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시름에 겨운 강사들…오로지 아프기만 할 수 있기를
아플 때 다른 걱정 없이 아플 수만 있어도 축복이다. 한 20대 화장품 판매원이 심각한 어지럼증을 겪으면서도 사업주로부터 병가를 승인받지 못해 출근을 계속하다가 뇌출혈로 쓰러져 사망했다. 두 달 전부터 입원치료가 필요하다는 의사의 강력한 권고가 있었으며, 머리와 다리가 너무 아파 서 있기도 힘들다고 호소할 지경이었는데도 휴가를 사용할 수 없었다고 한다(경향신문 6월5일자 ‘청년 목숨 앗아간 ‘아파도 출근’). 생계 걱정과 실업 불안은 죽음을 넘나들 때까지 그를 괴롭혔을 것이다.
그가 인력파견업체 소속의 불안정 노동자 신분이 아니었다면 끔찍한 불행을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정규직의 59.8%는 팬데믹 상황에서 코로나 감염으로 유급병가를 사용할 수 있었지만, 비정규직은 26.9%만 사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경향신문 5월21일자 ‘비정규직 27%만 코로나19 확진 때 유급휴가’). 아프면 쉴 권리가 비정규직에겐 정규직의 절반만큼만 허용돼 있는 것이다. 국제노동기구(ILO)가 아프면 쉴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상병수당을 권고한 해가 1952년임을 상기하면, 우리나라의 노동자 특히 비정규직이 겪는 재앙이 얼마나 시대와 부합하지 않는 일인지 알 수 있다.
대학 강사에게는 병가라는 제도가 아예 없다. 학생이 질병으로 결석하면 출석이 인정되지만, 강사가 휴강을 하면 반드시 보강을 해야 한다. 주말에 보강을 하면 학생들의 원성을 사게 되고 평일에는 다른 수업을 고려해야 하므로 보강시간을 확보하기가 쉽지 않다. 결국 어지간한 통증은 참고 강단에 설 수밖에 없다. 하루이틀 앓고 일어설 수 있는 질병이라면 어떻게든 수습해 보겠지만, 1~2주 이상 병상 신세를 지게 된다면 수습이 불가능하다.
이 때문에 대학 강사들은 학기 중간에 상당 기간 치료가 필요한 질병을 앓게 되면 대개 사직을 한다. 사직 후 대학에서 대체강사를 긴급 채용해 잔여 수업을 이어나가게 하는 방법 말고는 제도적 해결 방법이 없다. 출산을 앞둔 강사도 대부분 직전 학기에 사직한다. 근로기준법에 출산휴가가 의무조항으로 명시돼 있어도 대학에는 제대로 활용할 여건이 갖춰져 있지 않기 때문에 학과장과 대학본부의 따가운 눈총에 시달리다 출산을 하느니 경력단절을 선택하는 것이다.
하물며 제도 자체가 없는 병가를 써야만 하는 상황이 강사에게 닥치면, 대학과 학생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너무도 당연한 일처럼 홀로 불행을 짊어지고 강단을 떠난다. 아무도 드러내놓고 강요하지 않는 것 같지만 제도를 만들지 않은 대학과 사회가 부작위에 의한 강요를 하는 것이다. 아픈 강사는 생계가 바닥나는 고민과 경력이 단절되는 불안을 끌어안은 몸으로 아프기까지 한 실업자의 처지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
정규직·비정규직을 불문하고 모든 노동자에게 유급병가가 적용되어야 한다. 당연히 대학 강사에게도 유급병가 제도가 도입되어야 한다. 건강권은 인권의 기본 전제이다. 불가침의 인권에 관해 국가의 보장 의무를 명시한 헌법 10조를 위반하고 있는 잘못된 현실은 이제라도 바로잡아야 한다. 코로나 팬데믹을 겪으면서 보완되지 못한 제도로 인해 엔데믹 상황에서도 끝없이 고통받는 상태에서 탈피해야 한다.
강의 시수에만 의존하고 있는 현행 강사료 계산 방식에서 상병수당을 어느 정도로 책정해야 할지, 학술생태계가 붕괴돼 가는 현실에서 긴급 대체강사를 어떻게 확보해야 할지 등 논의해야 할 일이 적지 않을 것이다. 적극적으로 중지를 모으고 합의를 이끌어내야 한다.
지금도 시름에 겨운 강사들이 아픈 몸을 끌고 강단에서 비틀거리고 있다. 시름은 사회가 짊어지고 아픈 사람은 오로지 아프기만 할 수 있기를, 치료에만 집중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런 세상이 되도록 관련 제도 정비를 촉구한다.
김진균 한국비정규교수·노동조합 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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