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의 눈] 권력자의 수능 지침

오창민 기자 2023. 6. 29. 03:05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출제기관인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쑥대밭이 됐다. 윤석열 대통령은 어디서 누구에게 들었는지 수능 출제자들이 사교육업자의 배를 불리기 위해 그동안 ‘킬러 문항’(초고난도 문제)을 출제했다고 단정하고 있다. 6개월밖에 안 된 교육부 대입 담당 국장을 경질하고, 평가원 감사에 돌입했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강력한 이권 카르텔의 증거로 (교육부 국장) 경질을 예의주시할 필요가 있다”는 말까지 했다. 전임 정부에서 임명된 이규민 평가원장은 사퇴했다. 현 정권의 주특기인 검찰 수사도 초읽기에 들어갔고, 새 평가원장에는 검사가 임명되는 것 아니냐는 우스갯소리가 돌고 있다.

오창민 논설위원

평가원 관계자들은 말을 아꼈다. 윤 대통령이 무섭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수능 관련 사항이 모두 기밀이어서 보안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평가원의 전직 고위 관계자 A씨는 “수능에서 킬러 문항을 내고 싶은 출제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라며 “제도의 문제인데 사람에게 책임을 물으면 어떡하냐”고 말했다. 또 다른 전직 관계자 B씨는 “학교 교육과정과 수능 변별력의 양립은 수십년간 나의 가슴을 짓누른 숙제”라며 “후배들이 고생할 것을 생각하니 속이 문드러진다”고 했다. 대학교수 C씨는 “평가원의 수능 출제 참여 요청이 와도 앞으로는 응하지 않을 생각”이라며 “괜한 오해를 받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전 평가원장 D씨는 교육부에서 대안으로 제시한 공정수능자문위원회에 관해 “출제 작업이 극도의 보안 속에서 이뤄져야 하는데 자문을 하겠다는 것 자체가 난센스”라고 했다. 수능 검토위원 경험이 있는 고교 교사 E씨는 6월 모의평가 결과가 윤 대통령 언급과는 딴판으로 나왔다는 점을 지적했다. “윤 대통령은 킬러 문항으로 국어 비문학 문제를 콕 집어 말했지만 해당 문제의 정답률이 30%를 넘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윤 대통령은 킬러 문항의 사교육 유발 폐해를 강조했지만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렸다. 킬러 문항 관련 사교육은 줄지만 수능 전반의 사교육 수요는 감소하지 않을 것이다. 사교육의 연원은 수능 문항의 난도가 아니라 수능에 걸려 있는 사회의 보상 몫이 너무 크다는 데 있기 때문이다. 명문대 합격증은 물론이고 취업과 승진, 결혼 등 남은 생애의 각종 기회가 수능 성적에 좌우되는데 한 문제라도 더 맞히고 더 빨리 풀기 위해 경쟁해야 하는 한 사교육은 수그러들기 어렵다.

수능 문항이 학교 수업과 괴리돼 있다는 비판도 출제자 입장에서는 억울하다. 수능의 태생적 한계이기 때문이다. 수능은 국어·수학·영어 비중이 절대적으로 높고, 실기나 논술 등은 포함되지 않는다. 학교 교육은 다양하게 이뤄지지만 수능은 수십만명의 수험생이 한날한시에 모여 일제히 똑같은 시험지를 푸는 획일적 방식이다. 교육 주체들과 국가는 수능에 많은 것을 요구한다. 고교 졸업 자격을 평가하고, 동시에 대학에서 공부할 능력이 되는지 측정할 수 있어야 하며, 성취도가 낮은 학생들에게는 학습 동기를 불러일으키면서도, 성취도가 높은 학생들을 위해 비판적 사고와 교과의 융합을 지향하는 문제가 출제돼야 한다는 것이다.

킬러 문항이 사교육을 유발하고 학생들에게 부담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수능의 변별력 약화에 따른 부작용도 만만찮다. 특히나 수능을 5개월 앞두고 불쑥 떨어진 윤 대통령의 출제 지침으로 수험생들은 큰 혼란에 빠졌다. 지난 15일 이후 연이어 나온 대통령실과 교육부의 설명 등을 복기하면, 윤 대통령이 과연 자신의 지시와 발언이 불러올 파장을 제대로 가늠했는지 의심스럽다. 교육부의 예시와 설명에도 킬러 문항의 개념과 기준은 여전히 애매하다.

많은 사람들이 올해 입시가 제대로 치러질 수 있을지 걱정하고 있다. 사교육업체들은 학생·학부모의 불안감을 자극해 ‘준킬러 문항’ 설명회를 여는 등 마케팅에 열을 올리고 있다. 공정한 입시제도의 핵심은 사전 예측 가능성이다. 아무런 논의도 없이 권력자의 한마디에 입시의 룰이 바뀌었는데 이를 ‘공정 수능’으로 포장하는 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격이다. 중심을 잡아야 할 이주호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저도 많이 배운다”며 윤 대통령을 치켜세우기 바쁘다. 그리고 이 와중에 자율형사립고·외국어고 체계를 유지하고 학업성취도평가를 전면 확대하기로 했다. 사교육 유발 총량으로 보면 자사고는 킬러 문항을 압도한다. 진지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 사교육업체와 이권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는 세력은 과연 누구인가.

오창민 논설위원 riski@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