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칼럼]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왜 걱정하고 있나?
원인 있으면 결과도 있는 것, 지혜 모아 원인 최소화해야
박선정 인문학당 달리 소장
“그는 우리를 기형 박물관이라고 불리는 곳으로 데려간다. 태아들로 가득 찬 전시 항아리들이 길게 줄지어 있는 방. 그중 몇몇 태아들은 하인츠 케첩 병 안에 보존되어 있다. 머리가 둘 있는 것도 있다. 머리는 하나지만 크기가 몸의 두 배인 것도 있다. 머리 모양은 정상이지만 잘못된 곳에 자리를 잡은 것도 있는데 오른쪽 어깨 위에 붙어 있는 것도 있다.” 세계적 미국 작가인 돈 드릴로의 1997년 소설 ‘언더월드’에 나오는 구절로, 소설 속 주인공이 방문하는 구소련의 한 기형 박물관을 묘사한 장면이다.
‘언더월드’는 거의 1000페이지에 달하는 긴 호흡으로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주제를 다양한 소재 및 사건들과 인물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드릴로의 최고작이다. 소설에서는 인류가 쓰고 버리는 ‘쓰레기’와 순식간에 전 세계를 하나로 연결해 놓는 ‘인터넷’, 그리고 ‘모든 기술은 핵과 폭탄으로 귀결된다’는 설명으로 압축된 ‘핵’ 및 그 생성과 처리 과정에서 발생하는 ‘핵폐기물’ 등을 다루고 있다. 작가는 이를 통해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어떻게 우리와 연결되어 있는지를 말하고자 한다. 소설의 제목인 ‘언더월드’ 즉 ‘지하세계’의 함의이기도 하다. 쓸모없거나 위험하다고 판단하여 우리가 묻어버리고자 하는 것들이 영원히 묻힌 채 그곳에 가만히 있을까 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보이지 않는 지하세계의 것들이 어떻게 지상, 즉 보이는 곳에 사는 우리를 역습할 수 있는지’에 대해 경고하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며, 안전하다(또는 할 것이다)고 믿는다 해서 영원히 안전할 수 있는 것도 아님을 말이다. 하지만,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언제나처럼 작가의 역할은 우리가 망각하고 있던 문제를 꺼내는 일이다.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은 과학자들이나 정치인들이나 살고 있는 우리의 몫이고 판단이다. 이 또한 과도한 우려일 수도 있고 일어나지 않을 일에 대한 섣부른 경고일 수도 있다. ‘경고’는 늘 ‘괴담’일 가능성과 부담을 안고 있다.
1986년 4월 26일 새벽 1시 23분 45초. 당시에는 구소련이 지배하고 있던 우크라이나의 체르노빌에서 검은 연기와 푸른 불빛이 솟아오른다. 현재까지도 죽음의 땅으로 남아 있는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의 원자로 4호기가 폭발한 것이다. 그러나 인근 지역 주민들은 이 불길의 의미를 몰랐기 때문에 한밤중에 하늘을 뒤덮은 보기 드문 불꽃을 구경하기 위해 다리 위에 모여든다. 그리고 그로부터 수년 안에 그들은 모두 방사능 오염으로 인한 질병으로 사망한다.
이보다 훨씬 이전인 1949년 8월 29일. 당시 구소련의 한 지역이던 카자흐스탄의 세미팔라틴스크에서는 첫 번째 핵실험이 진행되었다. 그 이후 456회나 되는 핵실험의 결과로 실험장에서 약 200㎞ 반경 이내의 주민들마저 모두 피해를 보았다. (참고로 부산에서 서울까지의 거리가 428㎞다) 대략적인 사망자 수가 50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그런데도 이곳 주민들은 훗날 정치적 상황이 바뀌게 되면서 비로소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를 알게 된다. 이로써 첫 핵실험 이후 거의 반세기가 지난 1991년에서야 이곳 핵실험장은 문을 닫는다. 그때까지 그들은 ‘그곳에 무엇이 존재하는지를 몰랐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몰랐기에 평화로웠다.
핵실험장이 폐쇄된 지 30년이 지난 이 지역은 지명만 바뀐 채 여전히 사람들이 살고 있다. 그곳에는 핵실험 과정에서 만들어진 거대한 웅덩이에 물이 고이면서 커다란 호수가 생겨났다. 그리고 그 호수에는 물고기들을 비롯한 다양한 생명도 산다. 기형의 괴물들이 살아야 할 것 같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그리고 그 호수에는 낚시하는 현지 주민들의 모습도 보인다. 정부와 전문가들이 ‘공기도 물도 모두 안전하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런다고 주민들이 그곳에서 잡은 물고기들을 가족들에게 먹이지는 않는다. 대신에 자신들이 키우는 가축이나 동물의 먹이로 준단다. 누가 그 가축을 먹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최근 영화로도 제작된 드릴로의 1985년 소설 ‘화이트 노이즈’에서는 유독가스를 실은 트럭이 전복되면서 가스가 유출되는 사고가 등장한다. 이로 인해 인근 주민들이 대피하는 소동이 벌어지지만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나고 모두 일상으로 복귀한다. 그 사건 내내 주인공은 그 유독가스가 자기와 가족에게는 전혀 영향을 끼치지 않을 거라고 거듭 확언한다. 그러나 작가는 그의 확신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런데도 소설은 마트에서 장을 보고 있는 주인공의 평온한 일상으로 끝난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님을 우리는 안다. 이처럼 드릴로의 소설은 보이지 않는 많은 것들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그 결과는 어떤 형태로든 일어날 것이라고 말이다. 그게 언제인지 모를 뿐이다. 그러니 모든 지혜와 힘을 다해서 그 원인을 최소화하라고 말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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