉으로 먹고 노는 것처럼 보이는 건달의 가열한 번민이 짐작될 만하다.
이제 무슨 이야기인지도 조금은 알겠다. 소설이든 사람이든 무엇에도 속하지 않아 어떤 것에도 구속되지 않는(無何有, 250쪽), 초탈한 단독자 건달의 이야기를 전하는 작품이었던 것이다.
◊이주란 ‘별일은 없고요?’
소설집에 실린 단편 ‘파주에 있는’의 한 장면을 본다. 현경은 파주에 있는 국숫집에 들른다. 처음 간 집이다. 한 아주머니가 다가와 멸치국수가 맛있으니 그걸 먹으라고 한다. 주방의 주인을 가리키며 “내가 쟤 엄마거든.”하고 말한다. 그리고 덧붙인다. “나한테도 국숫값을 받아.”
중간에 현정이 젓가락을 잠시 내려놓았을 때는 억지로 먹지는 마요, 사람은 다 자기 양이란 게 있잖아, 체하면 안 돼, 비도 오는데 아프면 어떡해, 라고 말했다. 일어나려던 현경은 가만히 앉아 있다가 다시 젓가락을 들었다. 아주머니는 먼저 일어나면서 현경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천천히 꼭꼭, 옳지. 비 올 때는 이런 뜨끈한 국수가 또 생각나잖아, 그쵸? 잘게 조각난 김치를 집던 현경은 네, 라고 대답했다.(260쪽)
이런 아주머니는 ‘별일은 없고요?’에 여러 차례 등장한다. 물론 나이도 성별도 이름도 다른 아주머니들이다. ‘별일은 없고요?’의 재섭 씨, ‘사람들은’의 은영 씨, ‘어른’의 아줌마, ‘여름밤’의 준경, 민희, 석구, 은영 씨, ‘위해’의 정호와 유리, ‘이 세상 사람’의 H, D, 캠핑장 사장, 엄마, ‘서울의 저녁’의 재희, 보라, 정연, 성민.
그러고 보니 거의 모든 인물이 아주머니들이다. 비 올 때는 이런 뜨끈한 국수가 또 생각나잖아, 그쵸? 라고 말하는 아주머니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레이먼드 카버)’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
별 얘기가 아니어서인지 이들의 대화는 깊어지지도 길어지지도 않는다.
“그러게.”
“그래.”(265쪽)
대개는 이런 토막 대화다. 깊이 알고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하면 말이 길어질 리 없다.
“연락은 하고 지내자.”
“그래.”
“마음 바뀌면 연락하고.”
“응.”(155쪽)
깊이 알고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해서 길어지지도 깊어지지도 않는 대화를 별 얘기 아니라고 단정할 할 수 있을까. 길지도 깊지도 않은 토막 대화로써 무언가를 충분히 주고받았다면 그것이야말로 별 얘기가 아닐까.
소설집의 표제작도 ‘별일은 없고요?’다. 별 얘기 아닌 토막 대화가 별 얘기일 수 있다면, 별일 없다는 게 별일일 수도 있겠다.
그동안 소설이라는 것은 부지런히 별일을 소개해 왔다. 예사롭지 않은, 낯선 인물과 사건을 찾고 만들어냈다. 차별성을 서사의 생명으로 삼았다. 변별지상주의는, 별일 없고 별 얘기가 아닌 것으로 간주되는 일상성을 떳떳하게 외면했다. 외면하다 아득히 잊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이 슴슴하다고 해서 그토록 얼렁뚱땅 별 볼 일 없는 일로 간주돼버리고 말 게 아니라면, 별일 없는 게 별일일 수 있고, 별 얘기가 아닌 게 별 얘기일 수 있지 않을까.
‘별일은 없고요?’에 등장하는 모든 단편의 주인공 화자뿐만 아니라 각각 아주머니로 호명될 많은 등장인물들은 어딘지 모르게 모라토리움이랄까, 생의 고비를 지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간해서는 끝날 것 같지 않은 실직과 이별과 죽음과 기숙의 사태들을 마주한 인물들은 예상했던 만큼의 번민에 휩싸이지 않는다. 신자유주의 욕망의 구조에서 빗겨나 있기라도 한 듯, 박탈과 불행의식에 시달리는 대신 일종의 정서적 독립 상태마저 유지하고 있으니 어찌 별일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짧고 얕은 대화가 길고 깊은 이해와 공감의 반영으로 읽힐 수 있는 것처럼, 섣부른 번민과 불행의 기색을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인물들이 얼마나 자신의 존재를 위해 최선을 다해 힘쓰는지를 에둘러 알 수 있게 하는 것. 이주란의 소설들은 이 지점을 솜씨 있게 획득해낸다.
그것은 독자들에게 전달되기에 앞서 인물 상호간에 공유됨으로써 타인에 대한 배려와 그로인한 유대로 이어지며 소설은 여름 꽃잎 같은 빛깔로 피어난다. 우리 서로가 다 그렇다는 걸 진심으로 깨닫지 않고는 띨 수 없는 빛깔.
이 행성에 사는 한 언제까지고 숙명으로 견뎌가야 할 중력과 같은, 끝내 내려놓을 수 없는 삶의 무게를 깨닫는다는 건 어쩌면 허무한 일일지도 모르나, 또한 그렇다는 것을 알기에 우리는 두려울 만큼 강인해지는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인가, 이주란의 소설은 위로 쿠폰보다는 비장성(悲壯性) 보험에 가깝다.
◇이승우·소설가
◊구자명 ‘건달바 지대평’
구자명에 의하면, 건달바는 ‘향기만 먹고 노래를 부르며 살다가 제 인연이 다하면 소멸하는 존재’(258쪽)이다. 힌두교와 불교 신화에 등장하는 이 인물로부터 건달이라는 단어가 나왔다. 소설의 주인공인 지대평은 스스로를 건달이라고 말하고(‘나는 건달이다.’가 이 소설의 첫 문장이다), 건달에 대한 은근한 자부심까지 곳곳에서 내비치는데, 그러면서도 작가가 책의 제목을 ‘건달 지대평’이라고 하지 않고, ‘건달바 지대평’이라고 한 데에 뜻이 없지 않을 것이다. 짐작하자면, ‘하는 일 없이 놀고 먹는 사람’ 정도가 아니라 ‘난봉을 부리고 폭력을 휘두르며 남을 괴롭히는 사람’으로, 어원에서 한참 벗어나 잘못 쓰이고 있는 ‘건달’이라는 단어의 명예가 회복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어 있는 것 같다. 건달은 해로운 사람(신분)이 아니라 향기와 노래의 사람(성향)이라는 것. 그러니까 이 소설은 건달을 자처하는 한 인물의 자기 고백이면서, 진짜 건달(향기만 먹고 노래를 부르며 살다가 제 인연이 다하면 소멸하는)을 향한 기원이고, 또 진짜 건달로 살기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기록으로 읽을만하다.
“하여간 나는 언제까지나 건달로 살아갈 작정인데, 자처한 건달로서의 이 삶도 예기치 못한 변수와 복병적 요소로 가득차 있음을 남들은 알까? 그래서 행여 건달의 본질인 한가로움을 본의 아니게 잃게 되는 상황이 닥칠까 봐 걱정도 한다는 것을 알까?”
이 문장에 이 인물의 그런 마음이 그대로 담겨 있다. 진짜 건달로, 향기만 먹고 노래를 부르며, 그러니까 한가로움을 추구하며 사는 것이 왜 어려운가? 세상이 복잡하고 사나워졌기 때문일 것이다. 건달이라는 단어의 쓰임새가 변해온 것과 통한다. 향기와 노래, 즉 한가로움을 추구하는 사람은 욕망이 없거나 적은 사람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욕망은 한가로움을 극복해야 할 악으로 간주한다. 한가로움은 더 이상 허용되지 않는데, 그것은 세상이 욕망으로 넘쳐나고, 욕망을 부추기고, 끊임없이 욕망을 창출하기 때문이다. 욕망이 없거나 적은 사람의 생존을 세상이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부적격자가 되고, 패배자가 되고, 더 나아가 위험한 인물로 규정된다.
그래서 반성 없이 미쳐 돌아가는 비정상의 무서운 세상에서 구자명의 이 인물 건달바 지대평은 우뚝하다. 그는 마치 세상의 흐름에 역행하는 예언자가 불온한 것처럼 불온하다. 그것은 지대평의 건달론이 인간성이 배제된 신선의 경지를 상상하거나 감정의 무화를 겨냥하거나 한량의 무위도식을 실천하는 것과 거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주변과 교감하고 쓸모없음의 쓸모를 의식하며 뿌듯해하는 것이어서, 신분이 아니라 성향, 사욕과 물욕에 붙들리지 않는 어떤 정신의 영역을 추구하는 것이어서 이 무한경쟁의 시대 대항적 모델로 제시할만 하다.
◇김인숙·소설가
◊이주란 ‘별일은 없고요?’
감상평을 써야겠다. 이주란의 신작 소설집 제목은 ‘별일은 없고요?’이다. 독자들이 소설을 읽는 것은 무릇 ‘별일’을 찾아서가 아닐까. 그 ‘별일’이 아주 대단한 것이든, 누군가의 아주 사적인 것이든 어쨌든 별일은 별일인 것. 그러나 이주란의 소설은 ‘별일은 없고요?’라는 질문에서 시작하여 ‘별일은 없어요’로 끝이 난다. 이토록 심상한 소설이란. 심심한 것이 아니라 심상한 소설. 사전을 찾아보니 심상하다는 말은 대수롭지 않고 예사롭다라고 되어 있다. 이주란의 소설은 분명히 그러한데, 대수롭기도 하고 예사롭지 않기도 하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읽힌다. 실은, 살아가는 일이, 바로 그러하므로.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은 일들 속에서 벌어지는 것들. 그것은 마음의 동요일 수도 있고, 그로 인해 한 발자국 떨어져 바라볼 수 있게 된 시선의 거리일 수도 있겠다. 그래서 이주란의 소설 속 별일은 별일 아닌 것들 속에서 발화한다. 말하자면 이런 문장. “나는 낮잠을 자고 저녁에 깨어난 뒤로 다시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심심한 문장 속에서 우리는 이주란이 굳이 숨겨두지도 않고 거기에 가만히 놔둔 시간과 풍경과 마음에 시선을 기울이게 된다.
“별일은 없고요? /기차타고 조금 오는데 별일은요/ 아무튼 잘 가셨다니 마음이 놓입니다/ 저도요.”
다시 또 말하자면 마지막 문장 ‘저도요’에 이르게 하는 소설. 숱하게 별별일을 겪고 사는 우리들에게 다가오는 위로. 따뜻함. 소설이 무릇 이래도 되는가? 묻고 싶어지다가, 그 무릇을 모두 지워버리는 배짱에 놀라버리다가, 그러면 어때 하게 되는 마음. 저도요, 하고 싶어지는 마음.
◇김동식·문학평론가
◊구자명 ‘건달바 지대평’
구자명의 ‘건달바 지대평’은 지대평이라는 매우 독특한 인물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건달 지대평에 관한 이야기이다. 일반적으로 깡패, 백수, 한량, 양아치 등과 함께 이야기되는 일이 많지만, 불교적 기원을 드러내는 건달바라는 명칭을 통해서 깡패, 백수, 한량, 양아치 등과는 분명하게 구별되는 건달의 진정한 모습을 탐색하고자 하는 의지가 엿보인다. 건달은 폭력을 사용하는 깡패와 구별되며, 사회적 관계를 거부하는 은둔형 외톨이와도 다르다. 유흥을 좇으며 탕진으로 나아가는 한량과도 구별되고, 양아치처럼 타인의 도움을 구걸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건달은 무엇인가. 건달은 사회적으로 소속된 곳도 없고 사회적으로 하는 일도 없는 사람이다. 세속적 사회를 벗어나 탈속의 경지를 지향하지도 않지만, 세속적인 사회가 나를 구원해 줄 것이라고 기대하지도 않는다. 엄마나 누나와 같은 가족은 있지만 아내와 자식이 있는 가정은 없고, 먹고 살아야 하는 생활인이지만 의식적으로 직업이나 생계노동을 찾아 나서지 않는다. 사회적 구원을 기대하지 않기에 특정 집단에 소속되어 목소리를 내지는 않지만, 인간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과는 진정성을 가지고 교제하고 교감한다. 소설에서 건달을 하나의 인물로 형상화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건달은 X다라는 긍정적인 언급이 아니라, 건달은 Y도 아니고 Z도 아니라는 부정적인 언급들을 통해서만, 건달의 면모가 겨우 드러나기 때문이다. 숨이 턱턱 막히는 상황에 마주하고 나서야 공기의 존재를 감지하지 것처럼, 사회적인 소속도 기능도 없는 건달 지대평의 모습은 역설적으로 사회적인 것들에 대해 성찰할 수 있는 여백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사회적 무기능성을 사회적인 죽음과 같은 것으로 여기는 현대사회에서, 지대평의 사회적 무기능성은 기존의 사회적인 것과 구별되는 또 다른 사회적인 것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준다. 지대평이 건달로서 추구하는 것은 자신의 고유한 템포에 맞추어서 자신의 삶을 흐르는 물처럼 이끌어가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개인은 어떠한 양상으로 존재해야 하며 사회와는 어떠한 방식으로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라는, 살아가는 데 있어 아무짝에도 쓸모없지만 너무나도 근원적인 물음으로 우리로 이끈다. 최근의 한국소설에서 쉽게 접하기 어려웠던 캐릭터인 건달을 만났다. 문학상 심사를 위해 한번은 더 건달과 마주해도 좋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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