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를] 관계를 유지하는 사소한 예의

기자 2023. 6. 29.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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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경 5㎞ 안에 모여 살게 된 덕분에 하루가 멀다 하고 만나며 의기투합했던 친구들이 있다. 2년 전 한 친구가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허전했는데 이번에 한국에 잠시 오게 돼 오랜만에 여행을 갔다. 푸른 자연 속에서 잘 쉬다 왔는데, 여행 중 몇몇 장면의 여운 때문인지 친밀한 사람들과의 여행, 관계에 대해 잔상이 남았다.

남경아 <50플러스 세대> 저자

여행은 익숙했던 일상,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힘이 있다. ‘다르게 만나기’ ‘다르게 보기’가 가능한 게 여행이다. 평소에는 잘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이기도 하고, 쉽게 꺼내지 못했던 이야기가 술술 나오기도 한다. 또 크건 작건 여행은 선택과 결정의 연속이다. 어디로 갈까 장소를 정할 때부터 시작된다. 지인 중 한 분은 친구들과 단톡방에서 해외여행을 어디로 갈까 의논하다가 옥신각신 의견 충돌로 포기했던 일화를 들려주었다. 아무리 친한 관계여도 식당, 카페 추천을 먼저 하는 건 꽤 용기가 필요하다. 일정과 코스를 짤 때도 보이지 않는 신경전을 피하기 어렵다. 그래서 여행은 ‘친밀한 관계의 시험대’가 되기도 한다. 여행을 통해 더 돈독해지기도 하지만 가끔은 그 반대도 생긴다. 이런 이유로 친밀한 관계일수록 여행도 연습이 필요하고, 무언의 약속, 규칙 같은 것들이 필요하다.

내 경험으로 가장 유익했던 방법 중 하나는 ‘따로 또 같이’를 유지하는 거다. 일정이 길든 짧든 이 방법은 꽤 유효하다. 쇼핑은 하고 싶은 사람끼리, 각자 체력에 맞춰 걷고 싶은 만큼 걷기, 아침밥은 먹고 싶은 사람만 먹기 등. 이럴 거면 왜 같이 가냐 반문할 수 있겠지만 몇번 해보니 확실히 덜 피곤하고 만족도가 높았다. 이번 여행에서도 숲길을 걸었을 때 발목이 부실한 나는 중간까지만 걷고 혼자 먼저 내려왔다. 이미 이런 방식에 익숙해 있었기에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가족들과도 마찬가지다. 라이프스타일이 너무 다른 아들과 단둘이 여행을 갈 때면 방도 따로, 오전 일정은 각자 하는 식이다. 잔소리할 일도 없고 서로 리듬을 유지하면서 세상 편하고 좋았다.

이십년, 삼십년 오래된 친구들 간에도 각자의 처지, 환경에 대한 차이로 가끔씩 미묘한 기류가 흐를 수 있다. 퇴직한 사람, 대출에 허덕이는 사람, 부모 돌봄으로 늘 좌불안석인 사람, 만성질환으로 힘들어하는 사람, 자식 문제로 애간장을 태우는 사람 등. 평상시와는 달리 여행이라는 시공간에서는 이런 민감한 이야기도 술술 나오기 쉽다. 어찌 보면 아킬레스건에 해당되는 이런 얘기가 나왔을 때는 그저 말없이 대나무숲이 되어주는 게 최고의 지혜다. 어설픈 충고는 금지다. 이번에 이걸 잠시 망각하고 사족을 달려다 한 친구를 서운하게 했다. 돌아와서 내내 찜찜했다.

건강과 행복, 삶의 만족도에 가장 중요한 요소는 양질의 사회적 관계다. 노년에 가까울수록 가장 중요한 인물은 멀리 사는 형제보다 가까운 친구들일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 모두 불완전한 인간들이기에 익숙함, 친밀함에서 오는 리스크도 늘 따라다닌다. 친밀한 관계일지라도 한 번씩 자신만의 동굴에서 안 나오고 싶고, 명랑한 척하느라 힘들 때가 있다. 그럴 땐 적당한 거리와 시간이 특효약이다.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산다는 건 늘 시시콜콜해 보이는 훈련과 예의를 쌓아가는 과정이 아닐까?

남경아 <50플러스 세대>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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