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 와칸다 포에버?

기자 2023. 6. 29.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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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팬서>를 봤을 때 일이다. 마블 영화는 챙겨보던 시절이기도 하고, 첫 아프리카계 영웅도 등장하지, 부산도 나온다지 구미가 당기는 부분이 많았다. 더구나 고양잇과 계열의 영웅이 아닌가! 고양잇과로 변신하는 영웅은 무조건 옳다.

장지연 대전대 혜화리버럴아츠칼리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막상 영화를 보고 나서는 당황스러웠다. 물론 영화는 재밌게 보았다. 액션도, 무기도 멋있었고, 여장군과 전사들도 다 매력적이었다. 그렇지만 일단 ‘와칸다 왕국’은 도대체 뭔가 하는 의문이 들어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첨단 과학기술을 갖춘 부유한 국가라는 배경과는 어울리지 않게, 부족 연맹체 같다. 블랙 팬서가 되는 계승자는 바로 국왕이 되는 것도 아니고 왕위 계승 때 주변 부족들이 모여 벌이는 싸움 의례를 통과해야 한다. 부계 혈통으로 바로 왕이 되는 것도 아니고, 싸워서 이기기까지 해야 하고. 저 동네의 왕위 계승 원리는 무엇인가 하는 의문과 함께 우리나라의 건국 설화들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저 동네는 아직 사로6촌인가? 아니지, 여기는 다섯 부족이니까 고구려나 부여 같은 5부로 구성된 건가? 국왕이 나왔으면 끝인데, 왜 매번 왕위 계승 때마다 싸움 의례를 펼치는 거지? 혁거세를 맞이하긴 했는데 아직 박·석·김, 세 성씨 사이에서 왕위가 돌아가던 것 같은 상태인 건가?

역사 덕후스러운 상상은 둘째 치고 마음에 걸린 건 이 이야기의 구조가 전혀 낯설지 않다는 점이었다. “모르셨겠지만 아프리카에는 첨단 과학기술을 가진 숨겨진 왕국이 있었답니다”라는, ‘과학기술의 진보가 이끈 근대에 뒤처진 후진적 아프리카’라는 이미지를 정확히 반대로 뒤집는 서사 말이다. 거기에 이곳에서 독점하는 비브라늄이 캡틴 아메리카의 방패에 쓰였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결국 미국 백인 문명도 아프리카에서 지켜줬다는 이야기다.

이 영화는 미국의 아프리카계 사람들에게 힘을 불어넣어준다고 칭송받았다. 대중 미디어에서 언제나 백인 영웅만 제시했던 것에서 벗어나 흑인 단독 영웅이 등장하며 아프리카계 어린이들도 적절한 역할 모델을 얻을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분명 그러한 장점이 있겠다 싶으면서도 마음 한편이 복잡해졌다. 저런 이야기는 결국은 자원을 독점하고 과학기술을 가지고 있어야 인정받을 수 있다는 제국주의 강자의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적을 제압한 트촬라는 평화적이고 온건한 방법으로 세계에 개입하는 것으로 영화가 마무리된다. 현재의 문제적 구조는 거의 건드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지극히 개량적이고 보수적이다.

이러한 이야기 구조가 탄생한 이유는 충분히 이해가 간다. 우리 사회 일각에서도 이런 유의 서사를 통해 식민지 역사로 무너진 자존심을 회복하려고 하는 걸 봐왔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고대에 유라시아의 서쪽 끝에서 동쪽 끝에 걸치는 대제국을 건설한 민족이다!’라는 주장 같은 것이랄까. 이러한 주장을 열심히 펼치면 어떻게 되는가? 결국 강자의 논리에 강렬히 포섭되게 된다. 그래서 종국에는 그 강자에게 망한 나라 조선이 너무너무 밉고 싫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그 조선을 망하게 한 나라를 찬양하는 역설에 이른다. 세상은 좋음과 싫음, 선과 악으로 단순화되고, 합리적 비판의 수용 같은 건 안드로메다로 가버린다.

어떻게 해야 이런 서사를 극복할까? 과거의 잔재가 사라져 현실이 좋아지면 사라질까? 세계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네 마네 하는 나라가 되었어도 저런 주장이 사라지지 않는 걸 보면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은 것 같다. 이런 문제를 지적하는 연구를 하고 교육을 잘 시키면 될까? 학계에서 수십년간 연구를 하고 그렇게 얘기를 해도 신뢰하지 않고 틈만 나면 공격해오는 걸 보면 그것도 아닌 것 같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사람들 마음속의 와칸다를 사라지게 할 것인가? 고민이 많아지는 철이다.

장지연 대전대 혜화리버럴아츠칼리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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