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플라자] “내가 꿈꾸던 몸을 가진 여성들은 모두 그곳에”
사람들이 서로 몸을 부딪치며 몸싸움하고, 도끼로 장작을 패고, 창문을 깨고 적의 기지로 쳐들어가 승기를 들어 올린다. 동료의 몸을 태운 채 레그프레스를 하고 세 손가락으로 턱걸이를 여러 차례 반복한다. 익숙한 장면인가? 그 주체가 모두 여성이라는 점을 앞에 덧붙여 본다면 당신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새로운 장면일 것이다.
주변이 온통 ‘사이렌: 불의 섬(넷플릭스 시리즈·이하 사이렌)’ 이야기뿐이다. 나는 약간 청개구리 같은 면이 있어서 사람들이 입 모아 맛있다고 하는 맛집은 가지 않는다거나, 최고로 흥행하고 있는 영화는 굳이 보러 가지 않는 편이다. 요즘같이 콘텐츠 홍수 시대에 친구들은 다 봤는데 나만 안 본 목록은 A4 용지에 가득 채우려 해도 모자람이 없을 정도다. 그런 내가 결국 사이렌을 보기로 마음먹은 것은 인터넷에서 우연히 출연자가 운동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세 손가락으로 턱걸이를 가볍게 하는.
나는 자타가 공인한 ‘종이 몸’이다. 학창 시절 체력장 철봉 매달리기를 3년 내내 3초로 마무리한 이력이 있다. 나와 함께 종잇장으로 20대를 보낸 친구들도 30대에 들어서며 하나둘 운동을 시작해 이미 몸짱이 된 친구도 몇 있지만 아무도 내게 ‘나도 운동해 볼까’ 하는 자극을 줄 수는 없었다. 그 어려운 걸, 사이렌이 해냈다.
사이렌 내용을 간단히 소개하자면 ‘불의 섬’이라고 하는 섬으로 총 여섯 직업군으로 나뉜 여성 24명이 모여든다. 경찰팀, 군인팀, 운동팀, 소방팀, 스턴트 배우팀, 경호팀. 그들은 일주일간 불시에 사이렌이 울리면 번쩍 일어나 전투복을 갖춰 입고 서로 기지를 빼앗기 위해 공격을 나간다. 사실 규칙은 간단하다. 여성들이 각자 팀을 나눠 기지를 공격, 수비하는 것.
제작진은 계속해서 체력 대결을 붙인다. 삽 하나씩 던져주고 수십 미터 아래 우물을 파는 임무를 주거나, 장작 30덩이를 팀원 넷이 나눠서 쪼개는 의리 게임 미션을 준다. 나는 홀로 고민하고 있었다. 내가 만약 장작 미션에 참가한다면 도대체 몇 번째 순서에 나가는 것이 팀에 민폐가 가장 덜 될까. ‘맨 처음 나가서 하나라도 쪼개고 다음 순서로 바로 넘겨야겠다’고 상상하는데, 다친 팀원을 배려해 혼자 모든 장작을 다 패버리는 출연자를 보고, 나는 천하의 의리 없는 놈이 됐다.
끊임없이 그들의 전투에 ‘나’를 대입하게 된다. 공격에 나서자마자 근력 부족으로 단칼에 제압되는 건 당연하다. 아마 내 사운드의 절반 이상이 콜록거리는 소리 아닐까? 일주일을 거의 야산에서 노숙한 팀들에서도 그 흔한 기침 소리 하나 나지 않는다는 점이 경이로울 정도였다.
아프지 않으려면 정말 운동해야 하는구나. 운동을 권고하는 수많은 책, 유튜브 영상을 보고 자라왔지만 모두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나는 오히려 운동하면 몸이 박살 날 것처럼 아팠으니까, 책에서 하는 말이 반쯤은 거짓말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사이렌을 보고 무인도에서 그 고생을 하고도 아무도 몸살이 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눈치채고는 책에서 하는 말들이 참이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휴대폰을 들어 유도부터 크로스핏, 권투 따위 온갖 키워드를 검색했다.
친구들과 함께 고강도 근력 훈련장에 갔다. 내가 꿈꾸는 몸은 모두 그곳에 있었다. 내가 꿈꾸는 몸은 계속해서 변화해 왔다. 학창 시절엔 소녀시대 스키니진에 꼭 맞는 몸이었고, 그다음은 크롭티에 어울리는 몸이었다. 타고난 뼈대가 있어 그런 옷에 몸을 맞추려면 뼈를 깎아내야 하는 형편이지만 끊임없이 열망했다. 365일 내내 다이어트를 염두에 두고 맛있는 것을 먹을 때마다 죄의식을 느끼며 온갖 다이어트 약을 찾아 먹고 다녔다. 만약 내가 그때 인기 가요가 아니라 사이렌을 보고 자랐다면 어땠을까. 나는 지금보다 조금 더 건강하고, 잔병치레를 덜 하고, 한정된 체력 때문에 미뤄둔 가족·친구들 만나기를 자주 할 수 있었을까?
이제 사이렌을 보고 자라날 소녀들은 얼마나 더 강해질 수 있을까. 나는 얼마나 강해질 수 있을까. 갈비뼈가 드러나 앙상한 몸 외에도 다양한 몸을 가진 여성들을 미디어가 계속해서 보여주기를 바란다. 여성들이 한 가지 보기만 있는 정답 같은 몸을 열망하지 않고 각자가 꿈꾸는 몸을 골라 잡아각자의 체격에 맞는 신체를 가꾸어 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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